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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Meme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장 프랑수아 밀레  『죽음과 나무꾼』 1856년

 

 

커다란 막대기 다발을 갖고 노인이 먼 거리를 여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깨닫고, 그 막대기 다발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인은 죽음의 신에게, 자기를 불행한 생활로부터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의 부탁에 죽음의 신은 바로 찾아와서, 노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제발, 제가 짐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솝 우화' 중에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남들 다 죽는데 나도 그때 죽으면 되는 것이지,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거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죽기 전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누구나 편안히 잠드는 것처럼 죽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죽어가는 모습 역시 다르다. 천차만별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를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정의,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했지 죽음 단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살아 왔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예일대에서 '죽음'을 주제로 교양철학 강좌를 진행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정의를 두 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물리주의자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물리적 죽음)과 육체의 관점으로 보는 죽음(육체적 죽음). 물리주의자는 육체가 P 기능(Person function, 인지 기능)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고,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말 그대로 B 기능(Body function, 신체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신체와 인격(마음, 정신 등 포함) 두 가지 요소로 죽음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죽음의 시점을 정의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 않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식물인간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이 상실되었으나 호흡과 소화, 흡수 따위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다. 식물인간은 P 기능이 상실되었고 B 기능만 남아 있다. P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P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다시 기능을 재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의 정의를 생각한다는 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죽어 있는 '상태'가 어떤건지 알려고 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사'가지를 피하는 방법

 

인간이 죽으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P 기능과 B 기능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생의 시간도 멈춰버린다.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나쁘게 보는 근본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은 박탈의 성격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편재성'이다. '죽음'의 이미지에 걸맞게 '사'(死, 숫자 四)가지다.

 

그러나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네 가지 부정적인 특성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관점을 역설한다.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p 377)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덜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썩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생의 한정성에 얽매어 여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 모른다고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쓸데없는 '기우'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신의 손길은 우리 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에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죽는 날을 알면서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죽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추며넛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에 완벽하게 집중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 받은 이후부터 연구에 매진했다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Memento mori

 

죽음은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삶이 아닌 내 인생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질없이 허망한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방송이다. 사람들은 텅 빈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한다. 이렇게 가슴 치는 일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의미 있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생의 아름다운 졸업이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덜어내고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곧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의 미래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는 꺼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현재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들을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를 하는 자들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죽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는가. 오늘 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기쁨으로 반길 준비가 돼 있는가. 이제는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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