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테 싫은 소리 듣는 게 왜 싫은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싫으면 내가 힘든가? 나를 싫어하는 그 사람이 힘들지. 나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서 살지,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살지 않는데. 남이야 남 인생 지가 알아서 살겠지, 무시해. 


못하면 못하는 거지. 어쩔 수 없지.


성사될 일은 일이 나를 이끌어 가주고, 안될 일은 내가 아무리 일을 끌어도 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억지 노력은 하지 않지.


왼손은 거들뿐, 노력도 거들뿐!


파도가 다가 오는구나. 파도에 몸을 싣자, 서퍼처럼.


내가 밝아졌다고? 너그러워졌다고? 나는 강강약약 타입이거든. 세상 사람들을 전부 바보, 멍청이, 정신질환자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졌어. 바보니까 저러겠지, 열등감이 많으니까 저러겠지, 정신에 문제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 타인의 문제행동이 받아들여지지. 하지만 상대방이 제정신으로 저런다? 정상인데 저런다? 그러면 화가 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람들이 그렇잖아. 외로워서 결혼하고 애 낳고, 반려동물 키우고. 정신이 괴로워서 술, 담배, 과식, 과소비를 하잖아. 나는 그 모든 걸 하지 않지.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보다 더 제정신이야. 그래서 나는 그런 것들 없이도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내가 그들보다는 고수라고 생각해. 


뭐 내가 고수가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핵심은 내가 나를 고수라고 생각을 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거 아니겠어? 사랑받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도 있겠지. 나는 뭐 남한테 사랑받은 거 관심 없고, 내가 나를 잘 보살피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


내가 애인들에게 들었던 가장 납득이 안되던 말 "너는 나 없이도 잘 살잖아."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나는 남한테 의존해서 사는 거 싫어. 나는 원래 나 혼자 잘 살아. 왜 내가 너 없으면 못살아야 해?"


나는 걱정 안 해.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면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은 걱정을 진지하게 할 자신 있어. 하지만 걱정은 아무 도움이 안 돼. 그래서 나는 걱정 안 해. 기도를 하면 일이 해결돼? 남한테 하소연을 하면 일이 해결돼? 일을 해야 일이 해결되지. 기도나 하소연을 하다가 영감이 떠오를 순 있겠지. 나는 심란할 때는 청소, 손빨래, 세차 셋 중 하나를 하는데 그러면 영감이 떠오르지. 기도나 하소연보다 훨씬 효율적잖아.


내가 남의 처지를 왜 생각해줘야 하는데? 나는 내 입장 생각하고 살기도 바빠. 남한테 내 입장 생각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그들이 그래 주기를 바라지도 않아. 각자 사는 거지. 


공감? 공감 잘하는 사람은 호구거나 사기 잘 당하는 사람 둘 중 하나겠지. 나는 타인이 나에게 공감해주는 것도 딱히 바라지 않아. 경험치가 다르고 능력치가 다른데 그들이 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그럴 리가.


내가 오만하고 거만하고 잘난척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중증 자기애 중독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는 남한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도, 사랑해주는 것도, 추앙해주는 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내가 그어 놓은 선, 그 선 넘어오지 않는 것. 내 영역이니 침범하지 말고 가까이 오지도 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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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와 그제 사이에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 작가와의 대화를 들었다. 가수 신승은의 노래 몇몇 곡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회차가 업데이트되었을 때 조금 듣다가 '아 채식 질린다 질려 듣기 싫다 싫어' 하고 일시정지한 채로 한 달이 지났다. 

지난 주말에는 영화 <오피스>를 봤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미례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복장을 치면서 영화를 봤더니 내가 공포물을 봤는지, 그냥 분통 터지게 소심한 사람을 주제로 한 베스트극장을 봤는지 헷갈렸다.

오늘 아침 여유롭게 별 목적 없이 맥북을 열었다. 갑자기 팟캐스트에서 들은 신승은 책이 생각나서 검색을 하고 미리 보기를 읽던 중, [실제로 영화 오피스 제작 발표회에서]라는 문장을 읽고는 당장 영화<오피스> 출연진을 검색해봤다. 아하! 아오이 유우 닮았다고 생각한 그 배우가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이었구만.

 

나는 이런 우연이 겹치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식 등등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만 써 보기로.

바로 어제 저녁에도 나는 영양보충을 위해서 소의 살코기 부문만 구워서 참기름소금장에 찍어 먹었지.

소고기, 멸치육수 된장국, 죽순볶음, 열무물김치가 나의 저녁상차림이었다. 



2.

2022년을 관통하며 생존해오고 있는 인간으로서 비건지향을 한다는 것은 자기 위로말고는 그 어떤 효과도 소용도 없다고 나는 감히 장담한다. 소용없는 일이란 내일 새벽에 태풍 예보가 있는데 오늘 저녁 손세차를 맡기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건 불안이 극대화 되었을 때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효용이 있는 일일 뿐, 미래지향적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 다시 말하면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일에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성의를 보여라'라고들 한다. 하지만 난 늘 반문한다. 그런 무의미한 성의를 왜 보여야 하죠? 라고! 


비건지향을 택하는 사람들의 주된 계기는 공장식 축산에 대한 반발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 나는 그랬다. 

공장식 축산업의 규모를 줄이는 것에 비건지향이 어느 정도의 긍정적 효과를 미칠까? 나는 0라고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나만큼 마른 사람도, 나만큼 적게 먹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좀비처럼 먹어대는데 그게 채식이든 육식이든 잡식이든 뭣이 중한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비건인데 매일 저녁 맥주 1캔을 마신다? 그게 잡식인데 소식하는 나보다 생태적인가?? 나는 먹는 양은 줄이지 않고 단순이 비건만 지향하는 건 자위라고 생각한다. 물론 먹는 양도 많고 잡식하는 사람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환경적인 큰 차이가 있냐는 말이지? 비건인데 중성화 시킨 반려동물을 키운다?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분노한다. 왜 다른 동물의 번식권을 니가 결정해? 그거야 말로 가장 반동물적인 행위 아닌가? 그냥 자연에서 번식하게 냅둬. 그게 동물해방이야. 동물해방이 따로 있나? 동물이 동물끼리 자연에서 사냥하고 번식하고 살다 죽는 게 해방이지.



잘 살게 되면 세상의 부가 넘쳐나면 사람들이 음식을 덜 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심지어 채식주의자도 엄청나게 먹어댄다. 나비 애벌레가 어린 배추를 섬유질 많은 줄기를 빼고는 다 뜯어먹어서 배추를 죽인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공포로 부르르 떨었다. 육식만 나쁜(??) 줄 알았는데 채식도 나쁘긴(??) 매한가지구나. 라는 깨달음에 머리가 얼얼해진 경험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동물 다큐를 종종 본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도대체 육식 동물은 왜 있는 걸까? 정말 조물주가 있다면 조물주의 정신분석을 좀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늘 든다. 내가 어떤 존재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나는 다른 동물(식물)의 목숨을 담보로 에너지를 섭취하는 존재는 창조하지 않을 텐데... 먹이사슬 혹은 먹이 피라미드 구조로 순환하는 생태계는 너무 잔인하다. 이것을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는 찐악마다. 그러니 누가 만들었을 리가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하나님은 왜 육식동물을 만들었대요? 너무 잔인한데. 내가 창조 능력이 있는 신이라면 그런 사이코패스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 같은데요. 라고 했더니  내 질문에 대해 대답은 않고, 다른 화젯거리로 말문을 열었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축산업, 농업, 양식어업, 원양어선어업 등을 통해서 식자재를 생산하는 기술집약적인 현대의 방식 아래의 채식과 육식은 둘 다 나쁘고 잔인하다. 자본은 식량 산업에 투자될 것이고 그 투자금을 줄이지 않는 한 공장식 축산이든 공장식 농어업이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비건인데요, 공장식 축산이 얼마나 나쁘냐면요, 왜 동물권이 중요하냐면요 이런 말 해봤자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해?" 하는 비아냥거리는 대답만 들려 올 뿐이다. 


그것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처럼

"먹는 거 싫어합니다."

라고 말하면 아무도 뭐라 못한다. 먹는 게 싫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먹기 싫은 걸 왜 억지로 먹어야 하는지?

나는 회식도 안 간다. 왜냐하면 먹는 게 싫어서. 

"회식 메뉴는 고기 아니면 회 둘 줄 하나인데, 그거 둘 다 먹기 싫어서요."

라고 하면 아무도 억지로 회식에 가자고 안 한다. 


음식 먹는 것에 도덕을 들이대는 게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보단 그냥 취향을 들이대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나는 음식과 도덕을 연결짓는 건 별로고(더 솔직히는 수준 낮다고 본다), 

그냥 먹기 싫으니까 안 먹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살아야 하니까 가끔은 영양섭취를 고기도 위해서는 먹는다.

대신 영양제는 거의 먹지 않는데, 영양제 생산과 고기 생산 둘 중 뭐가 더 환경적으로 나쁜지는 따져봐야 할 일 같다.



나는 매일 마실물을 보온병에 담아서 들고 다닌다. 환경을 위해서는 아니고, 나를 위해서. 회사가 위치한 동네의 상수도원이 더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 

회사 사람들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다.

"아, 이 동네 상수도 물이 좀 더러워요. 정수기로 걸러도 찝찝해서요. 그리고 생수배달은 문제가, 생수는 페트병 쓰레기가 나오잖아요. 그 쓰레기를 보면 스트레스받기 때문에. 그냥 물을 매일 들고 다녀요.물 부족 국가 아이 같죠?"


이런 비꼼을 해대니 사람들은 아무도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여대지 않는다.

혹여 그랬다가는 "아니, **님은 자식도 있는데 자식이 없는 나보다 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삽니까? 역시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역시 좀 이기적이야." 라는 말을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버리기에.


아무 생각없이 편한대로 살고 말하는 사람들한테는 나도 보란듯이 대놓고 씨부린다. 이솝우화 햇빛과 바람은 10번 중 1번 정도는 맞지만 9번은 틀리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기에.


3.

황정은, 신승은, 손수현. 세 비건지향인의 대화를 듣는데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그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수줍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살다보면

<오피스>의 이미례(고아성) 되는 건 시간문제.


비건지향인들이여 당당하게 비건지향하시길를! 

당신들이 고기중독자들보단 나으니까.

맛있으면 0칼로리 같은 헛소리나 해대는 인간들 보다는 나으니까.

(맛있으면 0칼로리 이말 진짜 싫어한다. 되도 안하는 헛소리는 좀 그만 듣고 살고 싶다.)


식탐도 많고, 번식욕도 강하고, 금전욕도 강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고

그런 사람들 속에서 식탐, 번식욕, 금전욕도 결핍된 

나라는 사람이

매일 어떤 기분으로 살겠는가?


지옥이지! (드라마<지옥>의 고지가 나에겐 "너는 몇 날 몇 시에 태어난다."로 들렸으니. 하하하.)

좀비지옥!!

먼저 사려고 줄서고 줄서고 줄서고.


저 널리고 널린 멍청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게 내 숙명이다는 생각으로 산다.


그래서 나는 그 멍청이들 수준에 맞게 단도직입적으로 싫다, 좋다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싫다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먹는 사람이 정말 많다.

싫은 걸 에둘러서 소심하게 말하고 살다 보면 <오피스>의 이미례가 되는 것이다. 

칼부림만은 피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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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1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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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1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1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5월은 푸르고 아이들은 자라는 황금 날씨의 시기에 나는 연휴를 맞이하여 연휴가 아니면 기분 좋게 시작을 할 수 없는 책을 읽기로 작심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일상의 잡다함으로 인하여 훌륭한 소설의 도입부가 방해를 받아 그 책의 재미를 침해당하는 것이다. 


모처럼 하드커버 책을 만져서 기분이 좋았고, 종이도 얇고 부드러워서 더 기분이 좋았다. 큰 기대를 하고 펼쳤는데 내 기대를 능가하는 내용이었고, 나는 글자의 소용돌이에 빨려 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10~20쪽 정도 읽고 나면 뇌가 극도로 피곤해져서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낮잠을 1시간 30분 씩이나 자고도 밤잠을 10시간이나 자게 만다는 엄청난 책이었다. 더 대단한 것은 늘 깊은 수면 시간이 부족했었는데(이 점에 대해서 나는 미밴드가 고장이며 내가 어떤 잠을 잔다고 해도 이 놈은 늘 같은 결과만을 내놓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성 없는 남자>는 나를 깊은 수면 상위 10% 이내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늘 미밴드 앱의 깊은 수면 분포 그래프를 보면서 깊은 수면 3시간 이상 자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해? 그냥 유니콘 같은 거 아냐? 라고 늘 수상쩍게 생각했는데 내가 그 유니콘의 영역에 진입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좀비였구나, 내가 현재 살아가는 꼬라지가 좀비 그 자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익숙한 것만 읽고, 익숙한 영화만 보고, 익숙한 길만 운전하고, 익숙한 업무를 슥슥 해치우고, 그렇게 익숙한 경험만 하고 사는 덕에 나는 저주받은 운명을 기꺼이 수용하는 시지프가 되었으나, 

나는 시지프의 깊은 수면 시간이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운명을 받아들인 댓가가 생활의 좀비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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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는 조용하게 책을 읽거나 영화를 한 편 보거나 하는 편이다. 어제는 수요일이었지만 연휴 전날이었고 나는 4일=96시간 동안 독서에 압사당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독자의 독서능력을 200% 신뢰한 시절에 걱정 없이 써 내려간 장편 소설을 읽기로 계획했다. 

여기저기서 채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채식을 하기엔 몸이 너무 부실한 나는 일부러 소의 살코기를 구입해서 가볍게 구워 간소한 저녁상을 차렸다. 구운 소고기, 참기름소금장, 마늘종멸치볶음, 구운 김+간장, 심심한 북엇국 그리고 잡곡밥. 가난한 사람이 소비에 실패하면 안 돼 듯, 소화액이 부족한 나는 남들처럼 건강식도 먹고 불량식품도 먹고 할 상황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소중한 한 끼를 먹고 있는데, 남동생놈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단하게 끝이 날 줄 알았던 전화는 3시간을 조금 못 채우고 끝이 났다.

3시간의 대화를 간단히 요약하면 결혼 준비는 순조롭다, 그 누구도 자신의 결혼 준비에 훈수 두지 않아서 너무 편하다. 주로는 이런 식이라고 했다. 

-신혼집은 어디에?

-OO에 OO입니다.

-대출은 얼마나?

-대출 없다

라고 하면 대화가 끝이 난다고 했다.

-혼수(가전제품 등 잡다한 것들)는 어디서?

-더 현대에서 다 샀다

라고 하면 대화가 끝이 난다고 했다.

만인의 재무상태에 조언을 주고자 하는 여동생의 남편마저도 "아, 거기 좋지." 한 마디 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고. 


뭐라고 입댈 여지가 없는, 훈수 둘 게 없는, 잔소리할 부분이 없는.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내가 살면서 명절에 친척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듣지 않은 이유.

내가 살면서 직장의 오지라퍼 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듣지 않은 이유.


책을 읽을 소중한 3시간을 전화통화에 3시간이나 낭비했으나 인생의 의문 1가지를 해결했기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사람들이 참 못난 것이 자신보다 처지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비수를 꽂는다.

반면 축하를 해줘야 하는 상황에는 입을 닫는다.

어렸을 때는 왜 사람들은 나에게 축하를 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봐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상황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100% 무심한 

자기칭찬에 능한 인간이 되었다. (<달과 6펜스> 주인공처럼)


내가 취업시험에 합격했을 때 너는 머리도 좋고 운도 좋다 그 말이 내가 들은 최고의 축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한 것 같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못난 사람들은 나를 보면 늘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발생하는 나쁜 일에 대한 뉴스거리만 질문했다.

부동산 좀비들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나면 내 앞에서는 부동산 얘기를 거의 안 한다.

사람들이 서로의 대출금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빚이 없다"라고 하고

주식 얘기에도 "아,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 주식할 시간에 책 읽어요." 라고 하니

얼마나 재수가 없겠는가!!!!!

로고플레이가 없는 주얼리를 누가 물어보면 "예쁘죠? 기분전환으로 샀어요." "이런 건 어디에 사요?" "아... 이건 디올이요." "비싸겠네요." "아, 뭐... 난 영어유치원 보낼 자녀가 없어서;;;;" 뭐 이런 식이 되어 버린다.


내가 내 얘기를 하면 전부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지."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나는 점점 홀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게 된다. 


내 인생의 치수 4대강사업, 내 인생의 수도이전 베르사유 궁전,  내 인생의 국방 만리장성, 인생의 무덤 피라미드.

내가 집을 지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많은 축하를 해 줄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경기도 오산.

사람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늘 그게 좀 미스터리였는데 이번에 동생이 신혼집 구한 얘길 듣고 

의문이 완벽히 해소되었다.


못난 사람들.


ps. 지금 읽는 책은 최근 출판된 <특성없는 남자> 전집이다. 

내가 책을 사는 건 넓은 집을 소유했기 때문이고, 

내가 책을 읽을 여유가 되는 건 팔자가 편해서라고 한다. 

하하.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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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1. 귀인1

4월에는 내 인생의 귀인 2명 중 1명을 만났다. 그가 사는 곳은 내가 다니는 회사와 도보로 500미터 거리에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장작 11개월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저토록 선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던 그는 결혼과 시모와의 불화, 아파트 구매로 인해서 다소 선의 빛을 잃은 듯했다. 그는 내가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것은 1년 사이에 발생한 일은 아니다. 단지 지난 1년 사이에 완료되었을 뿐... 나의 경우 멸시라기 보단 체념을  통한 운명에의 적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니까 나는 노동자로서의 생애를 즐기게 된 것이다. 남들은 다 힘들다고 하는 장거리 출퇴근길마저도 나에게는 하루를 완성해주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나는 각 구간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 구간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특정 구간 약 5km는 시속 130이 가능한 리버뷰가 펼쳐지는 곳이라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구간이다. 


출근을 왜 일찍 하냐는 질문에도 5시 30분에 일어나나 6시 30분에 일어나나 나에게는 아침에 일어나는 건 똑같은 의미라서 그냥 일찍 일어나서 일찍 오는 거라고 답하곤 한다. 정말이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는 기피업무를 하는 중임에도 사실 나는 이게 힘든지 전혀 못 느끼고 있다. 오히려 일이 너무 쉽고 간단하면 시시해서 능률이 떨어진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뭘 해도 다 슥슥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위가 계속해서 굴러떨어져서 내일도 모레도 날이면 날마다 바위를 굴려 산을 올라가는 일상이 유지되는 것 딱 그 하나다. 그렇기에 나는 파이어족에는 관심이 1도 없다. 미도리의 개근상(소설 <상실의 시대> 참고)이 중요하다. 건강하게 매일매일 출근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만이 삶의 목표다. 무질서, 무계획 같은 걸 싫어하는 성향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실현되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것이 내가 일을 하는 즐거움이다. 


한 번은 여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는 명품 사려고 일하러 다니는 거 아니야?"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이 "뭐 그런 사람이 다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통장에 돈이 남아돌아서 사는 거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우울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일하는 이유와 내가 하는 소비들을 이해 못 하는 건 당연하다.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다. 



2. 귀인2

내 인생의 귀인 2명 중 나머지 1명은 남동생이다. 현실남매라는 말도 있지만 남동생과 나는 매우 친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내가 거의 키우다시피 해서(유아기부터 취업까지 다 보조해줬기에) 여동생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게 사실인데, 소비에 관한 성향이 비슷해서 더 친해졌다. 


몇 달째 신혼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남동생은 서울의 때로 더러워져 있었다. 절대반지를 쫓는 골룸이 되어 있었다.  다 필요 없고 남들이 알아봐 주는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했다. 포르쉐고 명품이고 다 필요없고 그 아파트 스티커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게 그렇게 중요해졌나? 서울 가더니 자존감이 많이 낮아짓네. 나는 그런 마음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남들이 알아봐 주는 거 말고 니가 살고 싶은 집은 어떤 거?

-역세권 새 아파트.

-그러니까 남들이 다 알아봐주는 신축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거잖아, 이 미친놈아! 거기 살면 행복할 거 같나? 서울살이의 시름이 다 해소될 거 같나?

-당연하지!!

-그래, 돈 보태줄게. 부뚜막의 소금은 집어넣어야 짜고, 통장의 돈은 써야 의미가 있지. 타이칸 풀옵셥 계약하려고 했는데, 그거야 또 돈 모아서 사면되지, 하나뿐인 막둥이가 고작 아파트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는데 큰누부가 양보해야지. 


내가 포르쉐 사는 것보다는 남동생이 좋은 집에 사는 게 내가 더 행복할 거 같아서 도움을 준 것. 아니 어쩌면 내 부모를 무시하고 싶었는지도. 누나인 내가 남동생에게 베푸는 선의 정도를 내 부모는 자식인 나에게 베푸는 것이 그다지도 어려웠던 걸까? 아직도 어려운가? 단순히 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그 돈을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사는 게 그토록 행복한 일인가? 토지(입지)에 필요 이상의 가치를 두고, 전국 어디나 똑같은 구조와 똑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브랜드 아파트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지불하면서, 그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사는 게 행복이고 자존감인가??


내가 남동생에게 선뜻 돈을 보태준 또 다른 이유는 남동생은 내 요구사항을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싫은 기색도 없이 생색도 내지 않고. 예를 들면 남동생은 내가 서울에 가면 휴가를 내서 공항픽업을 해주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것도 여러 번. 심지어는 내가 부산에 없는 매장들을 가고 싶어 했을 때 무려 하루에 3개의 백화점 투어에 기사 노릇을 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색도 내지 않는다.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잘 해주는 사이를 원하는데,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들, 애인이든.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내 부모처럼.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은 다 제거했고, 결과적으론 귀인 2명 말고는 요즘엔 딱히 친한 사람이 없다. 



3. 종심소욕불유구

나는 일중독자도 아니고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저 미도리의 개근상처럼 일에게 지기 싫어서 버텼을 뿐인데 엄청난 근속을 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일에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심지어는 모두가 힘들어서 절레절레하는 업무마저도 나는 다른 업무처럼 대수롭지 않게 슥슥 처리하는 업무의 달인이 되었다. 앞으로도 건강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부동산(주로는 아파트)과 자산 증식에 아무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쓸 돈이 부족하지 않고, 내가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돈이 남아서 저축도 할 수 있다. 급여를 받고 생활비를 쓰고 남는 건 그냥 통장에 두고 필요 이상으로 잔액이 많으면 백화점 가서 작고 비싼 것 위주로 산다. 이런 소비생활을 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이 신혼집을 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누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내가 자고 싶은 만큼 자더라도 늦잠 자지 않으며,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살찌지 않으며, 내가 갖고 싶은 걸 사도 가난하지 않으며, 내가 일 하고 싶은 만큼 일해도 업무를 못하지도 번아웃이 오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2022년 식 종심이 아닐까 싶다. 공자가 70세에 깨달았다는 것을 나는 벌써 깨달았으니 인생 영재로다!


4.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갖고 싶어하는 걸 욕망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런 점에서 즐겁다. 물론 인생은 그 자체로 고통이자 통증이나 나는 이것에도 완전히 익숙해져버렸다. 내일도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내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지프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반출생주의자인 내가 그 누구보다 이승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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