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결투라니!
와- 이 책 진짜 재밌다. 이제 톨스토이와 체호프만 남겨두고 있는데,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나는 사실 '소설'을 읽고 감상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의 교육이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오히려 그런 게 없이 내가 읽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거, 그게 진짜라고 생각했다. 느낌은 배움으로 알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 책에서 작가에 얽힌 사연들도 다 얘기를 해주니 내가 읽은 책들이지만 참 새롭게 보이는거다. 고골의 책도, 도스트예프스키의 책도, 투르게네프의 책도 다 읽었지만 이 모두를 새롭게 다시 읽고 싶은거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기 전과 읽고난 후의 투르게네프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은, 그런 느낌? 다른 책들도 이렇게 배경 지식을 알고 듣는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간 로쟈님의 글은 어렵고 지루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죄송합니다!!), 재미있다!!!!!!!!!!!!!!!!!!!!!
아, 그리고 고골. 고골을 대체 어쩌면 좋은가. 나는 고골이 너무너무너무너무 이해가 돼서 힘들었다. 고골의 소설에 대한 소명의식 같은 게 아니라, 그 소명의식과 현실의 자신의 능력이 부딪치는 데서 오는 갈등.
고골에게서 작가적 재능은 무엇보다도 유머나 풍자 쪽에 있었습니다. 러시아 사회의 속물성과 관료주의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습니다. 고골은 전형적인 속물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최고 작가입니다. 문제는 그런 재능과 그가 생각한 작가의 소명이 충돌하는 데 있었습니다. 속물적 인물들에 대한 풍자는 대상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꼬집는 것으로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골은 작가의 진정한 역할이 사회를 교화하고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후기로 갈수록 강해지는데, 그러면서 창작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p.110-111)
고골 자신이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소명, 소설의 나아갈 길. 그것이 분명하게 자리잡혀 있는데 사실 자신이 잘 써내는 소설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글과는 다른데서 오는 갈등. 아-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한다.
그러던 1837년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푸슈킨이 결투하다 죽은 거예요. 푸슈킨의 죽음은 레르몬토프에게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쓰게 했지요. 고골에게도 아주 큰 충격을 줍니다. 고골 생각에 러시아 문단에는 두 작가가 존재합니다. 푸슈킨과 고골. 푸슈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연상인 푸슈킨이 앞에서 끌고 가고 자기는 뒤에서 밀고 가고. 푸슈킨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는 부정적인 군상을 묘사하고. 그런데 푸슈킨이 죽은 겁니다. 고골은 '이제는 나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명 의식이 더 강화됩니다. 러시아의 문학을 책임질뿐더러 러시아의 미래를 구원해야 합니다.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한 소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p.116)
고골의 소명 의식을 옆에서 들은 사람이라면 아마 웃었을지도 모른다. 야 누가 너더러 그런거 하랬냐, 지금처럼만 해. 혹은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라며 격려했을지도 모르고. 이것이 소설의 올바른 나아갈 길이다, 라는건 고골 본인이 생각한거지 누군가가 고골에게 '그런 글을 써' 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다. 고골은, 고골 본인의 생각 때문에 갈등을 하고 힘들었던거다. 나는 이걸 잘 써, 그렇지만 이렇게 써야 하는건데...하는데서 오는 미친듯한 내적 갈등. 내가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가고 있다, 는 생각은 다른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준다 할지라도 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칫 오만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더 잘하고 싶은거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정말이지, 얼마나 어마어마했을까.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고골에게 동화됐던거다. 물론 내가 고골처럼 글로써 어떤 소명의식을 가졌다거나 한 건 아니다. 나는 고작 블로거 1人에 불과할 뿐인데, 글에 어떤 소명의식을 담겠는가. 그저 나 좋자고 쓰는 글인데. 다만 나는 나 스스로,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과 마음이 끌려가는 방향이 달라서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었던 일이 있었기에 고골에게 완전히 나를 덮어씌울수 있었던 거다. 언젠가 친구가 '너는 타인의 눈은 신경 안쓰는데 스스로한테 쪽팔리는 걸 못견뎌 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완전 깜짝 놀랐었다. 아, 내가 그랬나?
서른한살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그간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 가장 적극적인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훅- 강하게 다가왔다. 첫만남에서부터 '다음에도 나를 만날 의향이 있냐'를 물었는데, 상대를 바로 앞에 둔 상태로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무척이나 당황하며 '뭐 그래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라는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다음에 또 봐요, 라는 식의 아닌 이런 저돌성이 나로서는 꽤 놀라웠던거다. 한번은 주말이 되기전에 내가 물었다. 주말엔 뭐할거냐고. 그러자 그는 '당신 만날거야,' 라고 하는거다. 나는 그에게 '나는 이미 친구와 주말에 약속이 되어있다, 너는 나한테 만나자고 한 적 없지 않느냐' 고 답했고, 그는 선약이 있다면 할 수 없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일어났다.
나는 그를 너무나 만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친구와 먼저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이 남자를 너무 만나고 싶은거다. 게다가 나는 내 의사도 묻지 않은채로 나를 만날거라는 그의 말에 기분이 나빠야 한다. 그런데 기분이 나빠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별로 기분도 안나쁜거다. 오히려 주말에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데 설레이고 기쁘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 왜? 친구랑 약속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남자가 너무나 만나고 싶다. 친구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 무슨소리. 나는 언제나 남자 때문에 일상이 틀어지는 걸 경멸해왔다. 그러니 이래서는 안된다. 먼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 남자가 조낸 보고싶다!!!!!!!!!!!!!!!!!!!!! 그렇지만 친구를 만나러 가자.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약속 안지키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게 나다. 그런데 이런 내가 약속을 안지킬 수 없다. 그런데 이 남자 너무 만나고 싶다. 그래도 친구를 만나자.
아아- 이러다가 나는 폭발해버리고 만것이다. 내 안의 이 내적갈등.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오는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갈등. 아 진짜 뻐킹쉿. 욕나온다. 지금도 그때의 갈등이 생생하다. 그는 나에게 내적갈등을 정말이지 너무나 많이 하게 했다. 그는 늘 저돌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이건 아냐, 이러면 안돼' 하는 생각을 해야했고,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가슴은 그를 열렬히 원하고 있었던거다. 나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뻑하면 눈물이 났다. 만약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면 힘들지 않았을텐데. 내가 나를 통제하고 '안돼'라고 말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텐데!! 나는 나의 주인이 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를 만나는동안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건 누가 시킨 게 아니다. '너의 주인은 너가 되어야만 해', '남자 때문에 친구랑 약속을 어기지마', '만난지 얼마 안 된 남자한테 끌려가지마' 라고 누가 나한테 지시한 게 아니다. 순전히 내가, 나 스스로가 나를 옭아맨 것이다. 내가 만약 친구에게 이 상황을 얘기했다면 '야 완전 괜찮아 그 남자 만나, 나는 나중에 만나면 돼지'라고 했을것이다. 아마도. 또다른 친구들에게 말했다면 야 뭘 그렇게 생각해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거지, 라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내 스스로가 내 자신에게 용납이 안됐던거다. 아, 도대체 왜!!!!!
나는 다시는 그런 내적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뒤로 내가 계속 편하게 나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편안하고 안정된 연애를 해왔다. 그래, 이래야 해, 이게 내가 원하던 거였어, 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나는 그런 연애를 추구할 것이다. 볕이 좋은날 혼자 소파에 앉아서 엉엉 울게 만드는 남자를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드냐고 나 스스로를 학대하게 하는 그런 남자를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만, 편안하고 안정적인 연애를 내가 늘 추구해왔지만, 가끔은, 아 쉬바, 여자의 마음이란게 뭔지, 내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연애를 할때마다, 빅재미...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거다. 이 빅재미 란 뭔가 액티브한 데이트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 가슴을 들었다놨다 하는, 그런 걸 말하는거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그토록이나 힘들면서도, 힘들어했으면서도, 잊지 못하면서도, '또' 그 경험을 어느틈에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걸 인정하는 게 나는 또 그토록이나 싫었던거다. 물론 이 빅재미는 그 당시에는 전혀 빅재미가 아니다. 고통이다. 아픔이다. 어마어마한 내적 갈등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나니, 젠장, 그게 빅재미인거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나는 그를 '지나치게' 좋아했던 것이다. 지나치게, 지나치게!! Orz
아, 내적 갈등 얘기를 너무 몰두해서 썼더니 머리가 아프다. 이제 그만 써야지.
그나저나 고골님..미안해요. 고골님의 근사한 소명 의식에 제가 한낱 연애 감정으로 살짝 올라탔네요. 그러니 다시 고골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분명 고골의 단편 소설들을 읽었다. 로쟈님이 책에서 언급한 단편들을. 그리고 그 당시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와- 나는 죄다 다시 읽어보고 싶다. 내가 아주 많은걸 놓친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나저나 금요일이면 점심 먹고 퇴근하라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읽던 책을 마저 읽을 것이 아닌가. 이놈의 회사는 비오는 날도 출근시키고 금요일도 하루 내내 일시키고, 뭐하나 좋은게 없다니깐. -_-
아, 페이퍼 쓰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들였더니 기운이 쏙 빠진다. 아까 외근나간 동료가 사다준 단팥빵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