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이들을 본다. 이번에는 독감, 성홍열, 디프테리아 그러고 낙제와 이별에 대한 끊이지 않는 공포가 이어진다. 대여섯 명의 귀염둥이들 가운데서 아마도 하나가 죽을 것이다.
잿빛 배경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남편과 아내는 한날한시에 죽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한 사람을 보내고 나서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넬리는 남편이 죽어 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불행으로 비쳤다. 그녀는 관과 양초들과 교회 일꾼을, 심지어 장의사가 무덤 속에 남겨 놓은 발자국을 본다.
"왜 이래야 되지? 무엇 때문에?"
그녀는 죽은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묻는다.
그러자 남편과 지냈던 이전의 모든 생활은 단지 이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불필요한 서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 / 안톤 체호프>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염창희의 전 여친인 예린은 "요즘 누가 애인이라는 말을 쓰냐?" 라고 하면서 염창희에게 "너 정말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워!" 라고 발악을 하며 이별식을 치른다. 하지만 나는 예린과 달리 여친 남친, 아내 남편, 딸 아들 같은 말이 성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단어보다는 애인이나 배우자, 자녀(자녀를 한 단어로 생각했을 때 성별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은 말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애인을 애인이라 칭하겠다.
애인과 함께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다녀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어울리는 책이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가 않아서 대충 3권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 3권은 박상영 신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 일본 추리물 1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음사 <체호프 단편선>(내가 읽은 체호프 단편집은 열린책들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유일)이다. 첫날 밤에 3권을 조금씩 뒤적여 본 후 내가 고른 책은 체호프. 요즘 내 기분에 딱이었다!! 3박 내내 나는 무작위 순서로 단편들을 읽었다. 위에 인용한 <거울>은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했다.
나도 염창희의 엑스 애인 예린처럼 소리 지르고 싶다. "요즘 누가 태어남을 선택하냐? 진짜 구질스러워!!!!!!!!!!!!!!" 라고. 이 모든 생활(삶, 인생)이 단지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질주하는 거라면 굳이 왜 태어나야만 하는가? 왜 태어나서 살아내어야만 하는가? 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올 때까지 불안해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 내가 죽음 쪽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인가? 사고사, 병사, 자연사 중 한 가지가 나에게 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만 하는 건가? 왜 자살(장 아메리 식으로 말하면 자유 죽음)은 허용하지 않는가? 왜 이 세상의 윤리와 과학과 의학은 자살하는 사람이 지독히도 고통스럽게 죽게 방임하는 걸까? 이것은 야만!!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이 구질구질한 것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살고 싶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일몰이 끝내준다는 숙소의 테라스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바다와 드문드문 작은 섬과 일몰을 보면서 '이런 걸 경험하는 게 태어나서 살아내야 하는 걸 강제당하는 걸 정당화할 순 없어.' 라는 생각에 부들거렸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주고 제일 잘 이해해주는 애인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한없이 부족하고 분통이 터진다.
-니가 하는 얘기는 역시 어려워.
-내가 설명을 어렵게 했어?
-아니 이해는 했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염세주의는 일시정지하고 산책 나가자.
'내가 왜 굳이 이런 걸 경험해야 하지? 이런 것까지 체험하고 죽어야 하는 거야? 조물주 새끼가 있다면 진짜 돈 놈이거나 진짜 악취미야,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끝내주는 일몰을 보는 그 알량한 체험이 삶을 정당화할 수 있나? 만성피로, 노화, 인간관계에서 오는 실망과 스트레스, 지병과 질병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독한 병. 그거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그냥 그날의 쓰레기를 치우면서 산다. 그들은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의심도 없다. 다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살며, 죽음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태어난 유일한 이유는 한 번 죽어 보려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과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거 같다. 그 과정의 러닝타임이 1초든 93년이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죽음체험!
감옥에 갇힌 죄수에 비유하면 되려나... 감옥에 갇힌 죄수의 유일한 목적은 석방이다. 감옥에서의 삶이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다고 해도 그는 석방을 택할 것이다. 더 정확히는 석방 날짜가 없다면 수감 기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도 가석방의 행운에 기대어 수감생활을 버틸 것이다.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 상태의 죄수가 감옥에서 버틴다면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30살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갇혔다면 과연 그 사람은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세상과 삶에 갇힌 기분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 기분이다. 영문도 모른 채 감금당해서 매일 만두만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기분이다.
이 세상이 지껄여대는 소확행도 이젠 지겹다. 그냥 소확이다. 행은 없다. 이것 역시도 비유하자면 스파크 100대 있는 것보다는 그냥 롤스로이스 1대 있는 걸 바란다는 말. h&m 옷 천 벌보다는 그냥 디올 바 자켓 1벌이 낫다는 말. 같은 금제품이라도 귀금속 상가의 카피 제품 수 십 개보다 그냥 명품 하이 주얼리 한 두 개가 좋다는 말. 시시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한 방이 있는 짧은 삶이 더 낫다. 예를 들면 에이미 와인하우스!
오래 사는 것, 소확행 같은 걸 찬양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조차 없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일 뿐!
이런 내 심정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안다. 애인의 이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내 심정을 다 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어쩌다 가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 죽은 사람들을 발견할 뿐이다. 결핵으로 인해 만 44세에 사망한 체홉은 어떤 기분으로 구차한 생을 버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