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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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기대치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 시집을 고를 때 내 기준은 이렇다. “한 번 떠오른 뒤엔 돌이킬 수 없는 생각”(구애)을 시인이 잡아내 “소리치며 멀어지는 슬픔과 기쁨에 무능한 너 그를 죽도록 기다리는 능력”(그렇다고 치자」)으로 내 눈길을 사로잡길 바란다. 그들이 기네스북 기록 경신을 하는 기인도 아닌데 너무 높은 기대치일까. 귓불을 긁는 정도로 하향할 의향 없다. 책이란 형식 특히 시집은 글쓴이의 일방적 연설이다. 내가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욕하거나 시집을 던져버리거나 하는 그 모든 건 시인에게 달려 있다. 내 의사 표현은 시집에 대한 평가로 한정된다. 더 노력한다면 맘에 드는 시를 외워 낭송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누구를 위해, 어디에서…… 오늘은 노력해서 다만 리뷰를 쓰기로 한다.

작품이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고 다양한 담론을 양산한다는 상호텍스트성은 시에 적용되기 어렵다. 시집의 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시를 압도하며 탄생해야 이 세계에 겨우 존재할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하나 마나 한 대화나 한탄과 수다 같은 시를 집중해 읽을 사람은 없다. 시와 시인은 우리의 기대를 통과해야 한다. 상호텍스트성을 체감하며 소설을 읽는 독자 또한 얼마나 되겠나. 비평가가 여러분 이 메커니즘은 사실 이렇습니다!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교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시체에는 없는 그것”(영혼)이라 말하는 김상혁 시인의 은밀한 포부가 맘에 든다. 이 시집을 해설한 조강석 평론가는 그의 자세를 이렇게 평가한다. 감정의 자발적 유출(정조情調)을 독자에게 인계하는 대신 정황과 사건을 창조하고 판단하는 것을 인계하고 있다고. 이 시집 제목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라는 상징적 의미처럼 그것은 어떤 세계로의 초대이다. 즉 이야기이다.

 

전통적으로 서정시의 세계가 서정적 자아나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질료로 온전히 환원될 수 있다고 여겨져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듣는 눈과 말하는 귀에는 환원의 기능이 없다. 그리고 환원이 없으면 축소나 과장이 없다. 듣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규모와 전말이 일정한 스스로의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집에서 이런 사정을 가장 잘 형용하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라는 말일 것이다. …… 세계가 감정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독립한다.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제 그것은 정서적으로 매개될 필요가 없다.” 조강석

 

 

정서를 이야기 형태로 환전한 김상혁의 시들은 교묘하게 건조하다. 그래서 지겹다말하고 있어도 그 지겨움의 감정은 독자에게 덕지덕지 스며들지 않는다. 이야기의 다른 곡조인 휘파람처럼 도착한 지겨움이라 오히려 귀 기울이게 된다. “지겨움을 지긋지긋하게 겪고 있는 시인과 독자인 나는 모종의 공모 상태에 빠진다.

 

 

나의 여름 속을 걷는 사람에게

 

 

여름으로 오는 길에 너는 죽은 새, 봄의 검은 웅덩이, 깨진 울타리의 조각들, 다음해 봄까지 잠들어 있으려는 자의 조용한 손을 밟으며 왔다. 그렇지만 지겹다! 새든, 봄이든, 울타리 속 꿈이든 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여름에서 도망치는 길에 너는 죽은 새를 더욱 뭉갠 일, 깨진 웅덩이와 울타리를 다시 깨뜨린 일, 꿈속의 비명을 꿈 바깥으로 꺼낸 일을 괴로워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 유령이 있다면 너는 삶과 유령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 넌 웃음이 많다……

 

너무 사랑이 많다. 그렇지만 지겹다! 여름이 풀을 키우고, 풀이 끝없이 퍼지다가 너의 생각을 뒤덮고, 그러다 불붙은 생각이 기쁨이 되었다가 결국 우리의 꿈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그릇에 똑같이 밥을 채우는 것이 다……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그렇지만 네가 밟은 것, 밟아서 더 깨뜨린 것, 더 깨뜨려 흩어진 것, 그런 지겨운 것이 죽은 새, 웅덩이, 부서진 울타리, 뒹구는 손을 덮어준다. 풀과 꿈을 키워준다. 다가올 여름과 지나간 여름 사이 슬픔이 있다면 너는 오늘과 슬픔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넌 너무 기쁨이 많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는 저 문장처럼 나는 시인의 마음을 내가 공감하게 만들지 말고 내 마음을 시인이 점성술사처럼 읽어내라는 요청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적인가. 문학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대개 이렇지 않나. 교묘하게 객관적인 거리를 둔 김상혁의 이야기 방식은 그래서 퍽 성공적이다. 시인과 내가 풍경을 같이 보고 있는 기분이다. “슬픔도 구질구질하게 값싼 공감을 요구하지도 않고 남루하지 않게 거기 있다.

 

    

 십일월

 

 

자네의 그림에는 풍경과 생각이 섞여 있어 언덕을 그리고 나면 떠오르는 소리를 거기에 색으로 입히지 어제의 붉은 언덕을 오르던 사람이 오늘의 검은 언덕을 내려가는 식이라네 왜 석양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감는 일보다는 항상 덜 슬픈가

 

십일월에 내리는 눈에는 비가 섞여 있어 잠을 자고 나면 꿈의 차디찬 들판을 달리던 가슴에 식은땀이 흐른다네 오늘 우산도 없이 현관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내일도 꼼짝없이 눈속에 서서 벌벌 떨어야 하는 식이지 누구나 화가 앞에서 발가벗을 용기를 가진 건 아니라네

 

시도 때도 없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도저히 그림에 담을 수 없어 자네가 그린 초상은 끝내 엉망으로 칠해지곤 하지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나 눈뜨지 않으면 사람의 고백이란 한낱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발 같은 것을

 

나는 자네 그림이 감춘 것에 대해서라면 정말 모르는 게 없었지 붉은 내 얼굴 뒤에서 비가 온다거나 검은 풀밭 속에 눈이 휘몰아치는 식이었다네 왜 세계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색으로 세계를 뭉개는 일보다는 항상 덜 슬픈가

 

요즘 다른 화가 앞에서 옷을 벗으며 나는 십일월만을 그리던 자네가 실은 그 누구보다 더 십일월에 몸서리쳤다는 사실을 깨닫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나 마음이 붉은색이든 검은색이든 사람이 떠나면 한낱 꿈속의 달리기 같은 것을

 

 

 

 

우리가 힘겹게 살아낸 삶은 대개 익명으로 사라질 뿐이지만, 세계가 윤곽 속에 뚜렷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윤곽은 우리의 시선 속 편린 같은 것이고 우리 모두는 뭉개짐의 연속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시는 그걸 언어로 잘 그려낸 그림 같아 한참 머무르며 바라봤다. 시인도 나도 이런 풍경,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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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5-05 02: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괜찮아서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한 시집입니다 언젠가 보겠죠 쓰는 건 재미없는 제 이야기일 듯... 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언제나 감상문을 쓴다 생각하기에...

시를 봤을 때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 거 좋아해요 여기 담긴 시가 그렇게 보이는가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 책을 보고 떠올리는 그림도 사람마다 다르듯이... 어쩐지 그건 꿈같기도 해요


희선

AgalmA 2017-05-05 14:41   좋아요 3 | URL
저는 오히려 제목이 그닥 끌리지 않았어요^^; 시들 제목 보고 읽어봐야겠다 싶었죠. 큰 기대하지 않고 읽어서 그런지 의외로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한국 시단에 워낙 성추문 사건이 많아 이 시인도 그런 일로 연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는 언어 중에서도 단연 회화적이죠. 회화의 사조들처럼 다양한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요.

yureka01 2017-05-05 07: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확 달아오르는 시집 리뷰....읽고 그 지겨움에 빠져들고 싶네요.뻔하지 않는 낯선 은유의 시계로.^^.
오랜만에 시집 리뷰 만나는 이 아침에 삶의 윤곽을 뭉개고 싶은 시간.ㅎㅎㅎ 이런 리뷰는 이달의 리뷰 당선작으로 추천...^^.

AgalmA 2017-05-05 14:17   좋아요 2 | URL
요즘 어수선한 분위기라 시집에 손이 잘 안 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시를 읽고 싶기도 합니다.
삶의 윤곽을 뭉개고 싶은 시간ㅎㅎ yureka01님 댓글도 시적이십니다^^

yureka01님이 시를 아끼시는 맘 잘 알죠^^

겨울호랑이 2017-05-05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게 십일월은 ‘무채색의 시간‘으로 생각됩니다만, 시인은 십일월을 붉은 색, 검은 색의 강렬한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아마 경험의 차이겠지요... 제가 갖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시(詩)의 매력이라 생각되네요.^^:

AgalmA 2017-05-05 14:43   좋아요 3 | URL
제가 생일이 11월로 넘어가기 바로 전이라 제 나름의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 때의 붉은색은 말라버린 붉은 단풍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시는 글로 읽는 그림 같아서 휴식처럼 물처럼 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