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을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몸이 가볍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10시간을 잤기 때문에 몸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말 3일 동안 30시간을 잔 적도 많은데 그런 주말에도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덜 피곤하다, 적어도 졸리지는 않는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개운하고 가볍다. 몸이 없는 느낌이다. 2단 뛰기 30개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이런 적이 작년에도 있었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뇌를 혹사시켰던 날의 밤에 나는 장르가 다른 숙면을 했다. 5권 세트를 다 샀는데 아직 1권에서 정차 중이다. 숙면을 위해서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 어제 읽었던 책은 <고독의 매뉴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의미의 간극이 많아 소리를 내면서 읽기까지 했으니 간만에 뇌가 혹사당한 것. 3주째 나는 고독과 고립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의 절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동의하지 못하는 상태.  


내가 <고독의 매뉴얼>을 읽게 된 계기는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자크 라캉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맘에 드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라캉이 기독교 원죄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기에 받은 충격 혹은 모멸감 때문이었다. 대충 내가 이해한 바를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결여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 결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정도이다. 그래서 라캉을 검색해 보다가 백상현(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라캉 전문가인 줄은 몰랐다)의 <고독의 매뉴얼>을 구매하게 됨. <고독의 매뉴얼>과 문예출판사의 <욕망 이론> 2권을 결제했더니 자비로운 알라딘은 결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서 배송완료해 주었다. 결여(결핍)가 완전하게 충족될 수는 없더라도 24시간 이내 배송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실 나는 심리, 정신분석 별로다. 지금 보니 칼 융의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옆에 꽂혀 있는 걸 발견. 읽다 만 것 같다. 결과론적 이야기에 불과하게 여겨져서다. 인간은 수 십, 수 만 가지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같은 이유로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인데. 10명 중 3명이 같은 패턴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머지 7명도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 심리상담학(정신건강의학)이다. 


왜 조물주(신)는 인간을 원죄도 있고 결핍도 많은 어떤 것으로 만들었지? 시발 진짜 악취미.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동댕이쳐버린 건가(하이데거 ㅋㅋㅋㅋ)


권여선 신간 <각각의 계절>은 정말 재미있지만(왜 나는 60살 전후의 사람들에게 공감하는가 ㅠㅠ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무구>) 나에게 숙면을 선물해 주지는 않았다. 오지은 <당신께>도 내 마음을 토닥여주긴 했지만 숙면을 주진 않았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

<각각의 계절> 중 <무구> / 권여선


고립은-고립되고 싶은 충동은-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고독은 우리를 보호패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 / 캐럴라인 냅



그들은 '무'를 보고 있으므로 고독하다. 고독의 절차는 이러한 응시의 고립을 창조적 사건의 시작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에 의지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절차에서 무엇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고독해지는 것이며, 우리를 매혹시킬 사건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고독의 매뉴얼> / 백상현



솔직히 밑 줄 친 저 문장. 소리 내서 서너 번 읽지 않으면 이해 불가다.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적으로는 음...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은 도로 같은 문장. 다시 말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권여선의 단편 <무구>의 고독은 바로 이해가 되며, 캐럴라인 냅의 고립과 고독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익숙한 독서만 하고 지낸 건 아닐까 하는. 최근에는 전투적으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낯선 생각으로 가득한 책,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 난무하는 책을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백조와 박쥐>를 읽으면서 '하 지능 낮아지네.' 했었다. 있으나 마나한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밥을 먹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예뻤다. 휴대폰이 울렸다. 등등. 이런 책은 아무리 읽어도 뇌가 달구어지지 않는다. 


주말 3일간 30시간씩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낮동안 뇌를 혹사시키지 않아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길만 운전하고, 익숙한 업무만 하고, 익숙한 책만 읽고, 익숙한 영화만 보고. 이건 마치 외부자극이 없어서 발달을 제때에 못한 유아 같지 않은가! 


충분히 몸을 사용하지 않아서 선잠을 자는 아기처럼 나 역시 뇌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숙면을 못했던 걸지도. 


ps. 한나 아렌트와 자크 라캉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자극을 나에게 준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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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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