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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앤 나이트 ㅣ 블랙 캣(Black Cat) 3
S. J. 로잔 지음, 김명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길고 두꺼운 이야기 두루마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가족, 학교, 마을, 그 외 자기가 속한 사회의 안녕과 절대적인 정의(justice)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 탐정 앞에 갑작스레 나타났다 사라진 15세 조카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여 찾아간 미국 동부의 한적한 마을, 워런스타운. 이곳처럼 특정 운동 내지 기능에 목숨걸듯 집착하고 그에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에 따라 애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상황은 일견 과장된 듯하고 정서에 맞지 않아 보인다. 허나 풋볼(=미식축구)을 대학입시로 대체하면, 그렇게 이해 못할 얘기도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특정 기능, 지적 능력이든 육체적 능력이든, 그런 기능으로 한 아이의 쓸모 전체를 평가하는 불문률 내지 사회구조를 만들고, 그 지상과제를 지키기 위해 마을 전체가 썩어가는 내용이 23년전의 강간 사건, 그리고 오늘 한 소녀의 의문의 죽음과 함께 파헤쳐진다.
읽으면서 미국의 사회구조가 훨씬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구조가 안정되어 있다는 얘기는 거꾸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의 차이를 넘기가 몇 배는 더 어렵다는 뜻. 워런스타운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풋볼을 하기 좋은 육체적 조건은 세습되고, 돈과 체격을 가진 자들이 주류를 차지하여 권력을 휘두른다. 여성을 포함한 비주류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류에게 꼬리를 치거나 평생 무시당하며 살거나' 뿐인 말만 들어도 끔찍한 사회.
이러한 땀투성이 풋볼 마을 얘기는 끝까지 제3자의 입장에서 쿨하게 전개되는 데 비해 탐정 자신의 얘기는 더없이 가슴저린 감성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했다는 원죄와, 그로 인해 엇나가 버린 그의 여동생 가족과의 관계를 기술하는 스토리 라인은 워런스타운의 그것과 명백히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끔찍한 불균형을 감내하더라도 느슨한 테두리라도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 응당 있어야 할 정의를 위해 그 테두리를 깨는 것이 좋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탐정 빌의 운명은 일견 당연해 보이는 질문의 답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처음 3분의 1정도 읽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고인물은 썩는다' 였는데, 다 읽고 나서는 스티븐 킹의 [캐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스토리상 그런 것이니 더 이상 자세히 쓸 수는 없다. 결국 비주류는 주류에 처절한 복수를 시도하는데, 20여년 전의 사건을 덮어두려는 세력과 진실을 밝히고 싶은 이들, 그리고 철없는 아이들이 한데 모인 절정의 순간은 짤막하고 거대한 혼란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다. 이런 게 현대 사립 탐정의 한계. 경찰과 협력하여 범인을 유쾌하게 잡는 빅토리아 시대의 로망은 현대 수사물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아마추어의 미숙함으로 인한 실수와 자책, 뒷수습이 있을 뿐이다.
리뷰 문두에 제기한 질문에 대해 탐정 빌 스미스의 입을 빌어 '정의란 없다'는 씁쓰레한 진단을 내리게 하는 것도 그런 이유. 허나 사필귀정, 극은 비록 통쾌한 권선징악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며 끝맺게 된다. 그렇게 '그저 겨우 납득할 만한' 해결을 얻기 위해 주인공과 그의 가족에게 돌아간 댓가는 너무 참담했지만... 제목처럼 겨울 밤 한 줄기 칼바람에,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이 시린 몸을 추스르는 듯한 탐정의 고독이 책을 덮는 순간 이후에도 계속 가슴을 저리게 했다.
번역은 시쳇말이나 속어를 적절히 사용하여 쉽게 술술 읽히는 수준. 묘사는 평이한 편이고 캐릭터 유형도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우나 그 일상적인 모습에 정감이 가고, 철저하게 탐정의 시점에서 기술된 꼼꼼한 이벤트 서술이 돋보였다. 리디아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완벽해서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논리상 몇가지 사소한 허점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에드가 상 수상이 과연 허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설은 재미있고 복잡했으며 또한 아름다왔다. 원조 하드보일드의 색채를 풍기고 있으면서도 구질구질하다는 거부감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최초의 하드보일드였으므로 거리낌 없이 만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