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61년산 슈발 블랑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차를 마시고 혼자서 영화를 보고 혼자서 쇼핑을 하는 시간들이 내게는 무척 좋고 완벽하게 느껴진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영화를 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매장에 가서 내가 사고 싶은 걸 산다는 것은 쾌감까지 선사한다. 백화점의 푸드코트에서 혼자 앉아 먹는 순대볶음은 일종의 위로다. 이런 내가 아직도 하지 못한 것이 혼자서 스테이크 먹기 이다. 영화 『사이드 웨이』에서 마일스가 혼자 햄버거를 시켜 먹으면서 자신이 가장 특별한 순간에 맛보고 싶었던 와인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축복같은 장면인데, 그 순간을 내가 나에게 선사한 것이라니, 완벽중의 완벽이 아닌가.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 나 혼자 하는 것. 나는 그것을 레스토랑에서 혼자 스테이크를 먹는것으로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레스토랑 앞에 가서 멈칫 하다가 이내 다시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은. 친구들과 이 얘기를 하고 있노라니 친구2가 내게 자신은 해본적이 있다며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오, 어쩐지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해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해봐야지, 해볼거야. 혼자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미디엄레어로 시킬거야. 맥주를 한 병 곁들이거나 와인을 한 잔 곁들이는 것도 좋겠지.  

 

 

 

 

 

 

 

금요일에는 올림픽공원에서 데이트를 했다. 밤이었고 날은 추웠다. 우리는 밥을 먹었고 배가 불렀고 그래서 커피를 사들고는 호수 앞 벤치에 앉았다. 나는 바다를 보는 것보다 호수를 보는 쪽을 선호한다. 바다보다는 호수쪽이 내게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바다는 내게 너무 벅차다. 그러나 호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것이 그 순간 거기에 있었다. 밤과, 커피와, 벤치와, 호수와, 남자가.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해질만큼 행복했는데, 내 등뒤에 있는 까페에서는 바깥의 스피커를 이용하여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와- 정말이지 판타스틱했다. 그 음악은 아이돌들의 후크송도 아니었고 달콤한 팝송도 아니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가사 없는 재즈 연주였으며, 그 연주가 끝나고 나온 곡은 케니지의 색소폰 연주였다. 또다른 연주곡이 그 뒤를 이었고, 하아- 나는 정말 행복해졌다. 그 순간의 공기와, 냄새와, 소리. 그 모든것들이 신이 내게 집중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했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에는 창원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적당히 취했다. 마트에 들러 술을 또 샀다. 숙소에 가서 밤새 마시고 놀자며 우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어떤 얘기를 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 참에 ㅈ 로부터 문자가 왔다.  

줌파 라히리가 좋아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좋아요?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문자가 ㅈ 로부터 왔다며, 나는 대답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1은 무조건 줌파라고 했다. 하진도 이윤 리도 읽었지만 줌파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신은 자꾸만 줌파의 새 소설을 검색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친구 2는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고 했다. like a rainbow 를 포기할 수가 없다고 그런 문장은 정말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 나는 줌파 라히리 같은 글을 쓰고 싶지만 한 권 더 사고 싶은 책은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말했다. 사무실에 꽂아두고 펼쳐보고 싶다고. 그렇지만 가장 완벽한 소설은 줌파의 지옥-천국 이라고. 친구1은 이름 뒤의 숨은 사랑은 어쩔거냐며, 그 소설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줌파가 이겼다고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줄을 몰랐고, 우리는 술 때문에 그리고 줌파와 올리브 때문에 흥분한 탓일까, 들고 있던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 개를 무작정 바닥에 놓고, 길 한가운데에 서서 자꾸만 줌파와 올리브를 얘기했다. 어느 순간 친구2가 이제 이걸 들고 이동하자고 말했고 우리는 땅바닥에 놓여진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개를 다시 들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가 친구의 핸드폰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들을 자꾸만 youtube 에서 찾아서 들려줬다. 엠피삼에 있던 곡들을 틀기도 했다.   

 

 

 

 

 

그리고 일요일. 오, 그 일요일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창원의 한 까페로 움직이던 그 길. 운전하던 친구는 이 노래를 들어봤냐며 카오디오를 플레이했다.  

 

 

꺅. 아니아니, 이건 뭐야, 이건 뭐지! 제이슨 므라즈의 목소리가 원래 이토록 완벽했었나? 그의 발음도 그가 내뱉는 영어들도 근사하다. 그는 1977년생의 미국에서 태어난 남자이니 영어를 쓰는것은 당연하지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그는 영어를 참 잘한다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영어를 정말 잘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영어를 잘한다. 가수이니 노래를 잘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정말 노래도 잘한다. 더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차가 별로 없는 창원의 거리를 이 노래를 들으며 움직이고 있노라니 행복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제이슨 므라즈를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 등극시키고 말았다. 제이슨 스태덤과 제이슨 므라즈. 아, 세상의 제이슨들이 나를 도무지 가만 놔두질 않네. 위의 노래는 암스테르담에서의 라이브인데, 그 라이브를 보고 싶은데 그 영상은 찾을 수가 없다. 저 남자가 저기에서 저렇게 노래할 때, 나는 대체 어디있었지? 나는 왜 암스테르담에 있지 않았지? 그래서 다른 라이브 영상을 찾아봤다. 

 

 

하아, 제이슨. 당신이 암스테르담에 있다면 나도 암스테르담에 있고 싶어요. 당신이 하이드 파크에 있다면 나 역시 그곳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노래 부를 때 따라 부르고 싶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건 뭐, 어쩔 수 없는거니까요.

2cd 도 싫고 1dvd 확장판 뭐 이런 타이틀도 싫지만, 내가 가진 앨범과 많은 곡들이 겹치지만, 살게요. 사겠습니다. 당신이 하는 랩을 듣다니요. 삽니다. 살게요. 암스테르담에서의 당신의 노래라니요.

 

 

 

 

 

 

일요일 서울로 돌아오는 ktx 에서 애인과 문자를 주고받는데, 몇시에 도착하냐고 물었고 나는 오후 네시 이십칠분이라고 말했다. 피곤할텐데 잘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잘자라고 말해주었고, 도착하기 십분전에 이제 일어나라고 메세지를 보내주었다. 삶이 이런 순간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호수 앞의 완벽한 그 밤과, 친구들과 노래를 듣던 그 오후와, 잘자라고 그리고 일어나라고 속삭이는 이런 시간들로. 창원역에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친구1에게 그리고 친구2에게 행복해요, 라고 말했다. 그들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1-11-2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술 때문에 그리고 줌파와 올리브 때문에 흥분한 탓일까, 들고 있던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 개를 무작정 바닥에 놓고, 길 한가운데에 서서 자꾸만 줌파와 올리브를 얘기했다 -> 아, 이 글의 내용 중에서 이 장면이 가장 행복해보여요, 저는. :)

다락방 2011-11-28 18:0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 좋았어요.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어요. 후훗. 이런 순간들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버텨가는 건가봐요, 치니님.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의 치니님의 문자메세지도 저를 구름위로 데려다 놓았더랬어요. 고마워요!
:)

2011-11-2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한밤중의 벤치와 호수가 가장 좋아보이는군요.

다락방 2011-11-28 18:07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았어요. 한밤중도 벤치도 호수도 따로따로 떨어져도 좋은것들이 모두 한 데 있었습니다.

moonnight 2011-11-2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애인!!! 데이트!!!! 제가 한동안 바빠서 서재에 관심을 못 뒀더니 중요한 걸 놓쳤나봐요. ㅠ_ㅠ 와, 다락방님 축하합니다. 다락방님의 모든순간순간들이 빛이 나는 듯 느껴져요.
특히, 와인 두 병과 맥주 여섯캔을 길에 놓아두고 줌파와 올리브를 토론하다니. 정말 정말 부럽네요. 저도 치니님처럼 이 장면이 가장 행복해 보여요. 막 떠오르는걸요. +_+;;;;;;;;;;

다락방 2011-11-28 18:07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문나잇님이 놓치신건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것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빛나지는 않았고, 틈틈이 제게 절망과 지옥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번 주말만큼은 행복했어요. 정말 그랬어요.
줌파와 올리브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니, 그 질문을 받는 것 자체로도 참 만족스러워요. 뿌듯합니다. 히히.

비로그인 2011-11-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행복해요. 나도 그런 문자나 날려볼까요? 그러면 어디 아프냐고 물을까봐 겁나요. 그러고 보니 왜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과 각별한 슬픔은 말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얘기를 안 했었나봐요. 별 일도 아닌 것들만 많이 얘기하고. 이건 좀 고쳐야겠어요.

책상 한 편에는 삼총사를 놓고,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어요. 좋아요 :)

다락방 2011-11-28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행복과 불행 그 자체도 별 거 아닌 것들로 찾아오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일상이 행복과 불행을 가른달까요. 어쩌면 제가 원하는 건 가장 소박한 삶인지도 모르겠어요. 행복하다고 해보세요, 수다쟁이님. 상대도 그 문자를 보는 순간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

저는 이제 퇴근할 것이고, 퇴근 하면서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를 들을거에요. 퇴근길이 울트라캡숑 나이스짱으로 행복해질 것 같아요. 꺄울 >.<

2011-11-28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8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1-11-2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 제 덕분이군요. ㅋㅋㅋ

다락방 2011-11-28 18:01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한순간에 우리를 흥분시켰어요.

무스탕 2011-11-2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만 살고싶은 삶 속에 탕이도 포함되어 있는건가요? (옆구리 마구 찌르는 중ㅎㅎㅎ)

다락방 2011-11-28 18:00   좋아요 0 | URL
포함되어 있을까요, 아닐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1-11-29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하죠. 줌마 올리브 와인 맥주 친구 메시지 모든게 다 부러워요 ㅠㅠ 너무 부러워요. 어찌까.

다락방 2011-11-29 08:41   좋아요 0 | URL
ㅎㅎ 행복했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버벌님, 잡문집 말고는 어떤 책을 읽고 있어요?

버벌 2011-11-30 15:41   좋아요 1 | URL
문학동네 가을호와 말벌공장을 잡고있어요. 문학동네 가을호는 미루다 미루다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잘 넘어가네요. 몰랐던 작가들을 많이 알게되고. 장르문학 잡지 였던 판타스틱을을 달마다 받아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시기가 찢어진 메모장들이 많이 날리던 시기. ㅎㅎㅎ 문학동네 읽으면서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찢어진 메모장들이 모이고 있어요 뽈뽈뽈 말벌공장은 아직 읽지는 않았어요. 잡고만 있죠.

jongheuk 2011-11-29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 love this post.

다락방 2011-11-29 16:02   좋아요 1 | URL
i like you so much.
:)

2011-11-29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3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30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