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오지은이 팟캐스트에서 "내가 귀여워서(여성스러워서였나?? 아무튼 여자에게 요구되는 여성스러운  몸가짐과 태도), 누군가 나를 귀여워 할 때마다 1000원씩 입금된다면 귀여움을 고려해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 역시 그와 비슷한 논조로 누군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때마다 내 통장에 1만 원씩 입금된다면 나도 '좋은 사람' 역할에 대해서 조금은 고려해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평판 따위엔 관심 없다. 인기와 평판으로 먹고사는 직업도 아니거니와.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니 사정이고, 내가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니 사정이지. 내가 왜 그거까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나?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편한 사람, 예쁜 사람이면 되는데. 이 서재에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즐거우려고 쓰는 것일 뿐.


나에게는 내 천성이 있고, 나는 내 천성대로 사는 게 편해서 천성대로 산다. 내 천성이 좋지는 않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내가 나를 모시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내가 타인을 위해서 내 천성을 바꾸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타인을 버리고 내 천성을 택하련다.


이런 내가 불편하다면 당신과 나는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지내는 수밖에.



나에게는 사회성 떨어지는 어떤 기질이 있는데,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해서 이 정도 요구(부탁)는 해도 되겠지 하고 요청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하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짜게 식어 버린다는 것이다. 나의 요구나 부탁을 제일 많이 거절한 사람은 당연히 부모다. 그런 부모에게서 양육당할 때 습득한 자기 방어인지 아니면 단순히 천성인지 모르나 여하튼 나는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대치를 낮추는 방식을 택했고, 스스로 욕구를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백아절현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알아주는 나 자신이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 아닌가? 하는 게 내 방식이다. 그래서 <달과 6펜스>(여성주의 관점은 배제하고)의 주제 의식을 좋아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오지은의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라는 노래에 200% 공감한다. '아아, 사랑에 빠진 나 자신' 그런 마음 너무 이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에 원하는 걸 즉각적으로 해줘야지.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이 해 주고 싶은 것만 해준다. 반면 나는 상대방에 원하는 걸 대체로 즉각적으로 해준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에게 그걸 요구한다. 그게 되지 않을 경우 애정이 짜게 식는다. 


예를 들면 나는 몹시 피곤하더라도 공항 픽업을 부탁하면 기꺼이 해준다. 그런데 내가 공항 픽업이 필요할 때 상대방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들어주더라도 생색을 낸다면 마음이 짜게 식는다. 그리고 다시는 공항 픽업 요청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이 정신병자들은 그걸 부탁하지 않는 나를 비난한다. 상대방이 굳이 부탁을 하게 만들어서 생색을 내고 싶어 하는 그 변태성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걸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나도 자식이란 걸 낳아서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라는 헛소리를 자식한테 퍼붓는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쪼로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하면서 살도록. 타인에게 애정을 구걸하지 말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레이버는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자본을 가진 사람이 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이 없는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상품화했지요. 인터넷 시대가 열리고 이런 현상이 급격히 심화되어 요리, 반려동물, 디저트 사진부터 단순히 게임하고 밥을 먹는 영상까지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딸이 취직해서 매일 아침 정장 차림으로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는 모습이 슬프다고 할까요, 가슴 아팠습니다. 내 딸마저 상품화시켜버렸다는 자책감이 든 거겠죠. 그 저변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이 아이를 태어나게 했다는 무력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이랑*이가라시 미키오 /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기 고양이가 10마리쯤은 들어 있을 것 같은 만삭의 고양이가 놀아달라고 뒹구는 걸 보면서 '너는 이 세상에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건지...' 하는 생각을 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아비라는 새끼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자식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 자식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원래 부모라는 사람들은 그러려고 자식 낳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한국의 돈 잘 버는 연예인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짓이기도 하고.(안정환, 장윤정, 김혜수 등등) 


나는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부모-자식(부모)-자식으로 이어지는 저주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  , 제발 그만해. 그만 좀 해. 그만해.'를 외치면서 간신히 다 봤다. 엄마 베브(제이미 아담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돌봐주는 딸 린제이(헤일리 베넷)를 받아들일 수 있나? 이런 영화 만드는 저의가 뭐야? 딸 린제이처럼 부모의 어린 시절 상처를 이해하고 돌봐주라는 말인가? 효녀 심청처럼 아비를 위해서 인당수에 투신자살이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내 부모는 돈이 들지 않는 애정만을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싫었고, 지금도 그 점이 싫다. 아빠를 예로 들면 썰매를 직접 만들어 준다던가 대나무를 잘라서 연 살을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엄마를 예로 들면 치킨, 자장면 같은 걸 요리해 주었다. 심지어 면도 집에서 만들었다. 종이인형을 그려 준다던가 바비인형 옷을 코바늘 뜨기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완구점이나 문구점에서 사고 싶었고, 나는 외식을 하고 싶었다. 동화책도 직접 읽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테이프와 세트로 있는 동화책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주산암산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하자 엄마가 서점에서 주산 문제집과 주판을 사서 직접 가르쳐 주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돈이 낭비되지 않는 애정만 주신다. 간단히 말하면 포르쉐는 절대 안된다는 거다. 아비의 꿈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죽는 것이고, 내가 부모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은 포르쉐(=돈 낭비!!!)다. 

내가 포르쉐를 타면 "OO 씨 요즘 주식 잘 나가나 봐??"라고 누군가 묻겠지.

그러면 나는 "저 주식 안 해요. 이거 아빠가 사준 거예요~~~~~~~~."하고 싶은 거다.


자식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부모에게 "아빠, 나는 아빠가 나한테 포르쉐 사주면 진짜 남은 여생이 너무 행복할 것 같고, 효녀 심청을 능가하는 효녀가 될 거 같아."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포르쉐는 안된다, 돈을 아껴 써야지."라고 한다. 그건 애정이 아니다. 그건 죽어서도 내 자산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로 자식을 활용하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아빠, 나는 아빠가 1원 하나 상속안해줘도 내가 번 돈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지금 통장에 있는 돈도 다 못 쓸 지경이야. 다만 포르쉐는 내 노동으로 번 돈으로는 사기 아깝다는 거야. 하긴 아빠는 내가 내 돈으로 포르쉐 사도 돈 아까워서 와병이 날 사람이지..."


얄궂게도 인간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식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얼마나 힘들 게 살았는지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엄마는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는 말은 염치도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요즘은 "너는 얼마나 좋으냐, 부모가 생활비 달라고 안 해서."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식한테 재산 물려주고 죽는 게 꿈이라면서... 그 꿈 이루려고 나한테 방패연 재료도 사주지 않았으면서. 나는 방패연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빠가 대나무 자르는 솜씨가 없어서 가오리연 밖에 못 만들었어. 그 댓살이 너무 두꺼워서 내 가오리연은 하늘을 날지도 못했어."라고 말하면 나한테 대나무 잘라준 기억이 안 난데, 불리한 건 전부 기억이 안나는 사람. 


그렇기에 내 부모와 동년배인 이가라시 미키오가 이런 세상에 자식을 낳은 게 미안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내 아비는 아직도 사람은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아빠, 남자는 자궁이 없어서 자식을 낳을 수가 없어. 여자한테 정자 하나 제공해놓고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냐?" 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아빠는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박OO과 윤OO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아전인수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지능이 없는 것이다. (이가라시 미키오 역시 남자라서 자식을 낳은 적은 없긴 하지...하지만 같은 책에서 부계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모계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쓴다. 내 말이!!! 남자는 재생산에 정자 하나 기여해놓고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진다. 아주 날강도다.)


고양이 사회는 모계다. 임신한 고양이는 털에 윤기가 엄청나게 돌며 살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홀로 출산을 한다. 주로는 한 번에 5마리 정도 낳는다.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은 급격히 살이 빠진다. 뱃살은 늘어나고 새깨들이 물고 빨고 한 젖은 늘어난다. 쉼 없이 새끼들을 핥아준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느껴지면 어느샌가 거처를 옮겨버린다. 새끼의 목뒷살을 물고 한 마리씩 더 안전한 곳으로 숨긴다. 모유 수유 기간이 끝나면 새끼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믿을 만한 어린이집(내가 사료를 주는 곳)에 맡긴다. 다시 자유냥이가 되어 들로 산으로 사냥을 떠난다. 지금 만삭인 어미 냥이를 볼 때마다 너에게 임출육은 어떤 의미를 가지니?라고 혼자 속으로 묻곤 한다. 사실 나는 아기 고양이들을 볼 때도 '너희들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련만...'하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5마리 중에서 1~2마리는 3개월 안에 죽는다. 야생에서의 삶이 마냥 즐거운 것도 아니다. 생후 12개월이 지나면 번식할 수 있다(해야만 한다). 그것의 무한 반복이다. 그리고 독립도 해야 한다. 한 영역에 어미 냥이는 1마리다. 그것이 대원칙이다. 수컷들은 무조건 독립해서 떠난다. 그것도 대원칙이다. 고양이들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내가 어미 고양이를 중성화 수술 시키고, 남은 고양이들도 모두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다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내가 신도 아닌데 야생 고양이의 재생산에 관여하고 또 그들의 남은 생을 결정(연명치료마저도)하는 것도 하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브리트니의 아비가 브리트니의 후견인이 되어서 한 행동과 지금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큰 차이가 없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아비는 브리트니가 임신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았다. 


모든 고양이에게 후견인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자신의 정서 욕구를 채우고자 독단적으로 후견인이 되어 고양이를 중성화 수술 시키고 좁은 집 안에 가둔다. 숲에 사는 야생 고양이가 얼마나 용맹한지를 보면 절대 그럴 수 없을 텐데... 고양이에게는 캣타워가 아니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진짜 나무가 필요하고, 또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사냥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점에서는 이가라시 미키오도 이랑에게도 실망스러운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고양이를 키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양이 반려는 영화 <고양이와 할아버지>다. 타마는 자유냥이다. 마음대로 외출하고 마음대로 외박도 하고 또 할아버지와 함께 한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버렸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출산이 임박한 어미 냥이에게 사료를 주고 있는 나 자신은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 또한 한다. 어미 냥이는 만 3살이다. 이 어미 냥이가 대모 어미 냥이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따로 또 같이 지내는 고양이다. 예전부터 동생은 고양이 족보를 만들라고 하는데, 나는 진짜 동물을 인간화하는 것에는 질색이라서 절대 그런 거 하지 않는다. 사람 납골당도 극도로 거부하는 나는 동물 납골당을 보면 그냥 인간이 싫어질 뿐이다. 


아는 사람이 많이 없고, 책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서 그런가 나 말고 모계사회를 주장하는 사람은 책과 영화, 인간관계를 통틀어서 이가라시 미키오가 처음이고, 반려동물 현상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직은 나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세상은 거대한 특수학교 또는 영화 <슈퍼배드>의 그루와 그의 추종자인 미니언즈들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타인과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위해 융통성과 자발성을 자주 발휘한다. 상황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경우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계획을 바꾸기 위해 생각하는 능력은 비언어성 학습장애나 아스퍼거 장애 아이의 경우 상당히 형편없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아이들은 일련의 학습된 반응에 의존한다. 그들은 쉽게 한 상황을 다른 상황으로 일반화하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의 규칙에 근거해서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써놓은 마음속 각본(스크립트)에 의거해서만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적절하고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다지 효과 있는 시스템이 아니며, 매일의 삶에서 요구되는 것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실수나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늘어난다. 

<비언어성 학습장애, 아스퍼거 장애 아동을 잘 키우는 방법 / Kathryn Steart>


이런 상황에서 황시목 검사는 자신이 속해 있는 검찰 조직마저 예외를 두지 않고 잘못을 적시하고 개혁하려 든다. 아무런 포상 없이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준법 마니아 황시목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어떤 예외도 두지 않으면서 범법과 비리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할 그런 일을 어떻게 황시목은 해낼까? 그것은 황시목이 '정상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질병과 수술로 인해 주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외톨이가 되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수사 대상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중략)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시민이 할 일은 그런 준법 마니아 혹은 '찐 똘아이'를 발굴해서 그에게 수사 전권을 주면 될 것 같다. 아니, 황시목을 검찰총장으로! 아니, 대통령 후보로!

그러나 <비밀의 숲2>에서 황시목은 전작에 비해 더 큰 수사 권력을 누리지만 끝내 아주 만족할 만한 개혁에는 이르지 못한다. (중략) 이창준은 원래 도덕적 열망으로 가득했던 개혁적 검사였지만 끝내 비리에 연루되고 만다. 황시목과는 달리 이창준은 감정이 살아 있는 보통 사람이자 조직에서 잘 살아남을 정도로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판명된다. 

준법 마니아가 되기에는 복잡한 캐릭터, 선악으로 딱히 양분되지 않는 입체적 캐릭터 이창준은 황시목에게는 없는 통찰력과 신중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김영민>



매일, 매시, 매분, 매초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를 숙지하고 나 자신도 변화에 맞추어 성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일부 아니 이제는 다수 정확히는 16, 394, 815명으로 밝혀진 이들은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습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바보고 거창하게 말하면 비언어성 학습장애다.


왜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지?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

왜 날이 가면 갈수록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지?

왜 내가 번 돈을 자식에게 맘대로 주지 못하는지? 

왜 어린이 보호구역은 늘어만 가는지?

왜 갈수록 법은 엄격해지고 나는 그것을 지키면서 사는 게 고달픈지?

내 돈 가지고 내가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정부가 간섭인지?

고졸 주제에 왜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겠다는 것인지?

비정규직 주제에 왜 동등하게 직원 복지를 받겠다는 것인지?

왜 요즘 여자들은 번식을 거부하는지? 어디 감히 여자가?

왜 개고기 식용을 못하게 하는지?

왜 채식주의자는 존재하는지?

동물 같은 건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건데 무슨 동물권인지?

환경 좀 파괴되면 어떤가? 돈만 잘 벌면 되는데?



자신이 10대 시절 배웠던 세상의 룰에서 단 1mm도 더 나아가지 못한 사람을 비언어성 학습장애 증상을 가진 성인으로 진단  내리는 내가 성급한가? 약육강식의 본능을 0.1g도 없애지 못한 태초의 인류 상태 그대로 자라서 투표권을 가진 어린양들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모든 존재는 나의 성공과 부를 위한 수단, 하다 못해 나의 행복을 위해서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약자인 것이다. 그러니 난민이 있어야 하고, 그러니 제3세계 노동자가 있어야 하며, 그러니 여자가 있어야 하며, 그러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어야 하고, 장애인, 학대받는 노인, 방임당하는 아동,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존엄한 자살 같은 건 용납 안되지. 비겁한 인간들만이 자살하고 그들은 진심으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거니까. 


오늘에 이르러서 내가 느끼는 유일한 슬픔은 한국 사회가 어마 무시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곳간에 있으면 도둑으로 의심이나 받는 게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모두가 맥주 그 자체에 즐거워할 때, 혼자 창고 옥상에서 자유를 느끼던 사람. 그래서 나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거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전에 사람이 죽고 석유가 바다에 쏟아지고 했는데도 그것 때문에 주식이 오른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주식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영화 <덩케르크>를 다시 봤다. 넷플릭스에 있길래. 버려진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하는 군인 무리가 나오는데, 배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하려고 하자 배의 무게를 줄이려 한다. 그때 한 영국 군인은 배에 딱 1명뿐인 프랑스 군인(약자 소수자)에게 총을 겨누며 니가 나가라. 너는 프랑스인이니 이 배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단 1명의 영국 군인이 이에 반대한다. 그러자 총을 겨누는 군인이 그럼 니가 대신 죽어라. 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약자를 죽이는 인간이 살아남아서 번식을 한 것이니 인간은 자자손손 대체로 이기적이고 악한 것이겠지...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결론보다는 어떤 학습, 성격, 정서 발달 장애를 먼저 고려해보는 요즘이다. 그리고 인간과 세상을 만든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논리를 풀어보는 중인 요즘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은 신의 악취미라는 결론을 내리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언제나 바보가 조금 더 많다.

압도적으로 많으면 차라리 쉬울 것이다.

백석처럼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나탸샤 하면서 당나귀 타고 숲 속으로 총총 떠나면 되니까.

그런데 참 얄굿게도 애매하게 아주 조금 더 많은 것이다.


16,394,815명의 성향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혈액형처럼 손금처럼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일 뿐.

경박스럽고 탐욕스럽고 한 번 손에 들어온 금전은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족속들.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없다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라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족속들.


why do we follow leaders who never lead?

당신이 바보니까.


양초 회사 주식이나 사볼까.

아, 난 주식을 하지 않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고 긴 가뭄은 결국 크나큰 산불로 이어졌다. 경칩 하루 전 발생한 산불은 벌써 5일째 지속되고 있다. 산불 뉴스를 보자마자 겨울잠 자던 개구리, 뱀 등등은 놀랐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20만 명 이상 발생하고 있기에 건강할 때 무조건 투표하자 싶어서 지난 토요일 새벽에 사전투표를 했다. 평소에는 온갖 부문에서 서열 세우기를 잘하는 인간들이 왜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의 서열을 세우지 못하고 이놈도 별로고 저놈도 별로다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난 금요일(3월 4일 경칩 하루 전)에는 몹시 바빴다. 퇴근하기 전에 잠시 본 카톡에는 동생의 지금 산불 나서 발전소가 위험하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퇴근길 운전을 하는데 산불과 원자력 발전소가 생각났고, 뭐 이대로 죽어도 나쁠 건 없지라고 생각했다. 진심이다. 다만 인간의 잘못(원자력 발전소)으로 인해서 죽거나 장애를 얻게 되거나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동식물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퇴근길에 주유를 했다. 지난번에 주유했을 때보다 정확히 리터당 300원이 올라 있었다. 동생말에 의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탓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오늘은 여성의 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