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악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5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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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되는 동서 미스터리에서 가장 값진 요소들이 바로 란포, 세이초, 세이이치 같은 일본 작가들의 집중적인 소개일 것이다. 일어 중역이라는 더께를 벗어던진 국어 번역본들은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어도 보다 적나라하고 폐부를 파고드는 듯한 이웃나라 스타일을 거진 여과없이 보여주는 편인데, 그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에도가와 란포의 저작들이다. 그의 작품을 만일 영어나 중국어로 옮겼다가 국어로 번역했다면 절대로 필이 오지 않을 것이니까.

한마디로, 대단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단어의 뜻이 좋다/나쁘다로 심각하게 갈리겠지만.

[음울한 짐승] 감상에서 잠시 언급했던 스타일, 즉 수수께끼의 명탐정, 암호, 밀실 살인과 같은 제대로 된 본격물을 추구하면서도 엽기적인 상태나 심리적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찝찝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 이 장편에서는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엽기라는 표현을 아무 데나 쓰지만, 이런 것이 10년 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그런 점에서 교고쿠도와 같은 류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호러의 범주에 넣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적어도 본인은 읽어가면서 무슨 한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입부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루 사이에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센 남자가 자기의 기막힌 사연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애인이 밀실에서 칼에 찔리고, 조사를 부탁한 명탐정도 백주 대낮에 쥐도새도 모르게 찔려 죽는다. 이 모든 것들이 아리송하다기보다는 한여름에 듣는 기담처럼 그려진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쌍동이의 수기(手記)에 이르면, 대체 이 막나가는 얘기가 어떻게 맺어질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지게 된다. 이 부분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해서 리뷰를 쓰기 위해 떠올린 이미지만으로도 몸에 한기가 듣는다. 트릭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자체는 좀 고풍스럽고 빈약한 듯한, 그리고 마지막에 서로가 연관지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지 못한 지나친 우연성이 있지만,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엽기적 소재랑 이미지를 적절하게 깔아 전개를 흥미롭게 한 기술은 정말 훌륭하다.

또한 보기 드물게도 동성을 사랑하는 탐정이 등장한다. 탐정과 그의 동반자(sidekick)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존재하도록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성 관념이 좀더 엄격하던 시대의 소설임을 감안할 때 이렇게 대놓고 로맨티시즘을 부여한 것은 파격적. 전반부의 두 남녀의 처절한 애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했지만, 후반의 절망적 상황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다시 조명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런 전통(?)이 있으니, 일본 야오이 만화 중에 왜 그렇게 추리물이 많은 건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소위 '기묘한 맛'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단숨에 읽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칠 정도의 끔찍한 얘기였다. 아마도 [음울한 짐승]을 읽었거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권말의 자세하고도 애정 담긴 해설을 비교해 가면서 더욱 재미있는 인상을 머리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한가지 옥의 티가 있다면 해설에서는 같은 단편 제목을 [음수(陰獸)]로 표기한 것. 같은 출판산데 이정도의 일관성은 지켜줘야 더 많이 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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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1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읽어봐야겠어요. 음울한 짐승도 가지고 있으니.. 흐흐..

물만두 2004-07-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거 다음에 읽어야겠군요...

비츠로 2004-07-1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란포의 상상력은 대단하군요.
강추...

레이지 2004-07-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안 읽어볼 수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