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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시와사회 편집부 옮김 / 시와사회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딱히 뭐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나를 포함한 그들을 천후파(天候派)라 부른적이 있었다. 어제 저녁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어쩌면 봄비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피식웃었다. 그시절 일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1997년. 그 해 봄에는 유난히 비가 잦았다. 한 두 달가량 수요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런 날이면, 바람결에 실려오는 젖은 흙비린내에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반쯤 미친 상태로 회사 근처 작은 서점으로 향하면, 그곳은 습기에 민감한 오래된 책들이 눅눅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비좁은 공간에 마련되어 있던 간이 의자는 식빵처럼 푹신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낌없이 남아있는 정신의 반도 놓아버렸다.
내가 정신나간 여자로 변해 찾아 헤매던 숱한 책들중에서 나를 쉬게 했던 책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집이었다. 시집과의 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라는 단어의 절박함에 나타샤,라는 단어의 울림과 당나귀,라는 단어의 떨림이 나를 붙들었던 것이다. 나는 멈추고,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빗소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1935년 11월)
수절과부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에 치를 떨며 행간속에서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 시와 마주앉아 그렇게 꼼짝없이 바람벽앞으로 불려나와 있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
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그 밤 나는 내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가장 소중한 그것들을 떠올리며, 이 시를 앞에 두고 곡(哭)하였다. 오늘도 비가 오면 백석이, 백석을 앓던 시절이, 그 봄밤의 빗소리가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마스카라가 다 번져 엉망이 된 젊은 처자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책방 아저씨도. 깜빡이던 백열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