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일지>를 보고 있다. 호감이 가는 인물은 염창희 말곤 딱히 없다. 그리고 제일 싫은 사람은 삼 남매의 엄마인 혜숙이다. 내가 싫어하는 부모상. 내 엄마와도 비슷한 유형. 자식이 불행한 내 인생을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고된 육아를 참고 견뎠는데 구원을 커녕 더 불행하게 하자 자신의 불행을 자식 탓으로 돌리는, 자식 덕 보려고 자식 낳는 전형적인 한국의 부모상. 이것은 축산업자가 자신의 소나 돼지를 "자식 같은 놈들"이라고 하면서 폭우에 떠내려 가는 소를 보고 울부짖는 것과 같은 심리.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힘겨워하는 삼 남매를 보면서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저러나 싶었다. 사랑의 설렘을 유지하기 위해서 박진우처럼 주기적으로 상대를 바꾸는 것도 참 피곤하고 구차한 일.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죽음. 죽음. 죽음. 죽음이 내게 오기 전에 내가 죽음에게 갈 기회가 내게 있을까? <자유 죽음>은 서문만 읽은 상태. 내가 궁금한 것, 장 아메리는 번식을 했을까? 이 사람도 어차피 죽을 인간 같은 걸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을까? 그게 제일 궁금하다. 자식을 낳은 사람을 신뢰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왠지 그런 사람들은 아전인수, 그때그때 본인 유리한대로 합리화하고 사는 졸렬한 인간들 같다. 번식하지 않았다면 난 기꺼이 당신을 추앙하겠습니다.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대체로는 마음이 맞는 두 남녀가 자식을 가지고 싶어서 낳는 것이다. 자궁을 가진 여자의 몸으로 사는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내가 낳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낳을 수 있다. 한 인간을 이 구차한 세상에 태어나서 고통받으면서 살게 하는 게 그저 나의 사소한 마음인 것이다. 지금 낳아도 내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보다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훨씬 더 잘해 줄 수 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우선 자식이라는 것이 딱히 갖고 싶지도 않고, 이 세상이 태어나서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번식은 거절한다. 가치가 없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이다. 출퇴근은 힘들고, 주변 동료들도 별로고, 부모 형제자매도 다 싫고, 늘 갇힌 느낌이고...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는 그 염미정. 누구나 마음속에 염미정 한 명 정도는 품고 살 것이다. 그 크기는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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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임종의 날이길 바라면서 잠들었는데 빗소리에 깨어보니 그냥 몇 시간 지났을 뿐이었다. 외출이라도 하자 싶어서 어젯밤에 무리해서 주말 빨래도 해 두었는데, 왠지 귀찮아져서 다음으로 미루고 집에 죽치고 앉아 있기로 했다. 백화점 오픈런해서 신상 스카프나 하나 사려고 했던 것. 곧 가을이니까 베이지 혹은 와인색의 가을 스카프를 준비해둬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 내 인생 마지막 가을이고, 마지막 가을 외출이라면 어쩔 건가? 반지도 사고 싶고, 스니커즈도 사고 싶긴 하다. 반지는 무조건 살 건데, 아직 뭘 살지 마음의 결정을 못했고, 스니커즈야 뭐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 내가 언제 죽는지 안다면 통잔 잔고 0원으로 만들어 두고 죽을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신용대출 최대로 받아서 마이너스로 두고 먹튀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돈으로 하고 싶은 게 그다지 없어서 내가 가진 돈을 다 쓰는 것 그 미션만으로도 충분히 과로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돈 거리는지 잘 모르겠다. 돈이 자아실현이 아닌 이상에 그렇게 돈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지 보다는 어떻게 죽어야지 하는 생각과 계획만으로 가득 찬 나날이다.


8월에 본 영화: 외계+인, 헌트, 비상선언, 한산: 용의 출현, 베르히만 아일랜드, 굿 럭 투 유 리오 그란드, 멋진 세계

8월에 읽은 책: 마안갑의 살인, 무증거범죄, 급진의 20대, 당선 합격 계급, 계속 쓰기.


앞의 4편의 한국영화에는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본 이유는 영화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냥 극장이라는 고립이 필요해서였다. 평점 4점(10점 만점 기준)으로 예상하고 본 <비상선언>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역시 행복의 비결은 기대 없이 체념하고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베르히만 아일랜드>와 <멋진 세계>는 기대했고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의 성별에 따라 내가 공감하고 덜 공감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헤어질 결심>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누군가에겐 이 세상이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같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해당 없는 일이고. 저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심히 기력이 빠진다. 나는 재미없다고, 나는 맛이 없다고, 나는 그냥 하루의 절반 적도는 잠자고 싶다고, 그냥 눈 뜨면 죽기 직전이었으면 좋겠다고.


오늘은 박상영 신간 <믿음에 대하여>를 읽을까... 싶다. 요즘 제일 공감하는 소설가다. 계속해서 신간을 사고, 신작 영화를 보고, 신상 스카프를 구매하면서 한 달, 또 한 달을 버티겠지... 내가 죽으면 내 책들은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남긴 명품 스카프들은 여동생이 물려받겠지. 나의 가방과 주얼리들도 다 값비싼 것들이라서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의 파인 주얼리들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리겠는가? 팔아서 소고기 사 먹을지도. 장인의 세공술과 디자인의 미학 같은 것보다 소고기를 더 좋아하는 내 동생이니까. 


태어나서 잠시 행복한 유년기를 거친 다음, 공교육 기관에서 가축처럼 사육당하고, 이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마련해서  생존하려고 취업해서 시지프처럼 날마다 돌을 굴리며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어찌하다 보니 부를 쌓고, 또 어찌하다 보니 병을 얻고. 아니 얻은 게 아니다!!! 병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 아니 내가 수정되는 순간에 이미 다 결정 나 있었던 것일 뿐이다!!! 내 생활 습관에 따라 1~2년 정도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테지만 40살에 죽으나 90살에 죽으나 별 차이 없고,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도 없다. 다 죽는다. 고통스럽게. 


왜 이렇게 분하지? 이 분함을 어떻게 해소할 길이 없다. 물론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예방의학의 측면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처럼 고지를 받는 기분이고, 나의 병증의 데이터를 무상으로 병원에 기부하는 기분이 든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이런 귀찮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내 부모는 나처럼 현명할 수 없었던 걸까? 나처럼 자식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던 걸까?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개고생을 시키는 걸까? 나를 걱정하는 그 눈빛과 표정마저도 싫다. 애초에 낳지를 말지 하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패륜적인 말을 누구에게 하겠어. 그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 쓴다. 여기에 토해낸다. 혼자 커밍아웃하는 퀴어의 심정으로. 그게 내가 퀴어에게 공감하는 이유다. 나에겐 이 세상에 태어남 자체가 저주다. 이 기분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고지까지 받았다. 와 어깨뼈, 쇠골뼈 무사하냐? 금가고 부서진 거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란드>를 삶과 비교해 보자. 나는 평생을 남편 1명과만 섹스한 60대 낸시가 불쌍했다. 결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부부 사이의 섹스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 아델>을 읽던 중 매번 5분 만에 끝이 나버리는 부부 사이의 섹스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게 섹스라고 할 수가 있나... 그냥 배설 아닌지? 그런데 낸시가 서술한 남편과의 섹스도 그것과 대동소이했다.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나? 평생을? 다른 애인을 찾아서 더 근사한 섹스를 할 수도 있는데 법적인 배우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섹스를 할 수 없는 그런 삶이 좋은가? 하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특히 남자)들이 실제적으로 섹스를 잘 못 한다. 더 정확히는 섹스에 성의가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낸시 부부처럼. 나는 내가 결혼을 했다면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고처럼 되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개봉 당시에도 마고를 이해했고, 지금도 나는 마고를 이해한다. 


결혼을 하여 한 인간의 정조를 소유한 채로 배설과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 시시한 섹스를 하는, 교과서의 삽화 같은 4인 가족을 꾸려서 백년해로 하는 것이 취향인 사람도 있겠지, 이것을 무병장수라고 해 두자. 하지만 나처럼 배우자는 고사하고 나 스스로의 정조 의식도 믿지 않는, 섹스는 긴장과 설렘과 성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요절이라고 해 보자. 둘 중 무엇을 선택할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요절을 선택할 것이다. 


요절을 선택한 나지만 슬프게도 최근 나는 이성애의 한계를 깨달았다. 남자라는 동물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심각하게 결여된 부족한 존재를 내가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비극이다. 내가 구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고르고 골라서 나의 정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으나 부족했다. 이런 내 기분을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200% 대변해주었다. 영화감독이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남녀지만 그들의 언어는 너무나 다르고, 내 입장에서는 남편인 크리스는 심각하게 결여된 남자의 표본이다. 하지만 토니 입장에서는 그나마 고르고 그른 게 크리스 이리라. 크리스보다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여성이다. 이 영화를 남자가 만들 수 없다는 것에 나의 남은 목숨을 건다. 


20대 때에는 나 역시 멍청했기에 로맨틱 코메디 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믿을 정도로 무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험치가 쌓여서 나는 업그레이드 되었고, 이젠 안다. 정서와 섹스가 일치하는 이성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이 든 남자들도 20대처럼 멍청하긴 매한가지다. 


당분간, 어쩌면 계속 나는 여기에 주절주절 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하나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내일은 부디 제발 사냥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빌면서 동굴에 사슴 그림을 그린 특별한 구석기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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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우리 중 누구도 240세까지 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나이까지 살지 못한다고 해서 삶이 덜 잘되어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적어도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비교적 좋았다면) 40세에 죽으면 비극적인 일이라 여긴다. 그러나 40세의 죽음이 비극이라면 왜 90세의 죽음이 비극적이지 않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것은 중대한 좋음이 될 무엇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왜 좋은 삶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음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마도 좋은 삶은 얻기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떠한 불편, 고통, 괴로움, 고뇌, 스트레스, 불안, 좌절, 지루함도 없고 90년보다 훨씬 오래 살고 좋음으로 훨씬 가득 찬 삶은 가장 운이 좋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삶보다 나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삶을 그 (불가능한) 규준으로 판단하지 않는가?

(중략)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데이비드 베너타>


자고 일어나면 내 생애 마지막 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지루하다. 이 세상 다수의 사람들이 삶을 애찬 하고 또 애찬 한다고 해도 나는 별로다. 시시하고 재미도 없다. 어차피 건강도 좋지 않으니 딱히 미련도 없다. 그냥 덜 아프다가 죽기나 했으면 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다. 하지만 지독히 고통받으며 죽어 가겠지. 고통 없는 안락사 같은 자비가 있을 리 없겠지... 생을 애찬 하는 인간일수록 죽음을 바라는 인간에게 야박할 테니. 니가 감히 생을 거부하고 죽음을 바라? 너 같은 건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이따위 세상이 뭐가 좋나? 태어남=저주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어야지. 하지만 나는 늘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어차피 고통 속에서 살다가 병들어 죽을건데, 자식 낳는 건 정말 최악이다.'라고...


나는 삶이 아름다고 태어남은 축복이다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어쩔 땐 민영화를 부르짓는 이명박 같은 부류의 인간을 보는 것만 같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 다만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그냥 사는 사람도 많아.



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만족감(행복감)은 난 사양이다. 


<자유 죽음>도 주문했다. 내일 도착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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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나도 글이라는 걸(아마도 소설)을 써보겠다는 각오로 구입했던 맥프로(그 당시 유행했던 레티나 디스플레이, 영화 <옥자>에도 보면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사는 미자의 세련됨을 표현하는 대사로 "아저씨 이거 레티나죠?"가 나온다.)는 그 어떤 글도 생산해내지 못한 채 이제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 오늘내일 중으로 수리센터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리를 할지 고장 날 때까지 쓰다가 새것을 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구매했다. 


많은 사람들이 밑줄을 그은 구절은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데(미리보기도 가능한) 그 문장은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였다. 나는 갸우뚱했다. 혼자 있겠다는 거에 뭐 거창하게 의지까지?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다는 것은 화장실에 혼자 가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다. 의지를 가지고 혼자 있지 않는다. 의지를 가지고 타인과 함께 있는다면 모를까...


왜 집 앞 극장에 가지 않고 굳이 멀리 까지 가서 영화를 보는지 질문을 받곤 한다. 혼자 운전을 하고 가면서 오늘 볼 영화에 대해서 기대하는 게 좋고, 혼자 운전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본 영화에 대해서 혼자 조용히 곱씹는 것이 좋다. 단순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는 여정 모두가 나에게는 영화를 감상하는 연장선에 있는 행위라서 그렇다. 그 시간들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대체로는 그 시간을 혼자 음미하고 싶다. 


가수 오지은은 팟캐스트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 39편 고독한 아이슬란드 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내가 생각하는 온전한 여행이 아니고 뭔가 좋은 시간 보내기 같은 느낌이고, 혼자 여행을 하면 그때부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 팍 하고 뭐가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 모든 게 두 배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분, 모든 게 찐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본 경우, 그 영화를 혼자 봤을 때의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몰래) 혼자 다시 영화를 보러 가곤 한다. 혼자 조용히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고 음미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왜 사회성이 떨어진다거나 우영우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 누구보다 더 힘겹게 타인을 견디며 사는데... 당신들보다 만 배는 더 경박한 당신들을 배려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그저 자연인으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내어야 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사는데... 매사 측은지심을 가지면서...


악의야 없겠지, 다만 자연 상태의 악일 뿐인 거지... 영화 <멋진 세계>의 주인공 미카미처럼. 


나보다 몸무게가 20kg 이상 씩 나가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허약함을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데, 누가 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을 매일 하는데, 뭐 어떤 위로의 말을 해달라는 걸까? 그래서 나는 "니가 나처럼 일했다면 과로사로 죽었겠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빈 말, 친절한 말, 따뜻한 말 한마디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 하는 거 너무 피곤하고 에너지가 많이 든다. 육체적인 면에서 당신은 내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나는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해 줄 수가 없다. 측은지심이 느껴지지가 않아서. 


악의가 없는 자연 상태의 악은 때로는 측은지심을 일으킨다. 영화 <멋진 세계>의 주인공 미카미의 갱생을 돕는 이웃들처럼... (<멋진 세계>는 시간이 생기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좋은 영화였다.)


- 왜 혼자 걸었어? 같이 걷자고 하지.

- 혼자 걷고 싶어서. 


혼자 밥 먹고 싶고, 혼자 영화 보고 싶고, 혼자 만 보 걷고 싶다. 혼자 조용히 쉬고 싶다. 어차피 타인에 대한 기대가 없다. 내 생활 반경에 존재하는 타인들이 나와 대화가 통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당신과 나는 취향의 교집합이 없고, 인격적으로도 다르며, 절제력 인내력도 다르고, 세상을 견디는 방식도 다르고, 세상을 체험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는 그것을 반평생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지했고 받아들였다. 내가 받아들였다는 건 다시 말해 체념했다는 것이고, 당신들에 대해서 일말의 기대도 없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 호기심이 생기는 타인이 있어 몇 번 대화를 해보면 '아 역시...' 하고 어김없이 체념의 경험치만 쌓이게 된다. 


- 너는 정말 스페셜 오브 스페셜이야. 진짜 평범하지 않아. 평범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있어.

- 그러니 내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살기 힘들겠어. 그 와중에 나의 이 진취적 기상이며, 늘 차분한 언행은 노벨 평화상 감이지.

- 인정! 언제나 차분하게 말하고 놀라지도 않더라. 남에 대해서 뒷말도 없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실 나는 평범하게 사는 사람, 즉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며 내 집 마련을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호기심도 느끼지 못한다. 100에 1명, 1000에 1명 정도는 나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을 발견하고자 99명, 999명을 견뎌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거나 아니거나, 재테크에 성공해서 좋은 아파트에 살거나 아니거나, 배우자나 본인이 불륜 중이거나 아니거나 정도... 그거 말고는 그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스토리가 딱히 없는 거라서. 내가 유자녀 기혼자를 너무 얄팍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와 시간, 돈을 어디에 쓰는지 알기에 그들에게서 다른 스토리나 취향이 존재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내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전제하에 그렇다는 것. 돈이 많고 시간이 남아도는 유자녀 기혼자라면 뭐 다를 수도 있겠으나 내 생활 반경은 가난해서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랑 얘기를 안 해?

-나는 기혼자들이 하는 자식 얘기, 배우자 얘기가 재미가 없어. 이미 옛날에 다 들었어. 너무 똑같아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냥 에어팟 끼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듣고 있는 게 만 배 좋아. 무료로 하소연 들어주는 사람 역할하고 싶지도 않고. 비용은 들겠지만 하소연하고 싶으면 상담사한테 가면 되지.


자기만의 방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어디에 있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반드시 자기 소유일 필요도 없다. 작업하는 동안 필요한 공간을 가지면 그뿐이다. (중략) 나는 여기,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빼면 적막한 곳에 앉아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이 끊겼다. 전화는 울리지 않을 것이다. 빨랫감도 없고, 양념 서랍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빌린 집의 손님방은 나만의 방이 되었다. (중략) 결국 글쓰기란 신념의 행위다. 우리는 믿음이 우리를 어디론가 도달하게 해줄 것임을, 아주 희미한 증거가 없더라도 믿어야 한다.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 대니 샤필로>


나에겐 침실만큼이나 넓고 한 면은 남향, 한 면은 동향인 창문이 2개나 있는 멋진 서재가 있다. 책장에는 나의 최애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상판이 넓은 책상과 화질이 좋은 32인치 모니터가 있는 서재가 있다. 그리고 침실에는 독서실 느낌이 들어서 집중이 잘 되게 하는 빌트인 책상이 있다(인테리어를 다시 하게 되면 이 책상은 없애버리고 이 자리에는 옷장이나 넣어서 이불과 옷을 좀 더 체계적으로 수납하고 싶다). 그리고 주방에는 상판에 마리메꼬 미니 꽃병과 각티슈만 놓여있는 4인용 식탁도 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나의 이 책상 사치에 다들 놀란다. 거기다 거실의 1인용 리클라이너 의자에도 사이트 테이블이 있다. 다시 말해 레티나 디스플레이 맥북을 올려다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테이블이 4개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빨랫감도 있고, 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 보 걷기도 해야 하고, 스트레칭도 해야 하고, 주 5일을 출퇴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데처럼 목숨이 걸려 있다면 나도 주절주절 온갖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지금은 남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하고,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읽고 난 후론(심지어 구입함) 굳이 그 허들을 넘기 위해서 나의 건강을 소진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물론 재능이 없고, 신념마저도 없는 게 가장 큰 이유), 반평생 살아버렸고, 건강은 안 좋고, 이 세상에 딱히 애정도 없고, 남은 생은 적당히 건강이나 관리하면서 만 보 걷고, 천재들이 만든 아름다운 것들만 감상하다가 살다 죽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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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빈 말을 쉽게 자주 한다. 반면 나는 빈 말을 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빈 말과 진심을 가려내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귀찮다. 오늘은 가수 리싸의 <사람들은>을 백 번 정도 들었다. 사람들을 믿어도 될까요. 나를 위로하는 말들을 믿어도 될까요. 또한 가수 김사월의 <젊은 여자>도 백 번 정도 들었다.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없어.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사람을 믿는 경우는 이 정도는 속아도 괜찮아 할 때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 오지은 <사랑한다고 거짓을 말해줘> 노래 가사들이 좋다. 맘에 든다.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나의 눈을 멀게 해 봐요.


우리의 사랑이 시작될 때 너는 나에게 백만 가지의 거짓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 거짓말들에 기꺼이 속아 넘어갔고 나만의 로맨스를 제작, 감독, 각본, 편집했다. 매우 흡족하다. 너의 고달픔과는 별개로. 그래도 너는 붕괴되지는 않았잖아? 아닌가, 붕괴되었나?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의 거짓말을 하는 니가 좋았어. 기꺼이 속아 준 거지, 내가. 너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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