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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제목이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임에도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관심이 갔다. 평소 죽음에 대해서 미미하게 사고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문득 난 결국은 죽어야할 존재라는 인간의 최종적인 당위명제가 내 머릿속에 떠오를때면 그것이 나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오기 보다 뭔가 좀더 살아있는 이 현실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겠다는 무언의 어떤 각오들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하게 죽음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죽음이라는 찰라적인 순간이 길고 질긴 일생의 모든 순간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라는 어떤 사고의 실마리가 그것에 대해서 좀더 의미있기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최종적인 삶의 종착점이고 그것이 삶처럼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경험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이생의 삶에 깊고 길게 드러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죽음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때였던 것 같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선배형이 있었는데 죽기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다음날을 시험기간이였는데 그 선배의 어머니가 선배를 깨우기 위해 들어갔다가 5분만 더 자고 일어나겠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5분후에 들어갔더니 죽어 있더라 했다. 내가 학교에서 그 선배의 소식을 들었을때 내 안에 묵직한 해머로 머리를 맞은듯한 깊은 충격이 왔다..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토록 현실의 삶에 큰 충격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리고 몇해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말할 수 없는 내 안에 그 죽음은 긴세월 트라우마를 남겼고 한동안은 도저히 현실이 아닌듯한 느낌이 들정도였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생각보다 가깝다. 모든 인간을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고 주변에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보다 이 현실에 그리고 각자의 인생에 죽음의 당위성은 언제나 깊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철학적 성찰이 나의 짧은 죽음에 대한 단상(短想)들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다.
저자는 셀리 케이컨 예일대학 교수이며 예일대 17년 교양강의의 명강의라고 부제가 달려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죽음의 인문학적 성찰과 현재를 살아가면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이 무엇인지를 알기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죽음의 인문적 성찰이라기 보다는 철학적, 논리적으로 죽음에 대한 여러 의견들에 대한 견해를 논리학의 형식에 따라서 저자의 판단을 서술해논 다소 지루한 책이였다. 저자가 서문에 대해서도 밝혔듯이 죽음의 사회적 인문적 의미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자 기대했던 죽음에 의미를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했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견을 저자가 하나하나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서 참과 거짓을 가려서 자신의 견해 밝히는 다소 주관적인 책이였다.
일단 이 책은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죽음을 당하는 대상은 바로 인간이기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결국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이 죽는 것인지를 논하면서 길고 지루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논할 때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되는 두가지 인간론은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일원론은 인간은 하나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것은 육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것을 인간은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지 존재이고 죽음이란 바로 이 육체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물리주의(physicalism)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나는 저자의 기본 의도는 알겠는데 일원론 즉 인간이 육체로만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물리주의라는 용어로 대체 했을때 다소 논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라 물질주의(materialism)이라는 단어는 유물론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오직 물질만이 한 개체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충실할 것 같은데 물리주의라는 단어는 만물의 작동원리로써의 의미가 강하지 일원론의로써의 의미로는 부적당한 것 같았다. 저자가 특별히 이 용어를 썼다가 보다는 번역자의 문제인것 같다. 어쨌든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견해는 인간은 육체라는 일원론이고 두 번째는 다소 복잡한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견해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영원의 존재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고 있다. 인간은 전통적으로 영혼의 존재이고 이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이며 그래서 불멸한다는 영원불멸의 사상이 전통적으로 오래동안 내려온 인간에 대한 이론이고 이 이론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참,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다. 바로 이 책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 책의 표지에 죽음에 대한 논의를 보편적인 죽음에 대한 전통적 견해나, 종교적인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의 논리로만 의지해서 풀어나간다고 한다. 저자가 인간의 구성요소를 정의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구성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인데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갈린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 하나하나 오직 논리적은 사유로써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견해에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본다. 비록 정신은 육체적인 물질적 구성되는 다르게 구분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정신 또한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육체와 정신은 하나이며,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오직 인간은 육체라는 자신의 결론을 피력한다. 그 다음에 살펴보는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전통적인 견해는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에 대해서 논의해 나간다. 이원론의 견해가 전통적으로 오래되었고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기에 저자는 좀더 세분화해서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이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이원론에도 몇가지 세분화된 견해들이 있다. 이것도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어떠한 연결성을 가지고 연결되어있는지 아니면 육체와 영혼은 별로로 존재하는 각각의 인간 구성물인지에 대해서 논하면서 만약 죽음이 육체의 소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육체와의 연결성이 끊어지므로 결국 소멸할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구성물이라면 육체가 소멸했을때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로서 어디에 머무르며 어떻게 증명되는지도 모르기에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은 결국 허구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저자 셸리 케이건은 인간은 오직 물질이며 단순한 물질이 아닌 좀더 복잡한 기계라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까지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고 그 이후로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과 자살과 삶에 대한 가치론적인 물음에 대해서 답해나간다.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지루한 논리적은 진술이 그대로 이어지지만 죽는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죽음과 상반되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논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저자의 의도처럼 철저하게 철학적인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의 가치에 대해서 논할때도 삼단논범으로 정의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는 죽음을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죽음이란 나쁘다고 할수 없다. 이러한 논리로 죽음의 무가치함을 반박하며 죽음은 인간에서 특별히 두렵나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불멸하여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과 같은 인생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살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나쁘다고 말하고 결국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행복을 영위할 때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오직 철학적 사유에만 의지하여 죽음을 풀어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인간이 풀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도 인간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이어진 것으로 너무나 넓고 깊어서 인간의 이성이 닿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에 있다. 이러한 것을 오직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만을 의지해 이러한 주장은 비논리적이라 틀리고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이라고 맞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보다는 죽음에 대한 참, 거짓의 주장을 살펴 이것이 참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진술 방식은 인생을 논리안에 가두는 어리석은 판별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죽음이 삶을 말하고, 삶이 죽음을 말하기에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술할 때 인간과 역사와 현실과 사유와 계시가 모두 어우러져 통합적으로 논해져야지 단순한 논리적인 진술로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바닷물을 한손으로 쥐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길고 지루하게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저자의 방식은 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의미로 보았을때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분석하여서 그 구성물을 쪼갤수 없으며 오직 신비한 타인으로써 바라볼때 그리고 존중과 존엄을 지켜주며 현실과 역사속에서 인간이라는 실존을 바라볼때 삶과 죽음의 의미가 좀더 깊이 있고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논증은 빈약한 것으로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기에는 실패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논증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이렇다. 인간은 오직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는 육체기계이다. 영생은 증명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오히려 해악이다. 자살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종식시키기에 옳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이생에서 스스로 책임지며 행복을 영위하는 것이 미덕인 존재이다. 이것이 저자가 길게 논의를 끌어간 결론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거창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좀더 의미있게 조망해줄때 죽음은 좀더 의미있는 인간의 종착점으로 그리고 한순간 순간 삶에 드리워져 있어서 유한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종말로써 기능할 때 참으로 죽음은 인간에게 인생에게 유익한 실존적 종말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p.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