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여, ,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고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 되고픈[1] 마음이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묘비명이다. 원래는 릴케가 쓴 시였는데, 그가 죽으면서 시는 묘비명이 되었다. 릴케는 장미를 좋아했고, 장미를 예찬하는 시를 썼다. 그가 쓴 수많은 시에 장미라는 단어가 250번이나 등장한다. 릴케가 장미의 시인으로 알려져서 그런지 몰라도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 친구에게 줄 장미를 꺾다가 손가락에 가시가 찔렸는데, 그 상처에 덧나서 생긴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 [절판] 루 알버트 라사르트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하늘연못, 1998)

* [절판] 볼프강 레프만 릴케: 영혼의 모험가(책세상, 1997)

* [절판]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마음산책, 2006)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한동안 통증에 시달린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패혈증이 아니라 백혈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작가들의 최후를 모아놓은 죽음을 그리다(마음산책)는 장미 가시 때문에 영면한 릴케의 낭만적인 최후가 와전된 신화임을 보여준다. 임종에 가까워진 릴케를 진찰한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릴케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는 유서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딱 한 번 썼다. 릴케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의 순간을 언급했다.

 

 

나는 의사들에 의한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나의 자유를 갖고 싶습니다.”

 

(구디 뇔케 여사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릴케: 영혼의 모험가에 인용됨, 610)

 

 

릴케가 말한 자유가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릴케는 젊은 시절에 쓴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자신이 죽으면 영광의 광채(The radiance of Glory)가 내리길 원했을지도 모른다.[2] 영광의 광채가 찬란하게 내려오는 곳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천국이다. 릴케가 생각한 천국은 장미로 가득한 거대한 정원이 아니었을까.

    

 

 

 

 

 

 

 

 

 

 

 

 

 

 

  

 

* [절판] 루 살로메 선택된 자들의 소망(투영, 2000)

* [절판] 루 살로메 하얀 길 위의 릴케(모티브, 2003)

* [절판] 프랑수아즈 지루 루 살로메: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해냄, 2006)

    

 

 

 

 

 

 

 

 

 

 

 

 

 

 

 

* 릴케 릴케 시집(문예출판사, 2014)

* 릴케 기도 시집들(책세상, 2000)

    

 

 

릴케와 친하게 지낸(또는 연애한) 여성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Lou Andreas-Salomé)다. 루 살로메는 릴케의 인생과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준다. 1899년에 릴케는 루 살로메 부부와 함께 처음으로 러시아를 여행한다. 이듬해에 릴케는 루와 단둘이서 다시 러시아를 여행한다. 릴케의 러시아 여행은 시인으로서의 릴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투영)에 수록된 나와 릴케라는 제목의 글은 릴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작해서 그와 함께한 러시아에서의 여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 루는 러시아 여행의 여운이 반영된 릴케의 초기 시집 기도 시집을 분석한다. 이러한 릴케의 시 세계에 대한 루의 지대한 관심은 릴케가 죽은 후에 발표한 하얀 길 위의 릴케(모티브)로 이어진다. 루는 릴케가 자신에 보낸 편지글을 통해 그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정신분석학 관점으로 릴케의 중기 및 후기 시 작품들을 분석한다. 루는 프로이트(Freud)에게 배운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여 릴케의 시 세계에 반영된 어린 시절 릴케의 모습을 소환한다. 릴케의 어머니는 일찍 죽은 딸을 잊지 못해 어린 릴케를 딸의 대체물로 생각하면서 키웠다. 릴케는 일곱 살 때까지 여자아이처럼 인형을 갖고 놀거나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이로 인해 릴케는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지 못한 어린 릴케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향한 불편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루는 릴케의 글에 어머니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릴케는 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한 명이 앞서 언급한 루 살로메다. 또 한 사람은 릴케와 십여 년 동안 친하게 지낸 화가 루 알베르트 라사르트(Lou Albert-Lasard)이다. 릴케는 그녀를 룰루(Lulu)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룰루는 1952년에 릴케를 회고한 책 ‘Wege Mit Rlike(릴케와 함께 걸은 길)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릴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재혁 교수의 번역본으로 나왔다. 1993년에 소유하지 않는 사랑(범조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처음 출간되었고, 1998년에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하늘연못)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룰루는 루와 릴케의 관계를 언급하는데, 그녀의 남자다운 기질과 활동적인 모습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묘사한다. 루 살로메가 악녀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녀는 한 마디로 날카로운 오성과 활기찬 기질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딘가 지나치게 분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루 살로메는 나이나 겉모습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녀 특유의 타오르는 생동감 덕분에 여전히 그녀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루가 내뱉은 한 마디의 경멸조의 말에 눈물을 흘린 나머지 단안경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던 한 사내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녀의 눈길은 엄청난 힘을 발하고 있었다.

    

 

(루 알베르트 라사르트,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중에서, 77쪽과 80)

 

 

김재혁 교수는 라사르트의 회고록이 릴케 연구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볼프강 레프만(Wolfgang Rebmann)이 릴케 평전을 쓸 때 참고한 문헌 목록에 라사르트의 회고록이 포함되어 있다. 당연히 루 살로메가 쓴 회고록도 참고 문헌 목록에 들어있다. 루 살로메와 루 알베르트 라사르트의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독자는 릴케라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그의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권의 번역본 모두 구할 수 없게 됐다. 예전에 썼던 글에 한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절판된 책을 사람으로 비유하면 고인이나 다름없다. 릴케가 세상을 떠난 날 다음에 아침 신문에 실린 부고 한 줄 빌려 절판된 세 권의 책을 추도하는 짤막한 글을 남겨본다.

 

 

릴케 평전은 죽었고, 그가 쓴 시만 홀로 남아 있다! [3]

 

 

 

 

 

 

[1]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릴케: 영혼의 모험가를 번역한 김재혁 교수는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을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라고 썼다. 잠이고픈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져서 잠이 되고픈이라고 고쳐 써봤다.

    

 

[2]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중에서, 송영택 옮김, 릴케 시집, 19

 

 

[3] 원문: 릴케는 죽었고, 세상만이 홀로 남아 있다! (Rilke est mort, que le monde reste seul!,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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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2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서체로 물어보는 건데, 이 정도 함량의 글을 돈 한 푼 안 받고 쓰면 손해보는 기분 들고 그런 건 없어요??

cyrus 2019-05-21 19:44   좋아요 1 | URL
글 쓰는 재미로 하는 거죠. 예전에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무슨 대가나 인정을 바라면서 글을 쓰면 글 못 써요. 보상(인정)받아야 한다는 욕구를 가지는 것도 좋긴 하지만, 너무 거기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해탈하기로 했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