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 - 세상과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함께 성장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마케팅의 아버지’,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거장’, ‘세계적 마케팅의 대가’, ‘경영사상가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 필립 코틀러의 신간이 나왔다. 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은 그의 마케팅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볼수 있지만 분명 독특한 면이 있다. 내가 보았을 때 두가지 면에서 이 책은 여타 다른 저자의 책과 차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 마케팅의 대가이며, 경영에 포함되어있는 마케팅을 좀더 예리한 이론화와 경영사상으로 한차원으로 끌어올린 구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피터 드러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마케팅중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한 면에 대해서 집중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기업의 이미지와 상품을 팔기위해서 여러 가지 마케팅의 방법들이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부분에서 기업과 소비자와 사회의 윈윈 전력에 대해서 세련되고 사례중심으로 다룬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보니까 공동저자가 두명이나 있다. 데이비드 헤스키엘과 낸시 R. 리 가 그들인데 이들도 모두 경영과 마케팅의 전문가들이다. 필립 코틀러의 전작들은 깊고 넓은 차원에서 그의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서술했다면 이번의 책을 읽어보면서 크게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은 철저하게 사례중심, 연구중심이 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자료들이 많이 제시되었고 각 기업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써 마케팅했던 전략들이 매우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자료들은 바로 두 사람의 공저자들이 담당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매우 체계적이고 매우 잘 다듬어진 책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굿워크 전략>의 핵심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기업들이 사회와 연계해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전략적으로 6가지를 제시하는데 이 책은 바로 이 6가지 사회적 책임 마케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구체적인 기업들의 사례와 표를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6가지 구체적인 전략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익 캠페인 : 고객들 설득하여 회사가 지원하는 공익에 참여시킨다.

둘째 공익연계 마케팅 : 제품 판매와 소비자 행동을 토대로 공익에 기부한다.

셋째 기업의 사회 마케팅 : 행동 변화 캠페인을 지원한다.

넷째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 공익에 직접 기부한다.

다섯째 지역사회 자원봉사 : 직원들의 시간과 재능을 기부한다.

여섯째 사회책임 경영 프랙티스 : 사회적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경영 프랙티스를 변화시킨다.

 

이 책 <굿워크 전략>은 이 여섯가지의 내용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매우 체계적이고 전략적이고 정보중심적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자의 합류로 인해 세련된 마케팅의 체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기업의 목표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그 전략적 목표를 수정하고 있다. 오래동안 기업의 목적은 단지 이윤추구라고 했다. 물론 이윤추구는 기업의 목표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은 그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다. 그래서 조금씩 경영 이론가들은 기업의 목표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이론에서 그 방향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 나라와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는 기업이라는 존재는 그 영향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일정한 사회적 기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엄청나게 깊이 들어와있는 기업들은 이제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그러나 기업은 단순한 윤리도덕적인 조직이 아니라 이윤을 내어야 할 조직이기에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마케팅과 연결시켜 기업과 소비, 그리고 사회가 서로 윈윈하는 전략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책은 여러기업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책임과 마케팅을 연결시키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또 이 책에서도 많은 부분을 언급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스타벅스이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중요한 발언을 했다.

 

스타벅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의 토대가 되는 가치는

기업의 사명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 영감을 불어넣고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객 한 분, 음료 한 잔, 이웃 한 사람에게 온 정성을 다한다.“

40년 동안 우리는 윤리적 가치에 의거해 커피 원두를 구매했고, 원두 재배 농가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방식으로 그런 가치관을 지켜왔다. 또한 매장이 있는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매장을 운영하며 환경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그런 가치관을 지켜왔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의 경영철학에 따라서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라는 상품을 파는 기업을 넘어서 가치와 공유와 공존을 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 기업이 되는 목표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일환으로 스타벅스는 환경에 전략적 초점을 맞춘다. 종이컵 재활용에 대한 시스템적 사고 접근을 위해 ‘MIT 조직학습학회와 손을 잡고 재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낭비하지 않고 종이컵들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고, 커피를 내리고 남은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던 손님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찌꺼기를 포장해서 원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퇴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사회공헌 활동을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청소년들에게 환경에 대한 사랑과 환경 보호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어린이환경유산재단Children’s environmental heritage foundation’에 많은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사회 자원봉사를 위해 중국 상하이 민항구에 그린이웃 조성하기를 지원했고, 친환경적 사업을 위해 미국친환경건물위원회의 에너지 환경 설계 리더십, LEED표준을 사용하고 이 인증을 획득하여 스타벅스가 친환경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이러한 이 책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스타벅스는 사회와 기업이 함께 공존할 때 매출 또한 급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예시되었다

 

이제 기업은 소비자와 사회와 함께 공존하며 생존해야 한다.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이윤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기업이 윤리적 사명을 다할 때, 즉 소비자와 사회를 향하여 착한 일을 할 때 이것이 곧 기업의 굿워크 전략Good work strategy’이 되어서 기업과 소비자와사회가 함께 공존하는 고도의 효율적이면서도 착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내용이다. 이제 커피를 사먹어도 그 커피가 공정한 거래를 통해서 들어왔는지, 아프리카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댓가가 주어지는지가 언급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기업이 착한 일을 하면 소비자는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착한 기업,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이윤을 높여줄 것이다. 기업들도 단순한 ()’가 아니라 ()’ 돌아갈 때 이가 따라온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연구라고 생각한다. 선함을 따라갈 때 이익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이익을 좇지말고 선함을 좇을 때 두가지를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생전략도 함께 배울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파란만장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래도 평탄한 편은 아니였고, 나름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수성가라고 해봐야 뭔가 거창한 성공이나 부를 누린 것은 아니고 나의 환경에 비해서 반듯하게 그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 초등학교 6학년때 했던 신문돌리는 아르바이트가 가장 처음한 일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친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신문을 돌렸다. 돈을 벌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일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의 그 경험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몇가지 장면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때는 상당히 작은 편이였다. 그렇게 작고 이쁘게(?) 생긴 아이가 새벽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는 것이 새벽녘에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는 어른들에게는 참 딱해 보였나보다. 그래서 어떤 가게에서 신문을 돌리면 가만히 있어보라고 하고서는 과자나 먹을 것을 주셨다. 그리고 길거리를 가다가 회사에 출근하는 아저씨들은 남은 신문을 사갔는데 거스름돈은 받지 않으셨다. 어린 나는 그러한 경험이 무척이나 신이 났고 한달치 월급을 받을때는 무척이나 들떠서 떡볶이나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사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뭏튼 그때 나는 순진했고 사회에 대해서 몰랐지만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뭔가 안타까워하는 듯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삶이 팍팍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른들은 어린나이에 현실에 내몰린듯해 보이는 어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진로가 정해지지 않았던 나는 어떤 소속감이 없던 상태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직장을 잡고 돈을 벌고 있는데 나는 뒤쳐진다는 생각, 알바나 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스스로가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진로를 정해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뒤로도 필요한 비용을 벌기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전국을 돌며 전화기지국에 있는 에어컨을 고치는 일, 우유배달, 식당 서빙, 식당 음식배달, 심지어는 신종 의약품 실험대상이 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나로써는 당연한 일이였지만 코에 튜브를 꽂고 몇일동안이지만 인간 마루타가 된 기분은 이루 말할수 없이 묘상했다. 그길로 그 알바는 그만두었고 대학원을 진학해서도 학비를 벌기위해 이런저런일을 많이 했다.

 

지금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의 팍팍함은 그때보다 더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워킹 푸어들을 수없이 양산하는 이 사회에서 의식주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인간의 조건>을 쓴 저자 한승태는 그러한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엮어서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웬지 서글프고 암담한 현실이 느껴졌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누구라도 대수럽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들이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꽂게잡이 배선원이나 양돈장 똥꾼처럼,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날것의 모습들. 그들이 지내는 숙소는 어느정도 크기인지, 여름엔 얼마나 덥고 겨울엔 얼마나 춥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배경과 어떠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저자는 꽂게잡이 선원으로 편의저과 주유소 직워능로 돼지농장 일꾼으로 자동차 부품공장의 공돌이로 일하면서 느낀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을 경험하고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6장에서 퀴닝(queening)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저자의 가장 중심적인 생각을 들어낸다. 퀴닝은 체스 용어로 졸이 한칸씩 움직여 상대편의 끝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여왕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에 신분상승의 의미로 퀴닝이라고 붙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지가 여왕으로 상승하기를 기대한다. 하루먹고 사는 처지에서 넉넉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직분으로 상승하기를 꿈꾼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퀴닝을 꿈꾸는 것은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을 달린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적인 구조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간간히 퀴닝할 수 없는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문제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형편과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므로 그들 또한 인간적인 삶과 신분상승을 꿈꾸고 있는 소박한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팍팍한 삶은 개인의 노력부족일까 아니면 사회구조의 문제일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던져주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저 음지에서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자들을 한번을 돌아보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그들도 퀴닝(queening)을 꿈꿀 수 있도록, 아니 퀴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먹고사는 것. 아마도 인간의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건강한 개인이 설수 없고 건강한 개인이 설 수 없다면 건강한 사회도 설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깝고 퍽퍽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감추어진 아픔이 드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네 이웃들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책이였다. 시장에서 추운데 앉아서 생선을 하나더 팔려는 아주머니, 정류장 옆에서 군밤을 팔면서 고마워하는 아주머니, 지하철 안에서 껌을 팔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팔아달라고 애원하는 분들...그냥 지나칠 타인이 아니라 함께 팍팍한 현실을 돌파해야할 이웃으로 한번 더 시선을 돌아보아야 할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이따위인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쓸모없는 놈이라며 손가락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단 제목이 참 흥미롭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 제목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두가지이다. 내가 몽테뉴를 잘 알지 못하고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 제목을 보면서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제목이 잀아적이여서 참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창한 '론'이나 '학'이 아닌 고양이를 제목으로 삼고 자신의 친근한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아서 거창하게 철학이라기 보다는 삶의 에세이를 써내려간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 몽테뉴를 저자 솔 프램튼은 그의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다니면서 몽테뉴가 가졌던 삶의 흔적들과 고민들은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16세기 철학자인 몽테뉴의 저서 <에세>를 바탕으로 그의 삶, 취향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도 분석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친근하고 유려한 문체로 들려주고 있다. 나는 아직 몽테뉴의 관한 책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다. 특히 이 책이 주로 참고하고 정리하고 있는 몽테뉴의 대표작 <에세>에 대해서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얼마만큼 몽테뉴에대해서 잘 드러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수 없지만 이 책이 나처럼 몽테뉴를 몰랐거나 아직 <에세>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에세>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 되어둘 것이고, <에세>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정리와 재현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매우 친근감있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책만 읽어도 그가 어떠한 인물이였는지에 대해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우아하고 현명하며 진지하고 사색적인 인물이였고, 일상의 비루함과 소중함을 함께 알고 있었던 사람이였다. 고전적이며 사색적인 인물이라고 할까.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는 16세기 프랑스로 그 당시 시대적인 풍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이 있었던 시대였다. 몽테뉴가 보기에 그 당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 정신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만드는 사상이였다. 이러한 배경을 지나면서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고 특히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불행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에 그는 진정한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불과 두달 만에 죽었고, 남동생은 테니스 공에 맞아 죽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 보에시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역병에 걸려 죽었고, 존경했던 아버지도 오랫동안 신장결석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러한 고뇌와 개인적인 불행은 몽테뉴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스토아철학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이후의 초월적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 삶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삶의 철학자가 된 몽테뉴는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으로 자신의 삶을 따라가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사유의 단상들을 길러올리고 그것을 기록하여 자신의 일생의 대작인 <에세>를 완성시켰다. 그 당시 근대적 철학사상이 문을 열기되었는데 특히 데카르티의 사상이 모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확실성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이상과 사물을 분리시키며 근대를 열어제쳤다면 몽테뉴는 시대적 주류 철학이였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오히려 확실성이 분리를 낳고, 그 분리가 폭력과 인간의 불행을 낳는다고 보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몽테뉴 사유의 위대함과 주류 철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보듬고 통합하는 삶의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인간됨이 강하게 부각됨을 볼수 있었다. 이러한 친근하고 통합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바로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고양이를 보면서도 인간과 동물을 분리시키며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서 신비하게 섞여 서로에게 주체적 영향을 미치는 그의 통합적이고 따뜻한 사유 방식을 알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주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이고 통합적 사유는 무자비하게 신대륙을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을 비난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돈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었던 원시부족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는 것에서도 그의 사유는 잘 드러난다. 몽테뉴는 그 당시 유럽인들의 탐욕이 얼마나 크고 무자비했는지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는 참으로 삶을 사랑하고 따뜻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포도주와 여행을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기록'에 집착했다. 매우 사소한 것까지도 적는 바람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16세기의 자세한 분위기를 알수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확실성의 시대에 차이를 존중했으며 그 차이에서 오는 모호함과 불확실을 즐겼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21세기 사상의 단초를 엿볼수 있다.

 

저자 솔 프램튼은 계속해서 16세기 근데의 주류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와 몽테뉴를 비교하여 몽테뉴가 강조한 존재의 중요성, 자아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 일상의 중요성들을 계속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까 참 따뜻해진다. 몽테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친구로 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몽테뉴가 신봉했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라는 회의론에서 벗어나, '철학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는 죽음의 철학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과 주체로서의 확실성을 담보로하는 '자아'가 아니가 개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참된 삶과 사유가 어떠해야 하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늘 자신을 초월하는 곳에서 맴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자꾸 미래로만 향하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어, 더 이상 자신에게 미래가 없을 경우에도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가 생각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현재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할 시간을 놓치게끔 만든다.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였다. 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탈근대의 철학의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주는 몇안되는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이다. 어떤 다른 철학자의 사상에 기대지 않은채 오직 홀로 사색을 통해서 스스로의 철학을 세워나갔던 스피노자는 어떤 이에게는 이단,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치는 새로운 철학을 제공하는 선구자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써 부모님의 많은 유산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신을 부정한 것으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그뿐 아니라 유대교 신자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서 홀로 렌즈를 세공하며 스스로 철학을 했던 고독하면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철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 '자연이 신'이라는 범신론적인 사상인데 단지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진술이 아니라 실존적인 인간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나는 풀이하고 있다. 모든 철학책이 그렇듯이 철학적 진술은 깊고 좁은 사유를 철학적 개념으로 풀어내기에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즉 철학을 현대적으로 적용하고 자신의 삶의 기술로써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 <눈물닦고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실천철학적 담론이자 적용서이다. 에티카에 적근하는 방식이 신선할 뿐 아니라 실용적이여서 철학의 현대의 삶에 기술이 될 수 있고 치유서가 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공방 별난'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인문치료와 철학상담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젊은 철학자이다. 저자는 철학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치이고 상처받는 이들의 삶의 기술과 지혜를 가르쳐주어 스스로 헤쳐나가는 해법과 외부의 구조적 공격에서 오는 상처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철학이 줄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인문치료법과 철학상담의 가능성에 대한 결과물이다. <눈물닦고 스피노자>는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28살의 백수 김철수 군. 서울의 대학 철학과를 나오고 나름대로 스펙을 쌓기 위해서 어학연수를 다녀와 8년만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근처 고시원에서 근근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삶이 절망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여자친구는 곧 떠날것 같다. 그래서 술마시고 늦게 들어와 화장실에 앉는순간 바로 앞 거울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거울이 열리고 스피노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철수의 시대와 스피노자의 시대가 시간을 넘어 연결되고 서로 1시간 동안 대화할 수 있는 창이 열린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철수는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자신을 스피노자라고 소개하는 한 남자를 통해서 삶의 고민과 어려움울 토로하기 시작하고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상담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삶의 기술로써 철학의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극복해 나간다는 형식이다. 소설형식으로 되어있어서 읽기와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김철수는 삶에서 읽어나는 상처와 어려움을 하나하나 스피노자에게 털어놓는다.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증, 신경증, 강박증, 과대망상증, 도착증, 공황장애, 중독, 경계선 인격 장애조울중, 관계망상, 분열증, 공포증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증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구조가 주는 정신적 질병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처방중에서 정말로 탁월하다고 생각되었던 방식이 있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전수하여 프랑스 심리치료서 펠릭스 가타리는 제도요법이나 분열분석을 만들어 내었다.

 

일반적인 심리치유자가 상당가들은 내면의 고통과 삶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너의 마음을 태도나 자세를 바꾸어라 그러면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이러한 전통적인 심리치유에 대한 방법에 무수히 많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도 내 마음을 바꿀수가 없어서 내 마음의 상처를 떠나보낼수 없어서 무수히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는데 단지 그냥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라고? 이러한 상담은 자기 안에 암덩어리를 자기가 잘라내라는 말과도 같이 들렸다. 전통적인 심리적 치유 방법적 진술인 이러한 말은 대단히 비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다른 방식으로 치유에 대한 방법을 말해준다. 그는 단지 마음을 바꾸라는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므로 인간안에 있는 내재성을 바꾸라고 한다. 나는 스피노자가 말한 '내재성'이라는 개념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인간은 단지 몇가지의 생각이나 태도를 바꾼다고 바뀌는게 아니였다. 안간의 내면안에 인격과 생각과 경험의 씨줄과 날줄이 오래동안 짜여지고 배치되어서 한 인간의 내면의 독특한 특성이 생긴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안에 짜여지고 배치되어진 독특한 특성을 바로 '내재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철학자들의 방식과는 확실히 차별적으로 구별되는 개념과 인간변화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러한 변화의 방식은 당장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애인과 헤어져 아파하고 있는데 단지 생각만 바꾼다고 마음의 태도를 바꾼다고 내가 치유되고 변화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애인과의 함께 오래동안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나의 내념에 하나의 내면성으로 짜여지고 배치된 내면성은 단 한순간의 다른 생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그 애인을 통해서 짜여진 나의 내면성을 자연스럽게 바꾸므로서 나는 변화되고 치유될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내면성'의 개념은 내가 볼때 인간에 대한 매우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생각이나 태도는 바꾸는 피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내면성을 구성하는 관계망과 그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외부를 바뀌어주어 그 외부로부터 인간의 내면성을 바꾸려는 시도인 것이다. 정말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한 하나의 생각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 복잡한 내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것을 또한 스피노자는 '내면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철수가 스피노자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스피노자는 김철수에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 관계망을 하나의 영역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부드럽게 횡단하여 자신의 내면을 형성하는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하면서 김철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외부의 관계망의 배치를 바꾸어 줌으로써 인간의 내재성을 변화시켜 고정된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내재적 이성'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철학적 치유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환경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내재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환경을 함께 바꾸어주어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이 신'이라는 개념이 조금 이해가되었다. 스피노자의 이 진술은 종교적 진술이 아니였다. 그의 진술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 인간을 이해해야하는 인간이해를 위한 진술이였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해했다. 아마도 그를 파문했던 유대교인들도 그를 오해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진술이 단지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치유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해의 진술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좀더 스피노자에게 다가간 기분이다. 이제 나도 스피노자를 만나볼 시간이 된 것 같다. 물론 화장실에서가 아니라 책으로 말이다.^^

 

종교든 돈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권력의 시선은 신체를 싸늘하게 경색시킵니다.그러나 사랑과 욕망이 신체를 부드럽게 만들지요. 일단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 신체를 변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이 요구하는 하나의 신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인물로 전락하고 말지요. 모든 영역을 횡단하면 신체 변용의 역량은 상승하게 됩니다. 횡단은 이 영역과 저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죠. 옆방 사람과 경쟁자 관계로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친구, 형, 조언자의 관계를 넘나들어보세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변용 역량을 상승시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는 사라질 것입니다. '접촉하는 모든 영역을 횡단하여 존재라하!'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횡단은 변용을 일컫는 또 다른 말입니다." (p.37~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이란 무엇인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제목이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임에도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관심이 갔다. 평소 죽음에 대해서 미미하게 사고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문득 난 결국은 죽어야할 존재라는 인간의 최종적인 당위명제가 내 머릿속에 떠오를때면 그것이 나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오기 보다 뭔가 좀더 살아있는 이 현실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겠다는 무언의 어떤 각오들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하게 죽음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죽음이라는 찰라적인 순간이 길고 질긴 일생의 모든 순간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라는 어떤 사고의 실마리가 그것에 대해서 좀더 의미있기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최종적인 삶의 종착점이고 그것이 삶처럼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경험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이생의 삶에 깊고 길게 드러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죽음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때였던 것 같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선배형이 있었는데 죽기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다음날을 시험기간이였는데 그 선배의 어머니가 선배를 깨우기 위해 들어갔다가 5분만 더 자고 일어나겠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5분후에 들어갔더니 죽어 있더라 했다. 내가 학교에서 그 선배의 소식을 들었을때 내 안에 묵직한 해머로 머리를 맞은듯한 깊은 충격이 왔다..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토록 현실의 삶에 큰 충격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리고 몇해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말할 수 없는 내 안에 그 죽음은 긴세월 트라우마를 남겼고 한동안은 도저히 현실이 아닌듯한 느낌이 들정도였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생각보다 가깝다. 모든 인간을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고 주변에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보다 이 현실에 그리고 각자의 인생에 죽음의 당위성은 언제나 깊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철학적 성찰이 나의 짧은 죽음에 대한 단상(短想)들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다.

  

저자는 셀리 케이컨 예일대학 교수이며 예일대 17년 교양강의의 명강의라고 부제가 달려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죽음의 인문학적 성찰과 현재를 살아가면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이 무엇인지를 알기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죽음의 인문적 성찰이라기 보다는 철학적, 논리적으로 죽음에 대한 여러 의견들에 대한 견해를 논리학의 형식에 따라서 저자의 판단을 서술해논 다소 지루한 책이였다. 저자가 서문에 대해서도 밝혔듯이 죽음의 사회적 인문적 의미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자 기대했던 죽음에 의미를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했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견을 저자가 하나하나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서 참과 거짓을 가려서 자신의 견해 밝히는 다소 주관적인 책이였다.

 

일단 이 책은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죽음을 당하는 대상은 바로 인간이기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결국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이 죽는 것인지를 논하면서 길고 지루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논할 때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되는 두가지 인간론은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일원론은 인간은 하나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것은 육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것을 인간은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지 존재이고 죽음이란 바로 이 육체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물리주의(physicalism)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나는 저자의 기본 의도는 알겠는데 일원론 즉 인간이 육체로만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물리주의라는 용어로 대체 했을때 다소 논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라 물질주의(materialism)이라는 단어는 유물론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오직 물질만이 한 개체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충실할 것 같은데 물리주의라는 단어는 만물의 작동원리로써의 의미가 강하지 일원론의로써의 의미로는 부적당한 것 같았다. 저자가 특별히 이 용어를 썼다가 보다는 번역자의 문제인것 같다. 어쨌든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견해는 인간은 육체라는 일원론이고 두 번째는 다소 복잡한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견해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영원의 존재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고 있다. 인간은 전통적으로 영혼의 존재이고 이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이며 그래서 불멸한다는 영원불멸의 사상이 전통적으로 오래동안 내려온 인간에 대한 이론이고 이 이론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참,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다. 바로 이 책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 책의 표지에 죽음에 대한 논의를 보편적인 죽음에 대한 전통적 견해나, 종교적인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의 논리로만 의지해서 풀어나간다고 한다. 저자가 인간의 구성요소를 정의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구성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인데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갈린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 하나하나 오직 논리적은 사유로써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견해에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본다. 비록 정신은 육체적인 물질적 구성되는 다르게 구분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정신 또한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육체와 정신은 하나이며,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오직 인간은 육체라는 자신의 결론을 피력한다. 그 다음에 살펴보는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전통적인 견해는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에 대해서 논의해 나간다. 이원론의 견해가 전통적으로 오래되었고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기에 저자는 좀더 세분화해서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이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이원론에도 몇가지 세분화된 견해들이 있다. 이것도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어떠한 연결성을 가지고 연결되어있는지 아니면 육체와 영혼은 별로로 존재하는 각각의 인간 구성물인지에 대해서 논하면서 만약 죽음이 육체의 소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육체와의 연결성이 끊어지므로 결국 소멸할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구성물이라면 육체가 소멸했을때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로서 어디에 머무르며 어떻게 증명되는지도 모르기에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은 결국 허구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저자 셸리 케이건은 인간은 오직 물질이며 단순한 물질이 아닌 좀더 복잡한 기계라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까지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고 그 이후로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과 자살과 삶에 대한 가치론적인 물음에 대해서 답해나간다.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지루한 논리적은 진술이 그대로 이어지지만 죽는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죽음과 상반되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논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저자의 의도처럼 철저하게 철학적인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의 가치에 대해서 논할때도 삼단논범으로 정의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는 죽음을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죽음이란 나쁘다고 할수 없다. 이러한 논리로 죽음의 무가치함을 반박하며 죽음은 인간에서 특별히 두렵나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불멸하여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과 같은 인생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살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나쁘다고 말하고 결국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행복을 영위할 때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오직 철학적 사유에만 의지하여 죽음을 풀어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인간이 풀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도 인간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이어진 것으로 너무나 넓고 깊어서 인간의 이성이 닿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에 있다. 이러한 것을 오직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만을 의지해 이러한 주장은 비논리적이라 틀리고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이라고 맞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보다는 죽음에 대한 참, 거짓의 주장을 살펴 이것이 참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진술 방식은 인생을 논리안에 가두는 어리석은 판별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죽음이 삶을 말하고, 삶이 죽음을 말하기에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술할 때 인간과 역사와 현실과 사유와 계시가 모두 어우러져 통합적으로 논해져야지 단순한 논리적인 진술로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바닷물을 한손으로 쥐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길고 지루하게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저자의 방식은 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의미로 보았을때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분석하여서 그 구성물을 쪼갤수 없으며 오직 신비한 타인으로써 바라볼때 그리고 존중과 존엄을 지켜주며 현실과 역사속에서 인간이라는 실존을 바라볼때 삶과 죽음의 의미가 좀더 깊이 있고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논증은 빈약한 것으로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기에는 실패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논증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이렇다. 인간은 오직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는 육체기계이다. 영생은 증명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오히려 해악이다. 자살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종식시키기에 옳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이생에서 스스로 책임지며 행복을 영위하는 것이 미덕인 존재이다. 이것이 저자가 길게 논의를 끌어간 결론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거창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좀더 의미있게 조망해줄때 죽음은 좀더 의미있는 인간의 종착점으로 그리고 한순간 순간 삶에 드리워져 있어서 유한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종말로써 기능할 때 참으로 죽음은 인간에게 인생에게 유익한 실존적 종말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p.50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림모노로그 2013-01-1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 불꽃나무님 서평 멋지네요 ㅋ
저도 저자의 논리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물론 죽음이 주는 가치는 오히려 삶을 더 값진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
최고 ~ ^^

불꽃나무 2013-01-16 09:38   좋아요 0 | URL
헤헤~ 감사합니다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