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3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월장석]의 반도 안 되는 두께에다 진슌신의 단편까지 합본되어 있는 판에 무슨 놈의 대작은 대작이냐, 고 반박을 들을지 모르나 책의 1/3 정도에 위치한 저택 조감도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지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리라. 등장인물이 20명도 넘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하긴 하겠다만서도.

어쨌든 정말로 성실하게 썼다. 20명도 넘는 인물이 등장하고, 개중 반이 죽어나가면서도 그렇다고 인물 소개에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아닌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이름이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일본 이름 외우기가 그다지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워낙에 서장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관계가 황당한 애증관계로 얼키고 설켜 있기 때문에, 3류 스포츠 신문의 폭로기사를 보듯이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트릭이 엉성하거나 독자가 추리할 증거가 빈약한 것도 아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작가는 이곳저곳에 범인을 맞출 만한 단서를 다 던져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본격물인 것이다.

문제는 너무 많이 죽는다는 점이 읽는 독자의 정서를 산만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느닷없는 죽음에 놀라기도 하고 나름대로 추리하려고 애써보지만, 무슨 연쇄폭발하듯 줄줄이 희생자가 나면서 스플래시 호러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덤덤한 면역에 걸려버린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첫 희생자가 나고 독자가 증거를 씹어 삼킬 겨를도 없이 다음 희생자, 그 다음 희생자가 발견되는 센세이셔널리즘이 반복되면서 추리의 흥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탐정과 트릭의 해설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듯.

또한 전반에 흐르는 질펀한 묘사나 중간에 들어가는 신문 연재소설 분위기의 삽화는 인물을 외우는 데는 아주 크게 기여했지만, 인간 본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의심하게 됨과 동시에 소설의 격을 무의식중에 낮게 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물론 재미야 있었지만, 통속 소설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해야 할까... 우리 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면도 꽤 있기도 하고.

이런저런 장벽이 높지만 본격물을 좋아하는 어른 독자라면 읽어봐서 그다지 후회를 할 것은 없어 보인다. 두번 읽을 작품인가는 약간 고민하게 되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혹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0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김순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로시 세이어즈의 저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지만, 이 단편집을 마친 추리소설 독자라면 그녀가 도일의 열렬한 팬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품으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전체가 소위 '기묘한 맛'을 지나치리만치 추구하고 있고, 수기에 의존하는 경향도 확실히 코난 도일 풍이다. 허나 그 사실이 좋은 추리소설을 사장시키지는 못할 것 같다. 지나치게 기묘하고, 대책없이 낭만적이긴 해도 내던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나 할까.

대표단편 '의혹'은 다른 곳에서 많이 읽은 경험 때문에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긴 했지만 여전히 서늘한 걸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실린 피터 윔지 경이 활약하는 단편들은 여러 단편집에서 이곳저곳 짜집기하듯 뽑은 것이라는데, 마치 순차적으로 쓴 것처럼 점점 몰입도가 올라가면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도 작가가 탐정에 대한 묘사를 무척 정성들여 쓰기 때문이 아닐까.

제일 흥미롭게 읽은 편을 꼽으라면 '유령에 홀린 경찰관'을 꼽고 싶다. 트릭, 탐정의 인간적 매력, 그리고 코난 도일 풍의 기묘한 맛까지 3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재미. (개인적 경험이 약간 개입해 있다) '구리 손가락 사나이의 비참한 이야기'는 인간관계의 작위적인 면이 옥의 티이나 간담이 서늘하기는 권두의 '의혹'과 맞먹었다.

동 작가의 [나인 테일러스]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아마도 권말을 장식하는 중편 '불화의 씨, 작은 마을의 멜로드라마'의 시골마을 분위기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전체에 흐르던 묘하고 약간은 허황되기까지 한 낭만적 공기가 이 중편에 와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모든 소사(小事)가 하나로 합쳐져 해결되는 결말은 사실만 보자면 끔찍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무슨 시트콤 보는 것마냥 우습기까지 하다. 윔지 경의 위트에 알게모르게 전염된 건지도.

이제 Gaudy Night을 기다려야겠다. 상당히 엄한 제목으로 출판되는 것 같던데...

덧붙임 : 속표지 소제목이 기가 막히게 틀려 있다. 윔지 경 시리즈를 묶은 쪽의 "The Case Book of LPW" 같은 것은 애교로 봐주더라도, '의혹'의 제목이 Five Red Herrings라니 번지수가 틀려도 유분수... 저 이름은 LPW 시리즈의 한 장편 소설 제목이다.  '의혹'의 원제는 말 그대로 'Suspicion' 이며 [In the Teeth of Evidence] 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데온과 방화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4
J.J.매릭 지음, 박명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드온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EBS에서 어느 일요일 오후에 '기드온 경감'이란 영화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기드온(Gideon) 경감이 장래의 사위가 인사하러 와도 만날 틈이 없을 정도의 눈코뜰새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게 내용이라 참 특이한 경찰 영화군, 하고 생각했는데 같은 시리즈의 발간 소식을 듣고 기다려 사본 결과, 원작의 분위기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영화와 지금 리뷰의 대상이 된 소설은 전혀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으며 전개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같은 듯 하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뛰고 있다'

이 소설은 이를 테면 '경찰청 사람들'+'인간극장'의 내용을 갖고 있다. 해설을 읽어보면 기드온은 체포권이 있는 형사 중 가장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 그의 눈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책은 곧 6백만 런던 시민의 안녕을 책임지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일상을 의미한다. 흉악범에 대한 증오, 현장의 드라마, 주인공 자신의 사생활과 종으로 이어진 부하들과의 인간관계가 부수적인 줄거리로 짜여 있는데,

책을 처음 든 순간부터 전혀 지루하지 않게 끝까지 갈 정도로 상당히 간결하게 잘 씌어졌다. 적어도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50분짜리 단편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속도감을 몇백 페이지의 책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다. 범인의 심리를 자술하여 범인을 미리 밝혀 놓고 진행하거나, 트릭이 너무 단순한 것이 본격물에 익숙한 눈으로는 거슬리긴 한데, 수법이 단순해! 하고 책을 던져버리기엔 주요 사건이 좀 심각하게 센세이셔널한 편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다루는 사건들이 단순하기 때문에 크로프츠 류와의 차이점이 생기는데, 프렌치 경감 시리즈가 복잡한 트릭을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면 [방화마]는 경찰 제복 속의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공무를 수행하다 상해를 입는 경관들의 얘기가 자주 짤막하면서도 비장하게 언급되는 것이 그 증거.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가 범인 찾기 놀이라기보다는 60년대 런던의 사회상과 경관들의 휴머니즘, 사람 사는 이야기인 듯 한데 자칫 유치할 수도 있는 얘기를 무뚝뚝한 기드온의 시점을 선택해서 진지하게 끌어가는 것이 사뭇 괜찮게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똑같이 형사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87분서 시리즈하고는 그 분위기나 정서가 완전히 달랐다. 콜린즈에서 크로프츠, 덱스터, PD 제임스로 이어지는 영국 쪽 경찰 리얼리즘 소설 특유의 우직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경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봄직하다.

호크의 <마법사의 죽음>이 권말에 합본되어 있다. 사이먼 아크라는 신비학자? 사이비 교주?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단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울한 짐승 동서 미스터리 북스 85
에도가와 란포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치 몸이 아플 때, 약에 취하고 병에 짓눌려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듯한 꿈세계에 나타난 몽마를 그려내는 듯한 야릇하면서도 기분나쁜 아이디어가 특징이겠다. 수록된 중단편의 태반이 본격물이면서도, 이상심리라든가, 에로틱한 설정이나 기괴한 인물들에 의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찝찝한 느낌을 주는 괴담이 되어 있다.(사도-마조히즘이 대놓고 소재가 되고 있는 것도 상당히 독특하다.) 작가의 숭배 대상인 E.A.Poe의 멋진 작풍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나, 나름대로 읽는 동안 눈살을 찌푸릴 소재를 기괴하게 짜맞춘 솜씨는 높이 살 만하다.

다만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런 기발하고도 흔히 볼 수 없는 상상력을 실컷 보여주는 것은 좋은데, 그 기발함에 비해 항상 2프로 부족한 듯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트릭이 허술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가 자기 아이디어에 자신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동양 특유의 겸양인 것인지, 아니면 작자 스스로 벌려 놓은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지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다.

마지막 단편 <배추벌레>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 호러라고 분류해야겠지만, 그 처절한 분위기 묘사가 같이 수록된 여타 작품들보다 한 단계쯤 업그레이드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있었던 전쟁으로 인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좀더 생생한 서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note 1) 아마도 이 작가의 단골 탐정인 아케치 고고로의 이름을 <명탐정 코난>에서 차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들 알다시피 코난의 성은 '에도가와'라는 사실도 있고...

note 2) 광학 전공은 아니지만, <거울지옥>에서 나온 장비를 시뮬레이션 해보면 과연 어떤 이미지가 나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악마나 품어봄직한 의문이라고 하지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렌치 경감 최대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21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김민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추리소설에서 사용하는 회상씬, 작위적으로 연출한 뒤통수 치는 단서 등등의 드라마틱한 장면이 전혀 쓰이지 않는, 언뜻 보면 건조해 보이는 순차적이고 단순한 스토리텔링에서 독자 자신이 사건을 해결해 가는 듯한 묘한 박진감을 주는 것이 크로프츠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그 독특한 매력이 <통>에 이어 마음껏 발산되는 수작이다.

살인 사건이 터지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 정말 열심히 단서를 수집한 끝에 사건을 해결한다는, 디테일은 꽤 복잡하지만 요약하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내용. 덤으로 끝의 한 챕터를 할애해 사건의 경과와 트릭을 친절하게 해설까지 해주는데 이런 것이 소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갈 정도로 덤덤하게 사건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기에 독자가 탐정보다 앞서 추리하는 재미 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고, 수사자-피수사자 사이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동기를 설명하는 심리적인 묘사도 없거나 미미하다. 이와 같은 기록문적 성격에 문학적 향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바로 프렌치 경감이라는 캐릭터이다.

해설에서도 언급되지만, 프렌치 경감이라는 탐정은 JJ 매릭의 기드온이나 덱스터의 모스 경감과 같은 캐릭터의 선구격인 인물이다. 단란한 부부에, 존경받는 상사이자 유능한 경감이지만, 화려한 경력이나 군계일학의 지능으로 치장한 소위 '명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은 사건 해결이 늦어진다고 윗사람에게 한소리 듣기도 하고 수사가 막혀 끙끙대면 부하들이 슬금슬금 피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설정인데, 이런 인물의 시선을 따라감으로써 작가는 실제 수사를 하는 듯한 일종의 리얼리즘을 강조함과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그의 감정선과 공감하여 뒤의 전개를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도 얻고 있다. 많진 않지만 간간히 보이는 풍경 묘사 같은 것도 철저하게 경감의 시선이 닿는 곳만을 적어 놓을 정도로 꼼꼼한 서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추리팬으로서 특기할 것이 있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에 대해 작가가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 <통>을 읽을 때 홈즈의 광팬 경관이 등장하는 것을 무심코 넘겼었는데, 여기서는 주인공의 아내가 남편에게 대놓고 Mr. Watson이라고 부르는 장면까지 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도 재미있지만 직접 읽으면서 느껴야 하는 부분이기에 적지 않는다.

<통>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마치 보고서마냥 살인 사건을 감정 없이 적어내려간 몇 페이지만 참고 읽어가면, UK와 남유럽을 넘나드는 추적담에 시간가는 줄 모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