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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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열대야가 무척 지독하다. 차가운 맥주의 거품만으로도 뜨뜻미지근한 밤 공기를 식혀주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해해보지만 수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창문을 열어놔도 시원한 바람 한 점 불어오는 대신에 습한 공기의 손길이 자꾸만 내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다. 자다가 깨고나면 TV로 올림픽 중계를 시청하는 대신에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고해서 열대야가 싹 달아나는 건 아니지만 한밤중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는 기분은 정말 유쾌하고 좋다. 특히 딱딱하고 두꺼운 분량의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 대신에 감성을 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나 시집 한 권 읽으면 어느 정도 무더위와 피곤함은 잊혀지게 된다.

 

고요한 열대야가 찾아 온 어제 새벽 3시 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설국'. 이름만 봐도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설국』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하던데 나는 순전히 소설 제목만으로 열대야의 무더위에 지쳐버린 감성을 식혀주지 않을까 싶어서 책장 속에 꽂혀 있던 얇고 하얀 『설국』을 집어 들었다. 일본 소설은 많이 읽는 건 아니라서 이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설국』의 니가타 현으로 향하는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은 망설였다. 평생 고독과 허무에 지배당한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마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국』곳곳에서도 삶의 유한성 앞에서 비롯되는 감상적인 허무의 매력은 회화적인 은유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소설로 인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설국』의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스토리를 서양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혔는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이 작품을 노벨 문학상으로 선정하는 이유를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어쩌면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가 만들어 낸 자연의 정경 묘사가 서구인들에게는 비서구인 일본의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허무'의 감정마저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동양의 미학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시마무라는 허무주의자다. 그나마 정형적인 성격의 시마무라와는 정반대인 게이샤 고마코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이라는 감옥 안에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한낱 시마무라 앞에서 울분만 토해내는 불만 표출에 그칠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시마무라는 여인에게서 고미코에서도 허무를 읽는다. 하지만 시마무라와 고미코, 이들은 서로에게 '허무'만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연민 또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시마무라는 고마코분만 아니라 설국 지방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도 만나게 된 요코라는 여자에게도 은근한 감정을 품는다.

 

 

 

요코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가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이러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p 110)

 

 

 

소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 이 세 인물 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많이 띄는 여주인공은 고마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마코는 처음에 시마무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과거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시마무라를 접대하는 일이 잦아들게 되면서 고마코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궁금해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한다. 여성들이 남성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빙빙 둘러서 말하듯이 고마코도 은근슬쩍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마코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박복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눈만 쌓이는 폐쇄적인 설국 지방에서 자란 고마코는 타 지방에서 오는 수많은 낯선 손님들을 접대하고 눈 녹듯이 떠나보내야하는 게이샤로서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기적인 만남보다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애가 묻어나오는 사람다운 사람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만남의 최적 대상이 바로 시마무라인 셈이다.

 

 

고마코는 깔끔하게 앉아 있다가 탕에서 나온 시마무라에게,

 '이렇게 조용한 데서 바느질을 했으면' 

방금 청소를 끝낸 방의 낡은 다다미 위에 가을 아침 햇살이 깊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느질 할 줄 아나?'

 '그런 말은 실례예요, 형제 가운데 가장 고생했죠. 생각해 보면 바로 제가 자랄 무렵이 집안이 힘든 시기였떤 것 같아요'

 

 (p 99)

 

 

고마코 말대로 시마무라는 정말 그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마코는 천상 여자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 고마코에게 조용한 방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로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한낱 희망사항일뿐이다. 더욱이 이 무뚝뚝한 허무주의자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여성적이면서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그 누구로부터 확인마저 받지 못한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고마코는 정말 사마무라로부터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시마무라가 불쑥 말했다.

 '당신은 좋은 애야'

 '어째서요?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라고'

 '그래요? 이상한 분이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하고 고마코는 시선을 돌리고 시마무라를 흔들며 뚝뚝 끊어 혼내듯 말하더니 잠자코 있었다.

 

 (중략)

 

 '그런데 어디가 좋은 애라는 거죠?'  하며 고마코는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처음 만났을 땐 당신이 정말 싫더군요.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는 이는 또 없을 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시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지금까지 제가 그걸 말 않고 있었던 걸 아세요? 여자가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닌가요?'

 '괜찮아'

 '그래요?' 하고 고마코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한 여자의 삶의 느낌이 따스하게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왔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은데요?'

 '좋은 여자'

 '이상한 사람' 하고 어깨가 가려운 듯 얼굴을 가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뜻이죠? 네, 무슨 말이에요?'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 줘요. 그래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p 126~127)

 

 

   

하지만 시마무라의 감정은 고마코에게만 향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시마무라는 전형적인 게이샤인 고마코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요코를 떠올리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마무라가 요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마무라는 사랑의 감정조차 자연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마치 나무가 계절을 입듯, 아무 것도 없었다가, 초록의 잎을 갖고, 그리고는 빨갛게 물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도 연정을 품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허무한 행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고마코의 사랑이 부질없는 '투명한 허무'가 되어 하얀 눈 속으로 파묻혀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고요한 열대야 속에 읽은 『설국』은 한 여름밤에 마시는 따뜻하게 데운 사케였다. 따뜻한 사케는 추운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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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8-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북극 허풍담]을 읽을 동안 시루스님께서는 [설국]을 읽으셨군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여름엔 아무리 사케라도 시원하게 마셔야하지 않을까요?
아니 여름에 사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요.
역시 겨울에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뜨거운 사케가 제 맛이죠. ^^

cyrus 2012-08-12 21:42   좋아요 0 | URL
소설 문장은 참 좋습니다. 설경이나 자연물을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서에 비유하는 표현이
저는 좋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