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는 죽음에 품위가 있고 없음에 계급의 영향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미술품 컬렉터인 앙드레는 자신이 단순히 부유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귀족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에 늘 자부심을 안고 살아왔는데요. 그래서 이 남자는 끝까지 죽음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문해서 얻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할 수도 있는 태도를 앙드레가 보일 수 있는 건 그에게는 떠날 날을 정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그냥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씨네21 김혜리 트위터 스페이스, 김혜리의 랑데부: 프랑스아 오종 감독의 '다 잘된 거야'>



피지 워터를 회사로 배달시켰다. 남은 생은 피지 워터만 마실 생각이다, 적어도 회사에서만은. 나에겐 3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에비앙, 볼빅, 피지 워터. 피지 워터를 고른 이유는 패키지가 예쁘고, 큰 차이는 아니지만 셋 중에 제일 비쌌기 때문이다. 미네랄 함량도 제일 높다고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생수병 쓰레기가 싫어서 생수를 최대한 피하는 삶을 살아왔다. 외출할 때도 물병에 물을 담아갔고, 출근할 때는 물 부족 국가의 소녀처럼 거대한 보온병에 물을 담아 갔다(회사 정수기 불신, 회사가 있는 곳의 상수원 불신). 보온병만 들고 다닌 건 아니다. 매일 투명 유리컵을 전용 누빔 주머니에 담아서 들고 다녔다. 왜냐 나는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도 싫어하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화장실의 핸드 페이퍼가 싫어서 마리메꼬에서 핸드타월을 10장 정도 사서 그것을 하루에 1장씩 사용했다. 이것도 출퇴근 짐이다. 또한 스마트폰 화면을 주시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양장 다이어리도 매일 들고 다닌다. 여하튼 짐이 많다. 이것들을 나는 작지만 두꺼운 쇼핑백 2개에 나누어 담아서 매일 들고 다닌다. 그러니 따로 탑핸들 핸드백을 들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내 몸은 매일 병들어 가고 있다. 검사를 할 때마다 각종 수치들이 악화일로다. 의사는 나를 인간 체르노빌로 만들 작정인 듯하고, 나는 꼭 그래야만 합니까?라고 반문만 하고 있다. 이 가련한 전교 1등 소년에게 내가 "내가 치료받지 않고 버티다가 안락사 말고는 방법이 없을 때까지 버티면 안락사 인증해 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이 샌님같이 생긴 의사놈은 뭐라고 할까? 


배를 가르고 썩어버린 장기 일부를 제거한 후, 제거된 장기를 보완해줄 알약을 먹으면서, 삶의 질이 바닥을 친 상태로, 굳이 그렇게까지 내가 살아야 하나?


난 싫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내 말을 듣는 부모, 동생, 애인, 회사 동료들은 다들 동공이 흔들린다. 그 표정은 맹수를 발견한 초식동물과 같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렵고 두려운 표정. 그 표정이 정말 싫다. 그들이 사랑해 마다하지 않는 소중한 삶과 목숨이라는 것을 나는 단물 빠진 껌을 뱉듯이 뱉어 버리려고 하니까. 


추석 연휴에 <다 잘된 거야>를 봤다. 안락사에 몰두해 있는 내가 이 영화를 놓칠 리가 없지. 그리고 약간 좌절했다. 프랑스 마저도 안락사가 쉽지 않았다. 안락사는 현대의 생명윤리에 어긋난 패륜인 것이다. 나에게 안락사는 인간 존엄의 최고점이데!!!!!!!!!!


태어나는 건 내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죽는 것만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나에겐 그 기회가 왔다. 죽는 것, 안락사, 생명윤리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해서 나는 이미 내가 죽었고, 지금 이 순간도 그저 꿈의 일부인 듯 하다.


더 병든 인간이 되기 전에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은 의욕이 있을 때, 사치를 하자, 사치가 하고 싶어졌다. 무엇을 해야 가장 사치스러울까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론은 비싼 물, 탑핸들백과 가뿐한 걸음, 무용한 독서(예를 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같은 책을 꼭꼭 씹어 읽는 것)였다. 


어제 오후에도 업무는 대충 미뤄두고 피지 워터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회사에서 빌린 <달까지 가자>를 읽다가 퇴근했다. 띠어리 가을 신상 실크 블라우스와 디올 가을 신상 미챠 스카프를 한 채로 한쪽 팔에는 레이디백을 걸치고.  


앞으로 남은 생은 한쪽 팔에 우아하게 레이디백만을 건 채로 가뿐하게 걷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 이럴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남았을까 싶다. 얼마 안 남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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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능력의 한계가 좁은 사람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서거나 운이 따라준다고 해도, 그를 절반은 동물인 평범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총량 이상으로 데리고 가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중략) 사실 가장 고상하고 가장 풍요로우며 가장 오랫동안 이어지는 쾌락은 특히 타고난 지적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우리가 가진 개성에 따라, 행복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운명만을,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보여주는 것만을 고려한다. 운명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천국에서 천상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은 끝까지 어리석을 것이고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남을 것이다.


쾌락의 풍요로움, 심지어 성적 쾌락의 풍요로움도 지성에 달려 있으며, 지성 그 자치의 힘에 비례한다. 안타깝게도,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 / 미셸 우엘벡>


도대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 더 구체적으로는 지적 행복은 뭘까? 나는 인간의 육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여기기에 육체를 가진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또한 행복과 지적 능력이 무슨 큰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바에 따르면 대체로 사고력이 낮고 단순한 기질의 사람들이 매사에 행복했(해보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평범한 사람은 자연이 매일 수천 가지로 만들어 내는 제조품과 같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고찰(이것이 참된 정관이지만)은 오래 계속할 수 없다. 그가 사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은 그 사물이 간접적으로라도 그가 가진 의향에 어떤 관계를 갖는 한도 안에서만 그렇다. 언제나 관계들의 인식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는 사물의 추상 개념이 있으면 충분하다. 또 대개의 경우 그 편이 한층 더 효력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단순한 직관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게으른 자가 의자를 찾는 것처럼 자기에게 나타는 모든 것 가운데 개념만을 급히 찾아 다닌다. 또한 언제까지나 하나의 대상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을 얻으면 곧 그 사물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은 예술 작품, 아름다운 자연, 여기저기서 깊은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인생의 여러 모습 등을 접해도 곧 결정을 내린다. 그는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자기가 걷는 인생의 길뿐이며, 무른 자기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넓은 의미로 말해 지형 측량으로 메모하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고찰 같은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천재의 인식력을 우세하기 때문에, 사물을 다른 것과의 관게에서가 아니라 그 사물의 이데아를 파악하려 한다. 이것이 지나쳐서 이따금 그는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등한시하며 대개 실생활에 서투르다.

평범한 사람에게 인식 능력은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지만, 천재에게는 세계를 비추는 태양이다. (중략) 따라서 '천재적인 표정'은 의욕보다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우세하고, 의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식, 즉 '순수 인식'이 거기에 나타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쇼페하우어>


천재에게 인식이란, 지속 가능한 행복(즐거움)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같은 류의 행복(즐거움)이라는 걸까?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이 수학경시반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번번이 행복과 지능의 상관관계를 운운하는 것일까? 세상이 수학경시반이라면 수학 논리 지능이 높은 사람이 행복하겠으나, 이 세상이 그저 거대한 유치원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반대로 지능이 낮을수록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나에게 이 세상은 거대한 특수학교 또는 하염없이 뽀로로나 방영하는 유아채널이다. 


사람들은 주택대출금 이자, 자식,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 마이너스통장, 명절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앞에 나열한 저 모든 것에 해당사항이 없는 나는 취업이라는 것을 한 이후로 그 어떤 변주도 없는 저 이야기를 십 수년째 들어주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하루종일 뽀로로를 보는 게 낫겠다 싶은 심정.


지능이 높을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나는 반대한다. 이 세상은 지능이 낮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더 많다. 2022년의 이 세상을 쇼펜하우어가 봤다면 아마도 내 말에 동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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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년, 아니 3만 년을 산다 하더라도 잃는 것은 현재 영위하는 그 삶이라는 것과, 당신이 잃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말은 아무리 오래 산 삶이나 낳자마자 곧바로 죽은 삶이나 결국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드디어 9월이다. 마스크를 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인생의 사소한 기대들도 미련 없이 다 버리는 중이다. 어제 죽었어도 아쉽지 않고, 내일 죽어도 상관없다. 


다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웰빙이든 리치든) 궁리하는 때에 내 머릿속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죽기 전에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과정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마르쿠스, 당신과 나는 죽음에 대한 견해는 같으나 신에 대한 견해는 다르군요. 신은 없고요, 신의 은총과 섭리도 없답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낳을까? 왜 태어나야 할까? 이건 마치 내일 새벽부터 쎈 태풍이 온다는데 퇴근 후 저녁에 셀프 세차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어리석다. 일주일 뒤에 철거할 건물을 청소업체에 대청소 서비스를 신청하는 것처럼 어리다. 더러운 옷을 드라이클리닝 한 후 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눈을 감고 '나는 ##을 당할(겪을) 운명(팔자)인가? 아니, 다 잘 될 것이다, 만사는 형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경우이고,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는 아예 희망을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내 바람대로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그것을 다이어리에 쓰고, 이렇게 되더라도 받아들이자,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다, 망해도 상관없고 실망이 바닥을 쳐도 상관없다라고 마지막 문장을 단정히 쓰는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망해도 된다, 죽어도 된다라고 생각하니 만성 변비가 해결된 기분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과 행복을 성취한 사람으로 타인의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받는 것보다 누가 봐도 불운한 운명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과 팔자를 짊어지고 덤덤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닌 사람으로 타인의 시기와 질투를 받고 싶다. 분명히 쟤는 불행해야 하는데 왜 나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다. 굳이 시기와 질투를 받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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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과연 태어나는 것은 옳으냐?그리고 만약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리고 고통이 있잖아요 삶에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데.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팟캐스트 책읽아웃 263-2화 김영하 편>


책읽아웃에서 오은 시인이 진행하는 것은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은 시인의 억양과 음색이 불편해서이다. 소설가 김영하가 신작 작별인사를 발표했고, 오은 시인이 진행하는 책읽아웃에 출연했으나, 나는 한때 나의 최애 소설가였던 김영하도 그렇고 그런 한국의 중년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팬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김영하 편 에피소드를 두 달이 넘도록 다운로드만 해둔 상태였다. 왠지 어제는 마음이 내켜서 방학 마지막 날까지 미뤄둔 방학 숙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듣다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한 명 더 만난 것에 위안을 얻었다.  


김영하의 입에서 데이비드 베너타가 나올 줄이야!!!!!!!!!!!!!!!!


나는 정말 진지하게 나 자신의 안락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좋아하는 알라딘 서재에 스위스 여행기가 있는데 차마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근미래에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안락사의 방식으로 생을 끝낼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이성이고 존엄이며 문명이고 과학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감당하면서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후손들은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어느 시점이 되면 태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모든 인류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인류는 멸종할거라고 나는 믿는다. 


태훈: 전 이상하게 아장아장 걷는 애들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30년 후에 쟨 어떤 짐을 짊어지고 살아갈까? 어떤 모욕을 견디며 살아갈까? 나니까 견뎠지. 저 애는, 그 어떤 애도 그런 일은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유림이가 있어서 좋았고 내 인생에 유림이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 하지만. 난 태어나서 좋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아니요. 그래서 기정씨가 임신 아니라고 했을 때 불쑥 다행이란 말이 튀어나온 거 같아요.

<나의 해방일지 16화>


나의 해방일지 보다가 저 대사를 듣고는 놀라 자빠질 뻔 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저런 대사가? 저런 말은 나 같은 인간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태훈 같은 사람이?? 


갑오개혁 단발령을 반대하던 때에서 약 100년 남짓의 시간이 지난 후 2022년 드디어 한국 드라마에서 태어남을 부정하는 대사까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의 가속화를 생각했을 때 20-30년 즉 한 세대 정도만 버티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번식하지 않을 것이고, 태어난 인간들은 자연사나 병사 대신 안락사를 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승주의자이며 번식주의자 나의 부에게 "내가 왜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치료받으면서 까지 살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병원 안 갈 거고, 그냥 죽을 건데.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사는 게 즐겁지도 않고. 나랑 말이 통하는 사람 한 명 없고, 솔직히 주변에 죄다 바보들 뿐이고, 내 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다들 나한테 그러지. 너는 잘하잖아. 니가 좀 이해해줘. 다들 나한테 부탁만 한다고. 내가 봉사 노예야? 내가 나보다 못한 인간들 뒤치다꺼리해주려고 계속 살아야 해?"라고 말했다. 


나의 안락사로 인해서 남은 여생을 슬퍼할 가족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안락사를 포기해야 하나? 내가 왜? 슬픔은 각자의 몫. 당신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가요, 아니면 나라를 존재를 상실한 당신 자신을 연민하는 건가요? 아마도 후자겠지. 


사는 게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오래오래 살아라. 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살고 싶진 않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면 나는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좋은 아빠와 같이 살아야지 하고 생각을 했다, 부모가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최대한 빨리 경제적 독립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 자신을 스스로 먹여 살리는 게 제일 중요했다. 부모란 사람들이 나를 평온하게 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타인이 나를 평온하게 해 줄 거라는 기대가 1도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 내가 나에게 평온을 주자, 내가 나에게 잘해주자, 내 결핍과 욕구는 내가 채워주자 라는 마음으로 여태 살고 있고, 다행히도 나는 유능해서 스스로에게 잘해주고 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한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나 자신이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안락사가 있는데 왜 굳이? 마취와 진통제가 있는데 그걸 거부하고 고통을 이겨보겠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마취와 진통제가 당연한 의학적 처치라면 나에게는 같은 이유로 안락사 또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의학적 처치라고 생각한다. 


1968년생 김영하 씨도 나보다 늦게 깨닫는 것도 있구나. 나는 역시 인생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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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이들을 본다. 이번에는 독감, 성홍열, 디프테리아 그러고 낙제와 이별에 대한 끊이지 않는 공포가 이어진다. 대여섯 명의 귀염둥이들 가운데서 아마도 하나가 죽을 것이다.

잿빛 배경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남편과 아내는 한날한시에 죽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한 사람을 보내고 나서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넬리는 남편이 죽어 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불행으로 비쳤다. 그녀는 관과 양초들과 교회 일꾼을, 심지어 장의사가 무덤 속에 남겨 놓은 발자국을 본다. 

"왜 이래야 되지? 무엇 때문에?"

그녀는 죽은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묻는다.

그러자 남편과 지냈던 이전의 모든 생활은 단지 이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불필요한 서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 / 안톤 체호프>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염창희의 전 여친인 예린은 "요즘 누가 애인이라는 말을 쓰냐?" 라고 하면서 염창희에게 "너 정말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워!" 라고 발악을 하며 이별식을 치른다. 하지만 나는 예린과 달리 여친 남친, 아내 남편, 딸 아들 같은 말이 성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단어보다는 애인이나 배우자, 자녀(자녀를 한 단어로 생각했을 때 성별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은 말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애인을 애인이라 칭하겠다.


애인과 함께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다녀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어울리는 책이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가 않아서 대충 3권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 3권은 박상영 신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 일본 추리물 1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음사 <체호프 단편선>(내가 읽은 체호프 단편집은 열린책들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유일)이다. 첫날 밤에 3권을 조금씩 뒤적여 본 후 내가 고른 책은 체호프. 요즘 내 기분에 딱이었다!! 3박 내내 나는 무작위 순서로 단편들을 읽었다. 위에 인용한 <거울>은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했다.


나도 염창희의 엑스 애인 예린처럼 소리 지르고 싶다. "요즘 누가 태어남을 선택하냐? 진짜 구질스러워!!!!!!!!!!!!!!" 라고. 이 모든 생활(삶, 인생)이 단지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질주하는 거라면 굳이 왜 태어나야만 하는가? 왜 태어나서 살아내어야만 하는가? 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올 때까지 불안해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 내가 죽음 쪽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인가? 사고사, 병사, 자연사 중 한 가지가 나에게 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만 하는 건가? 왜 자살(장 아메리 식으로 말하면 자유 죽음)은 허용하지 않는가? 왜 이 세상의 윤리와 과학과 의학은 자살하는 사람이 지독히도 고통스럽게 죽게 방임하는 걸까? 이것은 야만!!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이 구질구질한 것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살고 싶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일몰이 끝내준다는 숙소의 테라스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바다와 드문드문 작은 섬과 일몰을 보면서 '이런 걸 경험하는 게 태어나서 살아내야 하는 걸 강제당하는 걸 정당화할 순 없어.' 라는 생각에 부들거렸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주고 제일 잘 이해해주는 애인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한없이 부족하고 분통이 터진다. 

-니가 하는 얘기는 역시 어려워.

-내가 설명을 어렵게 했어?

-아니 이해는 했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염세주의는 일시정지하고 산책 나가자.


'내가 왜 굳이 이런 걸 경험해야 하지? 이런 것까지 체험하고 죽어야 하는 거야? 조물주 새끼가 있다면 진짜 돈 놈이거나 진짜 악취미야,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끝내주는 일몰을 보는 그 알량한 체험이 삶을 정당화할 수 있나? 만성피로, 노화, 인간관계에서 오는 실망과 스트레스, 지병과 질병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독한 병. 그거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그냥 그날의 쓰레기를 치우면서 산다. 그들은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의심도 없다. 다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살며, 죽음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태어난 유일한 이유는 한 번 죽어 보려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과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거 같다. 그 과정의 러닝타임이 1초든 93년이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죽음체험! 


감옥에 갇힌 죄수에 비유하면 되려나... 감옥에 갇힌 죄수의 유일한 목적은 석방이다. 감옥에서의 삶이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다고 해도 그는 석방을 택할 것이다. 더 정확히는 석방 날짜가 없다면 수감 기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도 가석방의 행운에 기대어 수감생활을 버틸 것이다.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 상태의 죄수가 감옥에서 버틴다면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30살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갇혔다면 과연 그 사람은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세상과 삶에 갇힌 기분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 기분이다. 영문도 모른 채 감금당해서 매일 만두만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기분이다. 


이 세상이 지껄여대는 소확행도 이젠 지겹다. 그냥 소확이다. 행은 없다. 이것 역시도 비유하자면 스파크 100대 있는 것보다는 그냥 롤스로이스 1대 있는 걸 바란다는 말. h&m 옷 천 벌보다는 그냥 디올 바 자켓 1벌이 낫다는 말. 같은 금제품이라도 귀금속 상가의 카피 제품 수 십 개보다 그냥 명품 하이 주얼리 한 두 개가 좋다는 말. 시시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한 방이 있는 짧은 삶이 더 낫다. 예를 들면 에이미 와인하우스! 


오래 사는 것, 소확행 같은 걸 찬양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조차 없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일 뿐!


이런 내 심정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안다. 애인의 이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내 심정을 다 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어쩌다 가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 죽은 사람들을 발견할 뿐이다. 결핵으로 인해 만 44세에 사망한 체홉은 어떤 기분으로 구차한 생을 버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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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8-2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젯밤 했던 생각과 비슷해요. 인간은 결국 누구나 죽잖아요. 거기에 이르는 길은 당연한 디폴트처럼 비극적이고. 그런데 이걸 외면하고 사는게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요. 체호프 단편선 읽어봐야겠네요.

먼데이 2022-08-26 14:05   좋아요 1 | URL
민음사 단편집에서는 <거울>, <내기>가 좋았고, 열린책들 단편집에서는 <6호 병동>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이제 남은 생은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할 듯합니다. 솔직히 반평생을 살아보니 사는 건 좀 지겹고 시시해졌습니다. 하루하루 미션 수행에 헉헉 대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겠으나, 저는 그 단계는 미션 클리어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죽음을 자주 많이 생각합니다. 곱셈 나눗셈 클리어했으면 인수분해해야죠. 언제까지 곱셈 나눗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