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이론은 근육이다,라는 저자의 정의는 명쾌하다. 알기 쉽고 주저없이 동의할 수 있다. 안팎에서 대량생산하는 [판타지]를 자유롭게 [사유]하고, 특정한 [입장]을 선택하기 위해 이론은 필수조건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이론에 [절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듯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이론이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이론도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기에, 개인이 납득하고 수용한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특정한 [행동]을 취하는 동안 발생하는 [흠결] 역시 필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흠결마저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이론이다. 따라서, 이론의 쓸모는 인간의 신체에 있어 근육의 쓸모 만큼이나 절대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아! 현정권에 기생하는 어느 경제연구가의 실용도 실용이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여하간, 내 자신 이론의 쓸모까지 운위할 깜냥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의 제목처럼 이론 가이드라도 어떻게 한 번 읽어보면 이 암울한 시절을 살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속내였다. 그러니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인문좌파]라는 정의가 어느 구석 어색했지만, 인문좌파가 누구인지를 설명한 그의 진정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 듣기만 해도 솔깃해지는 정의가 아닌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보기 힘들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 앞으로 키워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 소개한 이론가들은, 춘삼월 꽃노래처럼 나를 설레게 하지만, 어설프게 끝나버린 첫사랑 만큼, 아쉽게 내 손을 떠난 이들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을 소개한 이론서들이 한국의 현실을 잘 버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낯 두껍지만 이론서들의 겉도는 느낌이 내 무지의 결과만은 아니었다고, 나는 항변하고 싶다. 좀 더 알기 쉬었으면, 좀 더 현실정치와 가까웠으면 이렇게 데면데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있는 이론들은 뭐랄까, 답답했고 오기스러워 보였다. 이 또한 나의 무지이지만 말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올 봄에 만난 이 책은 다행이랄까, 그래 다행이었다. 매번 도망다녔던 [벤야민]과 [데리다]를 다시 찾게 했고, 대학시절 덮어버렸던 [루카치]에게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책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람시]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내게는 너무 명민해 보여 얄미웠던 [지젝]이나 뜬구름이었던 [라캉]도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실로 내게는 다행이고, 저자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표할 일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얻은 답이 있어,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이 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 책은 가이드 북이다. 나머지는 저자가 안내한 곳에서 궁금증을 느낀, 혹은 괘씸함을 느낀, 혹은 심한 현기증을 느낀 독자의 몫이다. 여행지에서 아무리 살뜰하고 총명한 가이드를 만났다고, 현지의 아름다움을 짧은 순간에 모두 체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가이드를 만나는 일 역시 현실세계에서는 사실 드물다.

현실로 돌아와, 시절이 하 수상하다. 결여로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생각에 비명에 가까운 공감을 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다'라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여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 데리다가 언급한 유령,이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나는 소름끼치게 그 장면들을 보고 있다. 지젝이 언급한 실제적 실재, 상징적 실재, 상상적 실재까지도 목도하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코미디 앞에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기 이전에 내 머리를 바람벽에 찧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 앞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저 혼자만 깨끗한 척 하느라, 정치는, 권력은, 속물적인 것이라고, 눈 감고 귀 막아버린 덜떨어진 청춘을 어찌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내가 힘없게 부르짖었던 [정의]도 힘을 가져야만 지켜낼 수 있는 것임을 이 험난한 시절에서야 알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 미안함과 이 참담함을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 나는 6월 2일 조용히 힘을 행사할 예정이다. 너무 작아 힘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하지만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0-05-27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여로서 존재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말이기도 합니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마저 주장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려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결여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습니다.

굿바이 2010-05-2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int236님의 말씀처럼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무덤에서 불러내서라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 마음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여하튼 지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멜라니아 2010-05-28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풀지 못하는 3차 방정식 같았던 이름들, 그의 이론들
멀찌감치 두고 언제 내 머리가 깨지면 다시 들여다 보리라던 그 이름들
그들의 저서들을 구분없이 쌓아두었으나, 아직도 제 머리는 안 꺠지고
더 굳어 버리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이 즈음,
굿바이님의 독후감은 살짝 책읽기와 삶읽기에 대하여 긴장을 만들고 있어요.

정치와 정의는 전혀 다른 정씨일가, 라고 제주도 도지사 선거판은
완전 개판도 이런개판이... 절망하면서, 어떤 사람을 당선시켜선 안 되니까
머리를 짜본다는 게 찍어줄 사람이 엉뚱한 사람이 되고 있는 이 상황을
저는 뭐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니
이론이 부족한 소치인가. 그런 생각도 짐짓 듭니다
세상을 바로보는 토대가 없는듯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깜깜한 머리를 탓하다가.

굿바이 2010-05-28 16:29   좋아요 0 | URL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제도화된 권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실은 정치인데, 현실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일이 더 많죠. 갑갑한 일이죠.
서울은 서울시장 선거도 그렇지만, 교육감 선거도 답답합니다. 물론,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지만, 제발 낙선되었으면 하는 후보들이 쉽게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을 보면, 하루종일 뒷목이 뻐근합니다.

멜라니아님이 세상을 바로보는 토대가 없다니요? 그건 말 안돼요. 참담한 마음에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결과야 모르지만, 최소한의 선을 위한 한 표 행사하시리라 믿습니다.

멜라 2010-05-28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고, 독후감 마감 임박 ㅋㅋㅋ

굿바이 2010-05-28 16:40   좋아요 0 | URL
넵^^

Tomek 2010-06-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고에 숨죽이고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들게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읽기에는 녹록치 않았지만요. 하루에 한 챕터 이상 복용하면 부작용이 발생하는 책이랄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굿바이 2010-06-21 23:35   좋아요 0 | URL
어떤 부작용이셨어요? 저는 멀미...ㅋㅋㅋ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진경의 새책 [역사의 공간]을 접하기 얼마 전, 나는 지인과 함께 한국인의 [빨리빨리]라고 불려지는 습속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주장과 지인의 주장은 달랐는데, 나는 우리사회가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에 젖게 된 시점을 일제 강점기로 보았고, 지인은 군인에 의해 산업화가 본격화된 시점을 그 계기로 판단했다. 그때 나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라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가져왔었다. 분침과 초침으로 명확히 계산되고 누적될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시간! 즉, 원형적 시간이 아닌 선형적 시간이 언제 역사의 공간에 등장했는지, 선형적 시간의 개념이 무엇을 목적으로 유포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자본을 끌어들인 침략국 일본은 노동을 착취해 생산잉여를 극대화하려고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민중에게 강요했을 것이고, 근대화되지 못한 신체를 근대적 리듬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근면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했고,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을 강제했을 것이다,가 내 주장이었다.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은 이 개인적인 논쟁에 온전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광범위한 사유를 던져주었다. 이 아니 어여쁠쏘냐! 

[역사의 공간]은 필자가 밝힌 것처럼 역사, 시간,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등의 공동성을 역사의 공간안에서 사유한 책이다. 필자의 사유가 워낙 광폭이고 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을 소화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새로운 시간 혹은 역사가 요구하는 욕망의 구도로 어떻게 편입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어떤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건 그 사회안에서 소수로, 타자로 존재했던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혁명을 사유하는 부분은 선험적 지식의 양과 무관하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공포의 정치로 기억되는 시절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버텨냈다고 할 수 없기에 나는 공포정치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권력이 어떤 유효성을 제시해 대중을 포섭하고 길들였는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내가 정치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의 한국은 민주화의 초입이었고, 내가 경제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은 IMF의 초입이었다. 하여 그당시 실존으로서의 먹고 사는 일이 어찌나 큰 화두가 되어 버렸는지, 사회혁명의 짜투리를 넘겨다 보는 일조차 실로 사치였다면 개인적인 과장일까, 여튼 그랬었다. 그렇다고 중심부에 편입되었던 것도 아니니 나는 주변부의 상황 역시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던 사건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때마다 작게 분노하고, 작게 동정하는 일이 내가 취한 최대한의 도덕이었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위안이었지만, 쉽게 얻은 만족이기에 한편 하찮을 수 밖에 없었다. 

집단적 이익만이 존재하는, 심지어 생명의 권리마저 자본의 권리를 위해 폐기되는 사회를 산다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적 리듬에 엇박을 놓을 수 있는, 적어도 제단된 욕망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그러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버려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 그 일을 통해 얻어진 댓가를 주변부의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실패했다. 필자가 말하는 [흐름의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중]을 파악하지 못했고, [소수자] 혹은 [타자]들의 연대를 구축하지 못했다. 실패의 기억은 쓰라리지만 그렇다고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  

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신들의 고통, 자신들의 저항마저도 자신만의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타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를 통해 다수자들과 거리를 느끼고 간극을 만들기 시작한 모든 이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저항과 돌발의 지대로 유인하는 것,.......어떤 저항과 투쟁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그 공감이 공명되며 확대되어갈 때, 그리하여 또 다른 커다란 돌발의 흐름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소비하는 속물들이 출현하는 일이야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조그만 불행'아닌가. 그 조그만 불행을 피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순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조그만 불행을 큰 불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리석음과 오기로 탈진해 버렸던 지난 시절이 안쓰럽고,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할 것인지', '운동이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또한 내가 꿈꾸었던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정주하면서도 떠날 수 있고, 이동하면서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시점일 것이다. 거대하고 단단한 그 어느 지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되돌아 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내게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10-02-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조 양반의 미덕은 천천히, 우아하게...였겠지요.
식민지 시대 착취의 대상이 되면서 천박한 빠름이 '빨리빨리'의 원형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전국민의 '빨빨화'로 확산된 것은 아무래도 산업사회의 리듬감이라고 봐야겠죠.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땅은 농민들의 삶이 지배하는 1년 단위의 느린 호흡을 가졌더랬으니 말입니다.

굿바이 2010-02-2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말처럼, 다시 생각해보니 산업화의 리드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제 주장은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시와사회 편집부 옮김 / 시와사회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딱히 뭐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나를 포함한 그들을 천후파(天候派)라 부른적이 있었다. 어제 저녁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어쩌면 봄비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피식웃었다. 그시절 일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1997년. 그 해 봄에는 유난히 비가 잦았다. 한 두 달가량 수요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런 날이면, 바람결에 실려오는 젖은 흙비린내에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반쯤 미친 상태로 회사 근처 작은 서점으로 향하면, 그곳은 습기에 민감한 오래된 책들이 눅눅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비좁은 공간에 마련되어 있던 간이 의자는 식빵처럼 푹신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낌없이 남아있는 정신의 반도 놓아버렸다.

내가 정신나간 여자로 변해 찾아 헤매던 숱한 책들중에서 나를 쉬게 했던 책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집이었다. 시집과의 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라는 단어의 절박함에 나타샤,라는 단어의 울림과 당나귀,라는 단어의 떨림이 나를 붙들었던 것이다. 나는 멈추고,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빗소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1935년 11월)


수절과부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에 치를 떨며 행간속에서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 시와 마주앉아 그렇게 꼼짝없이 바람벽앞으로 불려나와 있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
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그 밤 나는 내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가장 소중한 그것들을 떠올리며, 이 시를 앞에 두고 곡(哭)하였다. 오늘도 비가 오면 백석이, 백석을 앓던 시절이, 그 봄밤의 빗소리가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마스카라가 다 번져 엉망이 된 젊은 처자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책방 아저씨도. 깜빡이던 백열등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0-02-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백석 오라버니의 시들을 좀 외워볼까봐요.

굿바이 2010-02-0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글이 예뻐서 낭독하면 참 좋아. 봄밤에 취기가 좀 오르면 노래처럼 불러도 좋고, 언제 낭독의 밤,같은거 한 번 해볼까나^^

동우 2010-02-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 책읽는 부족 함께 만나면, 굿바이님 낭송하는 백석의 시를 듣고 싶습니다.

굿바이 2010-02-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를 시키면 좋겠습니다.ㅋㅋㅋ

웽스북스 2010-02-1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석 오라버니는 언니가 해야...ㅎ

굿바이 2010-02-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됐고!!!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에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가 포함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연유로 반백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항용 벼락처럼 내 귓전을 치지만, 아버지의 뒷태는 흡사 안개처럼 흐려지기 일쑤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혜와 깨달음을 내 아버지를 통해 엿볼 수 있었으나 그 값으로 원치 않는 허무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내게 [관촌수필]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이자 사라져버리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의 심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거론함에 있어,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충청도 사투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때 모든 농촌은 충청도라 믿었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살아 움직여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허나 방언은 잘 알려진 특징일 뿐, 작가의 수사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가가 조부로부터 득한 한문의 수사학에 힘 있고 격조있는 문어체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관촌수필]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관촌수필이 한 권으로 묶여 있지만 여덟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작가가 집필한 다른 저서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갖춘 것을 볼 때, 그의 글은 단편으로서의 묘미가 가장 크다. 그것은 구어체적 특징 때문이다. 그의 글은 툭 터진 웃음보마냥 또는 사레들린 사람의 기침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진 에피소드들은 풍성하며 반듯하고, 훈훈하며 가슴을 쥐어지르는 것들이다. 이만한 글의 성찬이 또 어디있겠는가.

[관촌수필]을 술회하는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심중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꺼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좀 더 각별했다. 조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 어머니를 상징하는 감나무 그리고 이제 홀로 고향을 지키는 복산이라는 구부러진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분에 취해 내 유년기의 그때로 잠깐 헛발을 들여 놓고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제 깜냥에도 친가에 있던 감나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몰락하는 존재의 운명앞에서 그리고 삭정이처럼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들 앞에서 나는 비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옹점, 녹수청산(綠水靑山)의 대복, 공산토월(空山吐月)의 석공이라는 등장인물들은 책을 덮고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옹점과 대복 그리고 석공처럼 무엇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리고 무엇도 채근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려가면 덥썩 끌어안아 줄 인연들을 삶의 어느 지점마다 매듭지어놓은 작가가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을, 작고한 작가를, 아련하고 서운한 풍경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이십년은 묵은 친구와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만큼 작가의 모든 것에 각별하다. 이는 누구의 말처럼 그는 내게 깜깜한 밤에도 길을 보여주는 북극성이었고, 울화가 치미는 속내를 털어놓고 치기를 부리고 싶은 선배였고, 연애를 걸고 싶은 진짜 남자였다. 그러니 2003년 2월 그의 부음을 듣고 부레가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무관하더라도, 우리 문단에 그대로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던가. 진짜 어른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월이 왔다. 나는 한동안 그의 글 속에서 여투어 둔 마음을 담아 기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 글이 축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락서산의 한 대목으로 감히 축문을 갈음한다.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 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현대문학, 1972년 5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윤 2010-02-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문구작가처럼 살고싶다고 했었지? 요즘 너를 보면 많이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2월이구나.

굿바이 2010-02-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닮는다....나잇살과 주름살?^^ 선생님의 글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맴돌기만하는 내가 못마땅해서인지, 2월이면 어김없이 멜랑꼴리해져.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