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에는 조용하게 책을 읽거나 영화를 한 편 보거나 하는 편이다. 어제는 수요일이었지만 연휴 전날이었고 나는 4일=96시간 동안 독서에 압사당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독자의 독서능력을 200% 신뢰한 시절에 걱정 없이 써 내려간 장편 소설을 읽기로 계획했다. 

여기저기서 채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채식을 하기엔 몸이 너무 부실한 나는 일부러 소의 살코기를 구입해서 가볍게 구워 간소한 저녁상을 차렸다. 구운 소고기, 참기름소금장, 마늘종멸치볶음, 구운 김+간장, 심심한 북엇국 그리고 잡곡밥. 가난한 사람이 소비에 실패하면 안 돼 듯, 소화액이 부족한 나는 남들처럼 건강식도 먹고 불량식품도 먹고 할 상황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소중한 한 끼를 먹고 있는데, 남동생놈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단하게 끝이 날 줄 알았던 전화는 3시간을 조금 못 채우고 끝이 났다.

3시간의 대화를 간단히 요약하면 결혼 준비는 순조롭다, 그 누구도 자신의 결혼 준비에 훈수 두지 않아서 너무 편하다. 주로는 이런 식이라고 했다. 

-신혼집은 어디에?

-OO에 OO입니다.

-대출은 얼마나?

-대출 없다

라고 하면 대화가 끝이 난다고 했다.

-혼수(가전제품 등 잡다한 것들)는 어디서?

-더 현대에서 다 샀다

라고 하면 대화가 끝이 난다고 했다.

만인의 재무상태에 조언을 주고자 하는 여동생의 남편마저도 "아, 거기 좋지." 한 마디 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고. 


뭐라고 입댈 여지가 없는, 훈수 둘 게 없는, 잔소리할 부분이 없는.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내가 살면서 명절에 친척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듣지 않은 이유.

내가 살면서 직장의 오지라퍼 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듣지 않은 이유.


책을 읽을 소중한 3시간을 전화통화에 3시간이나 낭비했으나 인생의 의문 1가지를 해결했기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사람들이 참 못난 것이 자신보다 처지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비수를 꽂는다.

반면 축하를 해줘야 하는 상황에는 입을 닫는다.

어렸을 때는 왜 사람들은 나에게 축하를 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봐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상황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100% 무심한 

자기칭찬에 능한 인간이 되었다. (<달과 6펜스> 주인공처럼)


내가 취업시험에 합격했을 때 너는 머리도 좋고 운도 좋다 그 말이 내가 들은 최고의 축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한 것 같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못난 사람들은 나를 보면 늘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발생하는 나쁜 일에 대한 뉴스거리만 질문했다.

부동산 좀비들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나면 내 앞에서는 부동산 얘기를 거의 안 한다.

사람들이 서로의 대출금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빚이 없다"라고 하고

주식 얘기에도 "아,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 주식할 시간에 책 읽어요." 라고 하니

얼마나 재수가 없겠는가!!!!!

로고플레이가 없는 주얼리를 누가 물어보면 "예쁘죠? 기분전환으로 샀어요." "이런 건 어디에 사요?" "아... 이건 디올이요." "비싸겠네요." "아, 뭐... 난 영어유치원 보낼 자녀가 없어서;;;;" 뭐 이런 식이 되어 버린다.


내가 내 얘기를 하면 전부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지."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나는 점점 홀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게 된다. 


내 인생의 치수 4대강사업, 내 인생의 수도이전 베르사유 궁전,  내 인생의 국방 만리장성, 인생의 무덤 피라미드.

내가 집을 지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많은 축하를 해 줄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경기도 오산.

사람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늘 그게 좀 미스터리였는데 이번에 동생이 신혼집 구한 얘길 듣고 

의문이 완벽히 해소되었다.


못난 사람들.


ps. 지금 읽는 책은 최근 출판된 <특성없는 남자> 전집이다. 

내가 책을 사는 건 넓은 집을 소유했기 때문이고, 

내가 책을 읽을 여유가 되는 건 팔자가 편해서라고 한다. 

하하.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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