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악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5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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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되는 동서 미스터리에서 가장 값진 요소들이 바로 란포, 세이초, 세이이치 같은 일본 작가들의 집중적인 소개일 것이다. 일어 중역이라는 더께를 벗어던진 국어 번역본들은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어도 보다 적나라하고 폐부를 파고드는 듯한 이웃나라 스타일을 거진 여과없이 보여주는 편인데, 그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에도가와 란포의 저작들이다. 그의 작품을 만일 영어나 중국어로 옮겼다가 국어로 번역했다면 절대로 필이 오지 않을 것이니까.

한마디로, 대단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단어의 뜻이 좋다/나쁘다로 심각하게 갈리겠지만.

[음울한 짐승] 감상에서 잠시 언급했던 스타일, 즉 수수께끼의 명탐정, 암호, 밀실 살인과 같은 제대로 된 본격물을 추구하면서도 엽기적인 상태나 심리적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찝찝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 이 장편에서는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엽기라는 표현을 아무 데나 쓰지만, 이런 것이 10년 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그런 점에서 교고쿠도와 같은 류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호러의 범주에 넣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적어도 본인은 읽어가면서 무슨 한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입부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루 사이에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센 남자가 자기의 기막힌 사연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애인이 밀실에서 칼에 찔리고, 조사를 부탁한 명탐정도 백주 대낮에 쥐도새도 모르게 찔려 죽는다. 이 모든 것들이 아리송하다기보다는 한여름에 듣는 기담처럼 그려진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쌍동이의 수기(手記)에 이르면, 대체 이 막나가는 얘기가 어떻게 맺어질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지게 된다. 이 부분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해서 리뷰를 쓰기 위해 떠올린 이미지만으로도 몸에 한기가 듣는다. 트릭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자체는 좀 고풍스럽고 빈약한 듯한, 그리고 마지막에 서로가 연관지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지 못한 지나친 우연성이 있지만,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엽기적 소재랑 이미지를 적절하게 깔아 전개를 흥미롭게 한 기술은 정말 훌륭하다.

또한 보기 드물게도 동성을 사랑하는 탐정이 등장한다. 탐정과 그의 동반자(sidekick)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존재하도록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성 관념이 좀더 엄격하던 시대의 소설임을 감안할 때 이렇게 대놓고 로맨티시즘을 부여한 것은 파격적. 전반부의 두 남녀의 처절한 애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했지만, 후반의 절망적 상황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다시 조명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런 전통(?)이 있으니, 일본 야오이 만화 중에 왜 그렇게 추리물이 많은 건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소위 '기묘한 맛'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단숨에 읽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칠 정도의 끔찍한 얘기였다. 아마도 [음울한 짐승]을 읽었거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권말의 자세하고도 애정 담긴 해설을 비교해 가면서 더욱 재미있는 인상을 머리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한가지 옥의 티가 있다면 해설에서는 같은 단편 제목을 [음수(陰獸)]로 표기한 것. 같은 출판산데 이정도의 일관성은 지켜줘야 더 많이 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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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1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읽어봐야겠어요. 음울한 짐승도 가지고 있으니.. 흐흐..

물만두 2004-07-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거 다음에 읽어야겠군요...

비츠로 2004-07-1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란포의 상상력은 대단하군요.
강추...

레이지 2004-07-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안 읽어볼 수 없겠습니다!!^^*
 
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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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의 컴퓨터 OS를 다시 깔기 위해 밤을 지새야 했던 우울한 한 여름 밤, 단순 작업의 무료함을 달래려 집어든 책 2권은 그런 밤을 심심치 않게 보내게 해주었다. 2천년을 숨겨왔다는 한 기독교 야사를 중심으로, 이름만으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온갖 종교 단체와 비밀 결사 우두머리들의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바닥 없는 냄비 안에 던져진 주인공/여주인공의 모험에 괴짜 귀족, 알비노 수도사 등의캐릭터들이 양념처럼 가세하니 속된 말로 '뜨지' 않고는 견딜수 없을 것 같은 얘기긴 하다. 근데 딱 그것뿐. 이런 게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너무 의식하고 쓰는 미국적 베스트셀러 소설의 한계라고 할까?

많은 서평에서 보듯 기존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배교적인 아이디어, 더없이 희한하고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여성 캐릭터, 다빈치의 발명품을 활용한 비주얼한 트릭 같은 것은 더없이 흥미로운 소재긴 하지만, 미디어 광고에서처럼 에코와의 비교는 거의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방대한 지식이 진지하고 흐뭇한 종교적 역설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인터넷 지식 검색' 같은 피상적인 나열에 그친다는 점이나, 주인공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기호와 상징들이 점장이 썰 수준의 얄팍함을 못 벗어난다는 점,  유서 깊은 단체들을 동원해 놓고도 흥미로운 역사적 고찰이 아닌 사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설정으로만 써먹는다는 문제 탓이다. 이 작품도 처녀작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재미있을 것 같은 소재의 범람 내지는 쾌속한 진행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밀려 개연성과 완성도는 저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인류의 지고한 미를 상징하는 온갖 소재에 대한 비주얼한 묘사가 빈약하다는 것은 영화화를 너무 의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더욱 강화시킨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면 유럽 여행을 가든가, 언젠가는 만들어질 영화를 보란 뜻인가? 책에는 책 고유의 템포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마치 영화의 편집처럼 회상 장면으로 자주 돌아가는 것도 거슬리고... 외국인 캐릭터에 대한 묘사에 이르면 끔찍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영국 귀족, 하면 레몬 넣은 홍차에 목매고 상스런 말을 서슴없이 뱉는 속물 정도를 연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습기 그지없었다.

미디어의 소개를 읽고 기대했던 것과 달리 주인공 랭던의 캐릭터가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도 별점을 깎는 데 한몫. 그에게 붙은 온갖 팬시한 직위와 유명세의 뚜껑을 열어보면 무슨 검색 엔진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히치콕 류의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 무고한 시민의 이미지를 가지면서 동시에 당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언밸런스함이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흥미를 끌고 얘기에 탄력을 불어넣어준 이는 불행한 가족사라는 후광에 감싸인 소피와 박물관장, 그리고 중반에 조력자로 가세하는 괴짜 영국인 티빙 경이라는 사실을 말해 두자. 불쌍한 사일러스도 빼놓지 말고...

그래도 다른 베스트셀러 스릴러랑 차별되는 미덕이 있기는 하다. 로빈 쿡이나 그리샴처럼 소설의 절반쯤에서 뜬금없이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급진전되는 서비스 씬 같은 게 없고 아주 얌전하게 진행된다는 점. :-)

남들이 에코의 두 걸작에 빗대어 격찬한 것과는 별개로,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롯의 헛점을 교묘한 상징 놀이로 엮어가는 음모론의 소용돌이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문득 이 모든 것이 애들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신비주의의 형성과 그 실체를 통렬하게 풍자한 진짜 기호학 교수의 관점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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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28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리 쓰고 싶었으나 실력이 안되어... 님의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decca 2004-06-2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평 너무 재미있습니다. 추천합니다.

fancycat 2004-06-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불성설 좋아하시네..

Fithele 2004-06-2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ncycat 님, 처음 뵙겠습니다. 부족한 제 리뷰에 코멘트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제 의견에 공감하지 않으신다면 구체적으로 왜 그렇지 않은지 밝혀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님이 쓰신 리뷰는 읽었지만 여전히 깊은 뜻을 파악 못 하고 있는 둔한 저를 깨우쳐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고요.

2004-06-29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6-29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draco 2004-06-2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책이든 읽고난후 좋았다는 사람과 별로라는 사람으로 나뉘게 마련이지요.
전 재미있게 읽었다에 한표^^

마태우스 2004-07-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마음을 잘 표현한 리뷰입니다. 저도 이렇게 쓰고 싶었는데 능력이 안되서...이주의 마이리뷰의 강력한 후보인 듯 싶네요. 추천 하나는 저예요.

로렌초의시종 2004-07-0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합니다......

갈대 2004-07-0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빈치 코드를 읽고 '푸코의 진자'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미디어에서는 뜬금없이 '장미의 이름'을 들먹이는 걸까요? 당연히 '푸코의 진자'가 먼저
떠올라야 할텐데 말이죠. 균형잡힌 리뷰 잘 읽고 갑니다.

sooninara 2004-07-0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이 더 유명하고..살인이라는 소재때문이겠지요..선전에서 에코와 비교하는것은 정말 코메디같아요
'푸코의 진자' 읽을때 조금 힘들게 읽었는데..'다빈치 코드' 읽고 나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marina🦊 2004-07-0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빈치 코드 읽은 사람으로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리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sayonara 2004-10-2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제 맘을 쏙 찍어놓은 리뷰를 읽다보면 정작 저는 주눅이 들어서 '다 빈치 코드'의 리뷰를 못쓰겠네요.

리스크 2004-11-2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전 동감이네요~ 워낙 과대평가 된 기사를 많이 봐서 기내를 너무 했던지라 실망도 컸었답니다~ 추천해 드릴께요~^^
 
베테랑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옥용 옮김 / 동방미디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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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스파이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는 포사이드의 [Veteran and other stories]라는 중단편집을 이 책과 [인디언 서머] 라는 두 책으로 분책해 출간했다. [자칼의 날], [오데싸 파일]등의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보통의 추리소설집에 가까와서 약간은 의외였다.

얘기는 말할 수 없이 재미있다. '베테랑'은 제대로 된 본격 형사물이자 막판 반전이 기가 막히고, '도둑의 기술'은 제프리 아처의 [한푼도 용서없다]를 연상케 하는 복수극. '기적'이 좀 맥빠지는 스토리긴 하지만, 결말을 제외하면 2차대전에 대한 묘사나 이야기 풀어나가는 솜씨가 아주 괜찮기 때문에, 단숨에 읽을 수있는 소설집. 워낙에 짧은 얘기들이라 부담도 없다.

문제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좋은 그릇에 담아야 구미를 당기는 법인데, 이 책과 작가 포사이드가 받은 푸대접은 좀 심각하다. 미/영국에서 출간된 원서에 실려있는 제목은 다음과 같다.

[Veteran and Other Stories, 2001]

  • The Veteran
  • The Art of the Matter
  • Miracle  (여기까지가 [베테랑])
  • The Citizen
  • Whispering Wind (여기까지가 [인디언 서머]) 

나는 [인디언 서머]는 아직 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얘길 하는 게 조심스럽긴 한데, Whispering Wind는 단편이 아니라 중장편(Novella) 수준이라는 다른 곳의 외서 소개를 보고 분책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치 동화책 편집을 한 듯한 큼직한 폰트랑 널찍한 자간과 마진을 조금 줄이고 한꺼번에 하드바운드로 내 주었다면 아주 가격대 성능비가 괜찮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국내와 외국의 출판 문화가 다른 것은 인정하지만 미/영 양쪽에서 똑같은 구성을 갖고 태어난 책을 꼭 이렇게 난도질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볼 때, 구매를 할 독자층을 약간 잘못 잡은 것이 아닌가도 싶고.

더우기 책을 두 번 죽이는 것이, '베테랑'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3개로 번역하거나, 200만 파운드를 200파운드로 두번씩이나 잘못 써서 내용 이해를 힘들게 만들고, 의미상 '의사'로 번역되어야 할 Doctor라는 단어를 생각없이 '박사'로 여러번 놓아둔 것이나, 심지어 타이핑 미스로 생긴 영문자 (50페이지, 말이dh) 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고 교정도 한번 안 보고 책을 내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자칼의 날] 영화판(1973년)을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자칼(1997년)]과 헷갈린 면도 그렇고... 이래서야 일일이 역주를 달아가며 한국 독자의 이해를 도운 번역자의 노력이 안쓰럽지 않은가.

미스터리 팬으로서, 이 책의 상태가 번역 미스터리 문학이 이 땅에서 받는 대접의 현주소가 아니기만을 빌 뿐이다. 내용이 워낙 재미있었기 때문에 별 넷을 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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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2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는 인디안 서머까지 읽었네요. 으...

sayonara 2004-06-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과 브루스 윌리스의 영화 '자칼'을 헷갈려하는 독자들이 많더라구요. 각종 영화평을 읽어봐도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원작을 영화화했다고 쓴 사람도 있구요. 평론가들의 무책임이라고 해야하나...

Fithele 2004-06-27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73년 영화 각본가가 [자칼]의 제작에 참여했죠. 허나 얼굴 없는 킬러라는 설정 외에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었습니다.

영화 안 보고 영화평 쓰긴 아무래도 쫌 힘들 테니, 포사이드의 원작을 읽지 않았거나 확인해 볼 성실함이 부족했거나 둘중 하나겠지요. ^^;;

sayonara 2004-06-28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성실에 한표~

프랭보우 2004-07-0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윌리스의 영화 '자칼'은 거의 모든 면에서 포사이드 원작 '자칼의 날'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오는 방법, 은신처 마련 방법, 총기구입방법 등등...
 
채찍을 쥔 오른손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1
딕 프랜시스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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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프랜시스의 작품은 경마가 성행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정말로 낯선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단 높은 점수를 받고 들어갈 만 하다. 마치 흑백처럼 대조되는, 백년 전에서 튀어나온 듯한 점잔 빼는 신사들의 암투와 그 뒤켠의 법보다 인맥과 주먹이 가까운 일꾼들의 세계. 기본적으로 그의 경마 이야기는 첩보물 혹은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거칠고 사나운 말, 말을 닮은 사람들, 그리고 원초적 본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뜨거운 경주에 끼어드는 흑막. 게다가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무쇠 같은 자들이니 딱 삼박자가 맞아떨어지긴 한다.

근데 물 건너 대쉴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 느낄 수 없던 열광이 딕 프랜시스에게는 있다. 그의 작품을 접하는 것이 [흥분]에 이어 이번이 2번째인데, 독자가 불타오르게 되는 원인은 대충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탐정 자신의 내면 투쟁의 부각. 권말 해설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드 하레이는 약간은 이례적인 탐정이다. 촉망받는 기수였다가 사고로 왼손 대신 의수를 달고 PI로 직업 전환을 하게 되었으며, 불구의 몸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 (이 점은 맥스 캐러도스처럼 장애인이면서도 초인(超人)에 가까운 탐정과 확실히 대별된다) 전통적인 영웅에겐 절대 용서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런 약한 면으로 인해 일을 완전히 망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뻔 하거나, 한 순간의 판단 착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는 모습이 정말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독자는 "이 약한 탐정이 과연 무너질 것인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라는 비정한 호기심으로 끝까지 그의 행동을 지켜본다고도 할 수 있는데, 쓰레기가 될 위기를 극복하고 무쇠 같은 자로 거듭남을 보면서 일종의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트릭을 영국 전통의 리얼리즘으로 잘 포장한다. [흥분]도, 이 소설도 모두 말의 심리적/의학적 특질을 이용한 트릭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일견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던 승부조작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듣고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건 문외한인 독자가 레이스 조작의 트릭을 추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다른 플롯에서 추리할 요소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낯선 규칙에 의한 모험의 요소. 이 책에서  주인공이 예기치 않게 기구 레이스에 참가하는 대목은 정말로 훌륭했다. 낯선 소재, 낯선 풍경과 어우러진 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의 대화가 감칠맛 나는 흥미를 주었다. 경마는 그나마 경험할 기회가 있다손 쳐도,  기구 레이스 얘기는 보도 듣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세계를 글로 간접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와 열광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사고로 부상한 왼손을 아주 잃게 된 경위를 "사고 이후 다른 폭행에 의해" 라고 적어 놓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이 책에선 밝혀 놓지 않았다. 혹시 전작 [Odds Against] (1965)에서는 밝혀져 있지 않을까? 생소한 경마 미스터리를 원문으로 읽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출판이 더 많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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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하 동문입니다. 저도 시드 해리 무척 좋아하거든요... 시드 해리가 나오는 것만이라도 출판해 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panda78 2004-07-05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딕 프랜시스의 팬으로서 그의 모든 작품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오는 대로 다 살 텐데!

瑚璉 2004-08-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longshot'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최근 딕 프랜시스가 지은 책들의 출간이 늘고 있는데 환영하며 좀 더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노래하는 백골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7
오스틴 프리맨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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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다이크 시리즈를 모은 단편집이 강조하는 것은 1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미의 모 유명 TV드라마에서 써먹고 있는 패러다임, 증거제일주의다. 과학적으로 규명되는 증거만이 소중하다는 테마는 어떨 때는  동기에 의한 의존 수사를 비판하거나, 기존 수사법(개의 후각을 이용하는)의 허점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변주되면서 탁월한 분석 능력을 지닌 법의학자 손다이크 박사의 활약을 그려낸다.

다만 수록된 단편 중 절반 정도는 상당히 독특하게도, 하나의 이야기를 2개의 파트로 나누어 전편은 범죄자의 입장에서, 후편은 주인공 손다이크를 따라다니며 행적을 기록하는 의사 저비스의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다. 보통 추리소설사에서는 이 때문에 도서추리 소설이란 장르의 효시로 이야기하지만, 살인자의 심리와 계획, 양심에 초점을 맞추며 문학적 서스펜스를 이끌어내는 현대의 도서추리 소설들에 비하면 이와 같이 두동강난 구성은 어쩐지 긴장감이 떨어진다.

허나, 멋대로의 추측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현대의 독자들이 미스터리 문학에서 기대하는 수수께끼의 어려움이나 놀라운 반전에 초점을 맞춘다기보다 문학에서 살인자의 심리를 그려내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추리의 과정과 증거의 수집 등에 덧붙는 디테일한 묘사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범인이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바짝바짝 타는 듯한 심리 상태, 죽여야 하는 당위성(?),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한 노력 같은 것들이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 쪽에 대부분의 문학적 무게와 서스펜스가 느껴진다. 비록 주인공이 활동하는 파트는 뒤쪽이긴 하지만, 손다이크의 여러가지 활동은 프리먼이 실제적인 경찰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덧붙인 보고서 같은 느낌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어느 퇴락한 신사의 로맨스] . 손다이크의 인간적인 측면이 단 한번, 그것도 아주 강렬하고 로맨틱하게 나타난 탓에 주저없이 이 단편을 베스트로 꼽는다.

한가지 불만이 있다면, 손다이크 팀의 분석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것. 보통 감식반이 며칠을 걸릴 일을 겨우 한두시간 내에 해치우고, 산산히 깨어진 유리 안경 같은 것을 간단히 찾아 너무나 쉽게 조립한다든지 하는 것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렸다. 마치 50분 내에 모든 분석을 끝내는 모 드라마의 감식반 같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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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5-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비 사건 원제를 아시나요? 제가 쓰긴 했는데 그건지 아닌지 파악이 잘 안되서요...

Fithele 2004-05-2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members.aol.com/MG4273/freeman.htm 에 의하면 Rex v. Burnaby 같네요.

물만두 2004-05-2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네요... 우리 나라에 출판된 어떤 전집에서는 그 제목이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