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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ㅣ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평점 :
이런 소설이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아직 안 나온 1000권 출간 예정 동서미스터리 북스에서 이름만 들었고, 그 다음에 알렉 기니스(Alec Guinness)가 주연한 1979년도 7부작 TV 미니시리즈가 무척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느날 인터넷 북까페에 들렀다가 덜컥 충동구매하고 큐에 있던 다른 책들을 뛰어넘은 채로 읽기 시작했지만 별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본인이 아주 좋아해 마지 않는 소위 '고리타분한 편집'이 맘에 들었다. 분책과 폰트 키우기로 읽을 게 별로 없게 만든 후 장정만 하드로 예쁘장하게 해서 돈아깝게 만드는 요즘 유행과 달리, 여전히 하드커버지만 5백여 페이지를 그야말로 꽉꽉 채우고 있어서 눈이 매우 즐거웠다. 번역도 스파이 용어를 뜻으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도 했지만 그다지 나무랄 데 없었고 해설은 너무나 훌륭했다.
영국 스파이물 하면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가 연상되지만 르카레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고전적인 전지적 시점에 느린 구성, 게다가 냉전이 거의 끝나 더 이상 화려한 첩보전은 생각키 어려운 60년대를 선택했다. 그래서 하드보일드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원조 하드보일드랑 다른 점은 스타일은 없고 고뇌만 가득하다고 할까? 주인공이라는 스마일리는 은퇴한 중년 아저씨로 그려지는 데다가 늘 자기 아내 때문에 고민하는, 007의 화려함 같은 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반인에 가깝다. 가끔 왜 그렇게 사냐고 물어보고 싶기도 할 정도로.
때문에 책의 절반을 지나기 전에는 주인공의 능력을 전혀 모르고 지나가는 누(?)를 범하게 되는데, 마지막 절반은 그야말로 page-turner였다. 작가가 지어냈으나 나중에는 실제 첩보원들이 써먹게 되었다는 은어에 익숙해지자 내용이 마치 긴박감 넘치는 판타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른 소설에서 맛보기 힘들었던 독특한 경험이었다. 퍼즐의 요소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 유감이라면 유감.
스마일리는 이 작품 말고도 두 작품에 더 등장하며, 여기서 소비에트의 카를라랑 맺은 질긴 악연을 마지막 3부작에서 청산한다고 해설에서는 말하고 있다. 나머지 두 작품도 출간되어 뛰어난 작가 르카레의 면모를 완전하게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