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1. 귀인1

4월에는 내 인생의 귀인 2명 중 1명을 만났다. 그가 사는 곳은 내가 다니는 회사와 도보로 500미터 거리에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장작 11개월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저토록 선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던 그는 결혼과 시모와의 불화, 아파트 구매로 인해서 다소 선의 빛을 잃은 듯했다. 그는 내가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것은 1년 사이에 발생한 일은 아니다. 단지 지난 1년 사이에 완료되었을 뿐... 나의 경우 멸시라기 보단 체념을  통한 운명에의 적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니까 나는 노동자로서의 생애를 즐기게 된 것이다. 남들은 다 힘들다고 하는 장거리 출퇴근길마저도 나에게는 하루를 완성해주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나는 각 구간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 구간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특정 구간 약 5km는 시속 130이 가능한 리버뷰가 펼쳐지는 곳이라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구간이다. 


출근을 왜 일찍 하냐는 질문에도 5시 30분에 일어나나 6시 30분에 일어나나 나에게는 아침에 일어나는 건 똑같은 의미라서 그냥 일찍 일어나서 일찍 오는 거라고 답하곤 한다. 정말이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는 기피업무를 하는 중임에도 사실 나는 이게 힘든지 전혀 못 느끼고 있다. 오히려 일이 너무 쉽고 간단하면 시시해서 능률이 떨어진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뭘 해도 다 슥슥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위가 계속해서 굴러떨어져서 내일도 모레도 날이면 날마다 바위를 굴려 산을 올라가는 일상이 유지되는 것 딱 그 하나다. 그렇기에 나는 파이어족에는 관심이 1도 없다. 미도리의 개근상(소설 <상실의 시대> 참고)이 중요하다. 건강하게 매일매일 출근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만이 삶의 목표다. 무질서, 무계획 같은 걸 싫어하는 성향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실현되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것이 내가 일을 하는 즐거움이다. 


한 번은 여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는 명품 사려고 일하러 다니는 거 아니야?"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이 "뭐 그런 사람이 다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통장에 돈이 남아돌아서 사는 거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우울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일하는 이유와 내가 하는 소비들을 이해 못 하는 건 당연하다.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다. 



2. 귀인2

내 인생의 귀인 2명 중 나머지 1명은 남동생이다. 현실남매라는 말도 있지만 남동생과 나는 매우 친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내가 거의 키우다시피 해서(유아기부터 취업까지 다 보조해줬기에) 여동생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게 사실인데, 소비에 관한 성향이 비슷해서 더 친해졌다. 


몇 달째 신혼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남동생은 서울의 때로 더러워져 있었다. 절대반지를 쫓는 골룸이 되어 있었다.  다 필요 없고 남들이 알아봐 주는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했다. 포르쉐고 명품이고 다 필요없고 그 아파트 스티커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게 그렇게 중요해졌나? 서울 가더니 자존감이 많이 낮아짓네. 나는 그런 마음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남들이 알아봐 주는 거 말고 니가 살고 싶은 집은 어떤 거?

-역세권 새 아파트.

-그러니까 남들이 다 알아봐주는 신축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거잖아, 이 미친놈아! 거기 살면 행복할 거 같나? 서울살이의 시름이 다 해소될 거 같나?

-당연하지!!

-그래, 돈 보태줄게. 부뚜막의 소금은 집어넣어야 짜고, 통장의 돈은 써야 의미가 있지. 타이칸 풀옵셥 계약하려고 했는데, 그거야 또 돈 모아서 사면되지, 하나뿐인 막둥이가 고작 아파트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는데 큰누부가 양보해야지. 


내가 포르쉐 사는 것보다는 남동생이 좋은 집에 사는 게 내가 더 행복할 거 같아서 도움을 준 것. 아니 어쩌면 내 부모를 무시하고 싶었는지도. 누나인 내가 남동생에게 베푸는 선의 정도를 내 부모는 자식인 나에게 베푸는 것이 그다지도 어려웠던 걸까? 아직도 어려운가? 단순히 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그 돈을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사는 게 그토록 행복한 일인가? 토지(입지)에 필요 이상의 가치를 두고, 전국 어디나 똑같은 구조와 똑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브랜드 아파트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지불하면서, 그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사는 게 행복이고 자존감인가??


내가 남동생에게 선뜻 돈을 보태준 또 다른 이유는 남동생은 내 요구사항을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싫은 기색도 없이 생색도 내지 않고. 예를 들면 남동생은 내가 서울에 가면 휴가를 내서 공항픽업을 해주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것도 여러 번. 심지어는 내가 부산에 없는 매장들을 가고 싶어 했을 때 무려 하루에 3개의 백화점 투어에 기사 노릇을 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색도 내지 않는다.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잘 해주는 사이를 원하는데,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들, 애인이든.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내 부모처럼.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은 다 제거했고, 결과적으론 귀인 2명 말고는 요즘엔 딱히 친한 사람이 없다. 



3. 종심소욕불유구

나는 일중독자도 아니고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저 미도리의 개근상처럼 일에게 지기 싫어서 버텼을 뿐인데 엄청난 근속을 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일에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심지어는 모두가 힘들어서 절레절레하는 업무마저도 나는 다른 업무처럼 대수롭지 않게 슥슥 처리하는 업무의 달인이 되었다. 앞으로도 건강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부동산(주로는 아파트)과 자산 증식에 아무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쓸 돈이 부족하지 않고, 내가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돈이 남아서 저축도 할 수 있다. 급여를 받고 생활비를 쓰고 남는 건 그냥 통장에 두고 필요 이상으로 잔액이 많으면 백화점 가서 작고 비싼 것 위주로 산다. 이런 소비생활을 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이 신혼집을 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누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내가 자고 싶은 만큼 자더라도 늦잠 자지 않으며,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살찌지 않으며, 내가 갖고 싶은 걸 사도 가난하지 않으며, 내가 일 하고 싶은 만큼 일해도 업무를 못하지도 번아웃이 오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2022년 식 종심이 아닐까 싶다. 공자가 70세에 깨달았다는 것을 나는 벌써 깨달았으니 인생 영재로다!


4.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갖고 싶어하는 걸 욕망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런 점에서 즐겁다. 물론 인생은 그 자체로 고통이자 통증이나 나는 이것에도 완전히 익숙해져버렸다. 내일도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내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지프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반출생주의자인 내가 그 누구보다 이승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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