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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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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에 불기 시작한 '정부재창조' 바람 

 

 

 

 

 

 

미국 연방정부의 구조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환경의 변화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된 초점으로 정부 운용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신보수주의의 물결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 기능의 민영화, 정부지출 삭감, 지방정부 간 관계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클린턴-고어 행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3년 범정부적인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NPR : National Performance Review)을 마련, 관리통제 위주의 업무 직위를 줄이고 능률향상을 통한 ‘일 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Works better and Costs less)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앨 고어의 MPR은1998년 두남이라는 출판사에서 '기업형 정부 재창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이를 위해 1993년 NPR 보고서를 통해 5년간 연방공무원 25만개 직위를 폐지를 권고했다. 이후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 공무원의 수를 클린턴 행정부 출범 초기의 218만 8천 647명에서 집권 말기인 2000년 12월에는 176만 1천 376명으로 42만 7천여명, 19%를 줄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조직도 대대적으로 감축을 시도했다. 과거 30년간 600여명으로 유지돼오던 백악관 인력을 25% 감축, 500명 선으로 줄였다.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이러한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한 정부혁신사업단을 직접 이끌면서 정부실적 및 결과에 관한 법과 정보기술개혁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앨 고어가 주도한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의 중요한 의의는 인사행정 개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민영화를 통한 정부 부문의 독점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 공급자의 역할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1992년에 집필한 오스본과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기업가적 정신이 공공 부문을 어떻게 전환시키는가>는 고어의 NPR 실행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오스본과 게블러는 정부를 기존의 행정 관료제적 접근이 아닌 기업가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가적 정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중점적으로 축약할 수 있다. ① 정부는 과거처럼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을 잡아 주어야(Steering) 한다. ② 정부의 활동으로서 서비스의 독점보다는 서비스 제공에 경쟁 개념을 도입한다. 시장 지향적 정부로 변모해야 한다. ③ 고객(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낭비를 줄이고 고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오스본과 게블러가 주창한 ‘정부재창조론’은 이듬해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기업가 정신을 통한 정부혁신을 주도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적 정부가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오스본 &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그리고 앨 고어의 정부혁신은 경영에서 볼 수 있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조직을 야위게 만드는 경영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슬림화를 통해 능률의 증진을 추구한다. 기업체의 관료화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구를 단순화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화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모할 수 있다. 오스본 & 게블러가 주장한 새로운 정부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정책을 담당하며 제도를 움직이는 정부의 역할은 무조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더 많은 공공 서비스 권한을 이양하는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시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공공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촉진한다. 이는 곧 참여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행정학 전공에서 배우고 있는 정부재창조론의 장점이다. 공무원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정부재창조론은 지금까지도 행정 이론의 발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재창조론 도입에 비롯되는 장점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에 행정학 전공 기초 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정부재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을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 책은 바로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가 함께 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정치학자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 때문에 ‘다운사이징’되었다고 비판한다. 기업가적 정부의 역할이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오스본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시민의 정치 역할이 축소되는 개인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시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통치행위를 할 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자의 임기를 매우 짧게 하고, 추첨의 방법으로 선발과 교체를 빈번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통치자의 전횡 기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통치자의 책임은 사회계약론으로 설명되었다.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시민은 저항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시민 간 계약의 실증적 기초도 없고, 통치자에 대한 시민의 선출권이 전제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소극적 권리 이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접근은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실현된 삼권 분립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가 분할된 국가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의 통제권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의 권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두 권력 기구의 갈등 사이에서 사법부의 힘 역시 커졌다. 이러한 권력 확대의 과정에서 정부 권력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범위가 다시 축소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민주주의가 축소된 결정적인 계기가 클린턴 행정부 때 실행된 앨 고어의 NPR이다. 저자 크렌슨과 긴스버그는 정부 혹은 정치 엘리트들은 더 이상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유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한다.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대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다.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非) 엘리트, 즉 시민의 정치 참여를 종용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민주주의로 변했다. 종래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통해 공론의 장을 형성하던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익(私益)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변화는 민주주의를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익을 위한 참여 범위로 제한을 두는 꼴이 되었다. 정부는 고객이라는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 선택의 기회를 하나의 유인으로 제공한다. 고객은 자신의 공공 서비스 선택 및 참여가 정치적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민의 도움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정치 엘리트의 새로운 기술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축소된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정부 모형을 기반을 둔 정부재창조론은 정부의 목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의 목적만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 목적 또한 점점 격화되고 있다.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정부 혁신은 반쪽짜리 성공

 

책은 주기적 선거만으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통제권으로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없다. 공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개인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여주는 심각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주의는 잘못된 통치의 책임을 일상적으로 추궁하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정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지루한 성공’만을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매 정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정부 혁신이 관료제적 정부를 변화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시민의 정치적 행사를 축소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힘을 도외시한다면 지루한 성공이 아니라 반은 실패한 반쪽짜리 성공이다. 오늘 당장은 잘못된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해야 하겠지만, 결국엔 힘을 조직하고 대안을 형성하는 시민의 결속력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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