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의 불 탄 영토 : 권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를 아이가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마치 불에 탄 영토처럼 아무것도 뜯어먹을 게 없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나지 못하는 핍진한 사막과 같은 영토를 상징계라고 부르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냐하면 그렇게 핍진한 상태만 전부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핍진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쾌락을 오히려 더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성적인 충동의 세계가 핍진한 상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무의식이 그걸 인식하죠, 의식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의식은 행복해 할 수 있어요. "나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어. 나는 굉장히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어. 우리는 멋진 커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만족스러운 어떤 의식적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순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성충동의 만족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럴 경우에 이들의 무의식은, 이 주체의 무의식은 다른 방식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보상의 요구에 부응해서 등장하는 것을 라캉이 증상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즉 성충동의 만족의 불가능성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그렇다면 이걸 한번 탐닉해 봐라고 제시되는 것, 그게 바로 제3의 요소로서의 증상이라는 것이죠. 가장 그중에서 제3의 요소에서 합법적인 요소가 바로 팔루스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무의식은 팔루스 말고 더 많은 증상에 경도되거나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사로잡힘이 바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그 내담자를 상담실로 찾아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거기에 자꾸 빠져드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그 고통스러운 이미지 속에서 허우적대는지 모르겠어요. 난 그걸 원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의 삶은 이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증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거 같아요.라고 호소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정신분석이라면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의식적으로는 이 증상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사실상 이걸 탐닉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원인은 이 내담자의 세계는, 다른 많은 인간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쾌락이 없는 사막과 같은 핍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핍진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처럼 만난 증상을 놓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그 증상이 신체적인 고통이건, 어떤 도박과 같은 증상이건, 아니면 어떤 모순된 사랑이건, 모순된 사랑이 증오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건, 어떤 종류의 고착이든 간에, 결국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 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태가 바로 증상이라는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자 우리 그 증상을 포기하는 연습을 같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아무리 심리치료사가 내담자에게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대등한 관계에서 제안을 해도 내담자는 당연히  아 그러겠습니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그것을 술을, 담배를, 모순된 연애관계를 포기하는 삶을 연습해 보겠습니다라고 의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담자의 무의식은 결코 그 증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거라는 거예요. (중략) 이것이 정신분석이 증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태도라는 거예요.

<라캉 정신분석 입문 특강_ 상징계란 무엇인가? 증상의 해석학  1:00:26~1:04:36 / 백상현/ 라까니언 프렉시스 유튜브 강의 중>


나는 나에게 발생한 일에 의미를 부여=예쁘게 포장=꿈보다는 해몽=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일기를 쓰는 행위가 바로 그런한 의미 부여, 예쁜 포장의 의식이다. 납득이 된다면 설령 그것이 지옥이라고 해도 나는 그걸 견딜 수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겪어야 했던 지옥이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당하는 고통.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는 것. 나에게는 인생 그 자체가 그렇다. 도대체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요즘 나에게는 일기로 쓰고 싶은데 막상 쓰고 나면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 되고 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명품, 그중에서도 디올. 디올이 아니면 그 무엇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증상. 그래서 내가 디올에서 흥청망청 물건을 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욕계의 바틀비가 되었달까. 디올이 아니라면 나는 구매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디올을 몸에 걸치고자 하는 이유가 허영이나 허세는 아니다(아닌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도 관심 없다. 타인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 상상계 속에서 사는 나. 내가 보는 나 자신만 중요해. 거울단계. 특히 나는 외모에 관해서 그렇다. 내가 나에게 예뻐 보이는 게 진짜 중요함!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타인의 시각 즐거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디올은 내 무의식이 탐닉하고 있는 나의 증상인가? 그래 뭐 무의식이라도 행복하니 됐다 싶기도 하고.


둘째는 안락한데 너무 지겹다는 것. 좋은 집, 좋은 차, 나쁘지 않은 직업,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부모는 건강하고(넉넉한 노후를 갖춘 이 시대의 승자), 이촌들도 알아서 잘 사는 듯 보인다. 2016년 여름은 매우 더웠다. 그 여름을 에어컨 없이 버텼다. 그 시절의 내 욕망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그래서 그 무엇에도 돈을 쓰지 않고 나의 궁전(나의 무덤)을 지을 건축비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내 욕망은 평균적인 아파트 구조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 취향의 집 구조였고, 그걸 설계하고 짓고 그 공간에서 내 영혼과 육체를 쉬며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돈 자체를 크게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아파트(주택) 투자에 별 관심이 없다. (10억도 없는 나이지만) 100억이 있다 한들 100억을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라고 생각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타인이 나를 부자로 봐 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야 100억이 필요하겠지만, 난 여전히 6개월생 아기처럼 내 상상계에서 꺄르르 대고 있는 중이라서 타인이 나를 뭘로 보든 말든 상관없다. 

=>욕망의 대상이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고 라캉은 말하는데 정말 그럴까? 내 욕망의 대상이었던 피라미드 겸 베르사유 궁전은 허상이었던 것이기에 내가 이렇게 지겹고 권태로운 걸까? 가지지 못했을 때는 가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버텼는데, 대상을 가진 지금은 고작 이게 다야? 하는 기분. 하지만 라캉은 욕망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욕망은 절대 결단코 채워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셋째, 모순된 연애

얼마 전 전남친은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 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고." 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이유는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전남친이 하는 말 대부분이 머리에 입력이 안 돼서 녹음을 한 것을 며칠이 흐른 뒤 천천히 다시 들어 봤다. 이런 말들을 했었구나. 그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이래서 대화가 통할 수가 없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에. 내 머리에 쏙쏙 입력되는 말들은 대체로 그 새끼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말들이다. '저런 달달한 말도 했었구나. 이건 16부작 한국로맨틱 코메디 14부쯤에 있을 법한 대사인데.'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전남친의 옷들(슈트들)을 돌려주지 않고 있고, 전남친은 그걸 돌려달라고 하고 있다. 전남친은 옷이 엄청 많기 때문에 그 옷들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무슨 옷이 내 집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굳이 그 옷들을 돌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내 덕에 옷장이 좀 비워졌으니 더 좋을지도. 나는 "니 기억 속에 없는 옷인데 꼭 돌려받아야겠어? 무슨 옷인지도 모르잖아. 어떤 옷인지 맞추면 돌려줄게" 라고 했더니 전남친은 "내 옷인데 왜 안 돌려줘. 장난쳐? 꼭 돌려받고 끝내고 싶다. 더 이상은 너한테 휘둘리기 싫고 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싶다." 라고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때의 대화들도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왜 안 돌려주는지 몰랐는데, 위에 언급한 강의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핍진한 사막 같은 상징계를 살아가는 나(혹은 나의 무의식)는의 전남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행위에서 어떤 쾌락을 느끼고 있었던 것. 그래, 무의식 너라도 행복해라. 나는 옷을 돌려주지 않는 또라이 전여친 역할을 수행할 테니.


여기서 더 나아가 전남친의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 밖에 없고." 라는 말을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니 무의식이 나를 부여잡고 있는 거라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넷째. 라캉

25살 전후의 시기에 라캉을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자주 가던 철학 블로그가 있었는데 그 블로거가 라캉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관심은 전혀 없었다. 25살 시절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대체로 채워졌다. 또한 더 거대한 욕망들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채워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큰 불만이 없었다. 35살에는 25세의 내가 바라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25세의 내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해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루하고, 이게 내가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심지어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나는 단어 그대로 병든 인간이 되었다.


라캉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이해되고 있는 이유.

첫째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 둘째 내 인생의 경험치가 라캉을 술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쌓였기 때문(25세의 나는 결코 라캉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그때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결국 채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결여된 존재, 결여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시작이었다. 너무 기분 나쁜 말인데 뭐라 반박불가. 사는 거 너무 귀찮고, 하루하루 뭔가 불쾌한 기분, 사소한 모든 것들이 거슬리는 기분. 기분대로 막 살아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고. 규칙적으로 살아야 하고, 건강한 음식 먹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이런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미션들에 나는 억압당하고 있는 것. 어떻게든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나. 즉 일기쓰는 나 자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기를 이렇게 정성껏 쓰는 이유가 나만의 픽션, 나만의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인 거 같다. 내가 왜 이런지, 지금 내 기분이 왜 이런지, 내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등등을 나에게 설명하는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나 자신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상징계 아닌가? 아님 말고.


라캉 책은 아직 읽지 않았고, 백상현 라캉 강의를 단 2개(반복 청취) 들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 논리 정연하여 종교로 삼고 싶을 지경. 도대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는 의문들의 답이 라캉의 욕망이론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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