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에 나도 글이라는 걸(아마도 소설)을 써보겠다는 각오로 구입했던 맥프로(그 당시 유행했던 레티나 디스플레이, 영화 <옥자>에도 보면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사는 미자의 세련됨을 표현하는 대사로 "아저씨 이거 레티나죠?"가 나온다.)는 그 어떤 글도 생산해내지 못한 채 이제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 오늘내일 중으로 수리센터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리를 할지 고장 날 때까지 쓰다가 새것을 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구매했다. 


많은 사람들이 밑줄을 그은 구절은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데(미리보기도 가능한) 그 문장은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였다. 나는 갸우뚱했다. 혼자 있겠다는 거에 뭐 거창하게 의지까지?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다는 것은 화장실에 혼자 가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다. 의지를 가지고 혼자 있지 않는다. 의지를 가지고 타인과 함께 있는다면 모를까...


왜 집 앞 극장에 가지 않고 굳이 멀리 까지 가서 영화를 보는지 질문을 받곤 한다. 혼자 운전을 하고 가면서 오늘 볼 영화에 대해서 기대하는 게 좋고, 혼자 운전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본 영화에 대해서 혼자 조용히 곱씹는 것이 좋다. 단순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는 여정 모두가 나에게는 영화를 감상하는 연장선에 있는 행위라서 그렇다. 그 시간들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대체로는 그 시간을 혼자 음미하고 싶다. 


가수 오지은은 팟캐스트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 39편 고독한 아이슬란드 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내가 생각하는 온전한 여행이 아니고 뭔가 좋은 시간 보내기 같은 느낌이고, 혼자 여행을 하면 그때부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 팍 하고 뭐가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 모든 게 두 배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분, 모든 게 찐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본 경우, 그 영화를 혼자 봤을 때의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몰래) 혼자 다시 영화를 보러 가곤 한다. 혼자 조용히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고 음미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왜 사회성이 떨어진다거나 우영우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 누구보다 더 힘겹게 타인을 견디며 사는데... 당신들보다 만 배는 더 경박한 당신들을 배려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그저 자연인으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내어야 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사는데... 매사 측은지심을 가지면서...


악의야 없겠지, 다만 자연 상태의 악일 뿐인 거지... 영화 <멋진 세계>의 주인공 미카미처럼. 


나보다 몸무게가 20kg 이상 씩 나가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허약함을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데, 누가 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을 매일 하는데, 뭐 어떤 위로의 말을 해달라는 걸까? 그래서 나는 "니가 나처럼 일했다면 과로사로 죽었겠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빈 말, 친절한 말, 따뜻한 말 한마디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 하는 거 너무 피곤하고 에너지가 많이 든다. 육체적인 면에서 당신은 내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나는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해 줄 수가 없다. 측은지심이 느껴지지가 않아서. 


악의가 없는 자연 상태의 악은 때로는 측은지심을 일으킨다. 영화 <멋진 세계>의 주인공 미카미의 갱생을 돕는 이웃들처럼... (<멋진 세계>는 시간이 생기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좋은 영화였다.)


- 왜 혼자 걸었어? 같이 걷자고 하지.

- 혼자 걷고 싶어서. 


혼자 밥 먹고 싶고, 혼자 영화 보고 싶고, 혼자 만 보 걷고 싶다. 혼자 조용히 쉬고 싶다. 어차피 타인에 대한 기대가 없다. 내 생활 반경에 존재하는 타인들이 나와 대화가 통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당신과 나는 취향의 교집합이 없고, 인격적으로도 다르며, 절제력 인내력도 다르고, 세상을 견디는 방식도 다르고, 세상을 체험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는 그것을 반평생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지했고 받아들였다. 내가 받아들였다는 건 다시 말해 체념했다는 것이고, 당신들에 대해서 일말의 기대도 없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 호기심이 생기는 타인이 있어 몇 번 대화를 해보면 '아 역시...' 하고 어김없이 체념의 경험치만 쌓이게 된다. 


- 너는 정말 스페셜 오브 스페셜이야. 진짜 평범하지 않아. 평범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있어.

- 그러니 내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살기 힘들겠어. 그 와중에 나의 이 진취적 기상이며, 늘 차분한 언행은 노벨 평화상 감이지.

- 인정! 언제나 차분하게 말하고 놀라지도 않더라. 남에 대해서 뒷말도 없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실 나는 평범하게 사는 사람, 즉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며 내 집 마련을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호기심도 느끼지 못한다. 100에 1명, 1000에 1명 정도는 나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을 발견하고자 99명, 999명을 견뎌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거나 아니거나, 재테크에 성공해서 좋은 아파트에 살거나 아니거나, 배우자나 본인이 불륜 중이거나 아니거나 정도... 그거 말고는 그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스토리가 딱히 없는 거라서. 내가 유자녀 기혼자를 너무 얄팍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와 시간, 돈을 어디에 쓰는지 알기에 그들에게서 다른 스토리나 취향이 존재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내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전제하에 그렇다는 것. 돈이 많고 시간이 남아도는 유자녀 기혼자라면 뭐 다를 수도 있겠으나 내 생활 반경은 가난해서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랑 얘기를 안 해?

-나는 기혼자들이 하는 자식 얘기, 배우자 얘기가 재미가 없어. 이미 옛날에 다 들었어. 너무 똑같아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냥 에어팟 끼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듣고 있는 게 만 배 좋아. 무료로 하소연 들어주는 사람 역할하고 싶지도 않고. 비용은 들겠지만 하소연하고 싶으면 상담사한테 가면 되지.


자기만의 방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어디에 있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반드시 자기 소유일 필요도 없다. 작업하는 동안 필요한 공간을 가지면 그뿐이다. (중략) 나는 여기,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빼면 적막한 곳에 앉아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이 끊겼다. 전화는 울리지 않을 것이다. 빨랫감도 없고, 양념 서랍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빌린 집의 손님방은 나만의 방이 되었다. (중략) 결국 글쓰기란 신념의 행위다. 우리는 믿음이 우리를 어디론가 도달하게 해줄 것임을, 아주 희미한 증거가 없더라도 믿어야 한다.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 대니 샤필로>


나에겐 침실만큼이나 넓고 한 면은 남향, 한 면은 동향인 창문이 2개나 있는 멋진 서재가 있다. 책장에는 나의 최애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상판이 넓은 책상과 화질이 좋은 32인치 모니터가 있는 서재가 있다. 그리고 침실에는 독서실 느낌이 들어서 집중이 잘 되게 하는 빌트인 책상이 있다(인테리어를 다시 하게 되면 이 책상은 없애버리고 이 자리에는 옷장이나 넣어서 이불과 옷을 좀 더 체계적으로 수납하고 싶다). 그리고 주방에는 상판에 마리메꼬 미니 꽃병과 각티슈만 놓여있는 4인용 식탁도 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나의 이 책상 사치에 다들 놀란다. 거기다 거실의 1인용 리클라이너 의자에도 사이트 테이블이 있다. 다시 말해 레티나 디스플레이 맥북을 올려다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테이블이 4개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빨랫감도 있고, 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 보 걷기도 해야 하고, 스트레칭도 해야 하고, 주 5일을 출퇴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데처럼 목숨이 걸려 있다면 나도 주절주절 온갖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지금은 남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하고,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읽고 난 후론(심지어 구입함) 굳이 그 허들을 넘기 위해서 나의 건강을 소진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물론 재능이 없고, 신념마저도 없는 게 가장 큰 이유), 반평생 살아버렸고, 건강은 안 좋고, 이 세상에 딱히 애정도 없고, 남은 생은 적당히 건강이나 관리하면서 만 보 걷고, 천재들이 만든 아름다운 것들만 감상하다가 살다 죽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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