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임종의 날이길 바라면서 잠들었는데 빗소리에 깨어보니 그냥 몇 시간 지났을 뿐이었다. 외출이라도 하자 싶어서 어젯밤에 무리해서 주말 빨래도 해 두었는데, 왠지 귀찮아져서 다음으로 미루고 집에 죽치고 앉아 있기로 했다. 백화점 오픈런해서 신상 스카프나 하나 사려고 했던 것. 곧 가을이니까 베이지 혹은 와인색의 가을 스카프를 준비해둬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 내 인생 마지막 가을이고, 마지막 가을 외출이라면 어쩔 건가? 반지도 사고 싶고, 스니커즈도 사고 싶긴 하다. 반지는 무조건 살 건데, 아직 뭘 살지 마음의 결정을 못했고, 스니커즈야 뭐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 내가 언제 죽는지 안다면 통잔 잔고 0원으로 만들어 두고 죽을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신용대출 최대로 받아서 마이너스로 두고 먹튀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돈으로 하고 싶은 게 그다지 없어서 내가 가진 돈을 다 쓰는 것 그 미션만으로도 충분히 과로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돈 거리는지 잘 모르겠다. 돈이 자아실현이 아닌 이상에 그렇게 돈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지 보다는 어떻게 죽어야지 하는 생각과 계획만으로 가득 찬 나날이다.


8월에 본 영화: 외계+인, 헌트, 비상선언, 한산: 용의 출현, 베르히만 아일랜드, 굿 럭 투 유 리오 그란드, 멋진 세계

8월에 읽은 책: 마안갑의 살인, 무증거범죄, 급진의 20대, 당선 합격 계급, 계속 쓰기.


앞의 4편의 한국영화에는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본 이유는 영화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냥 극장이라는 고립이 필요해서였다. 평점 4점(10점 만점 기준)으로 예상하고 본 <비상선언>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역시 행복의 비결은 기대 없이 체념하고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베르히만 아일랜드>와 <멋진 세계>는 기대했고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의 성별에 따라 내가 공감하고 덜 공감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헤어질 결심>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누군가에겐 이 세상이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같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해당 없는 일이고. 저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심히 기력이 빠진다. 나는 재미없다고, 나는 맛이 없다고, 나는 그냥 하루의 절반 적도는 잠자고 싶다고, 그냥 눈 뜨면 죽기 직전이었으면 좋겠다고.


오늘은 박상영 신간 <믿음에 대하여>를 읽을까... 싶다. 요즘 제일 공감하는 소설가다. 계속해서 신간을 사고, 신작 영화를 보고, 신상 스카프를 구매하면서 한 달, 또 한 달을 버티겠지... 내가 죽으면 내 책들은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남긴 명품 스카프들은 여동생이 물려받겠지. 나의 가방과 주얼리들도 다 값비싼 것들이라서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의 파인 주얼리들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리겠는가? 팔아서 소고기 사 먹을지도. 장인의 세공술과 디자인의 미학 같은 것보다 소고기를 더 좋아하는 내 동생이니까. 


태어나서 잠시 행복한 유년기를 거친 다음, 공교육 기관에서 가축처럼 사육당하고, 이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마련해서  생존하려고 취업해서 시지프처럼 날마다 돌을 굴리며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어찌하다 보니 부를 쌓고, 또 어찌하다 보니 병을 얻고. 아니 얻은 게 아니다!!! 병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 아니 내가 수정되는 순간에 이미 다 결정 나 있었던 것일 뿐이다!!! 내 생활 습관에 따라 1~2년 정도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테지만 40살에 죽으나 90살에 죽으나 별 차이 없고,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도 없다. 다 죽는다. 고통스럽게. 


왜 이렇게 분하지? 이 분함을 어떻게 해소할 길이 없다. 물론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예방의학의 측면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처럼 고지를 받는 기분이고, 나의 병증의 데이터를 무상으로 병원에 기부하는 기분이 든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이런 귀찮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내 부모는 나처럼 현명할 수 없었던 걸까? 나처럼 자식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던 걸까?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개고생을 시키는 걸까? 나를 걱정하는 그 눈빛과 표정마저도 싫다. 애초에 낳지를 말지 하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패륜적인 말을 누구에게 하겠어. 그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 쓴다. 여기에 토해낸다. 혼자 커밍아웃하는 퀴어의 심정으로. 그게 내가 퀴어에게 공감하는 이유다. 나에겐 이 세상에 태어남 자체가 저주다. 이 기분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고지까지 받았다. 와 어깨뼈, 쇠골뼈 무사하냐? 금가고 부서진 거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란드>를 삶과 비교해 보자. 나는 평생을 남편 1명과만 섹스한 60대 낸시가 불쌍했다. 결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부부 사이의 섹스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 아델>을 읽던 중 매번 5분 만에 끝이 나버리는 부부 사이의 섹스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게 섹스라고 할 수가 있나... 그냥 배설 아닌지? 그런데 낸시가 서술한 남편과의 섹스도 그것과 대동소이했다.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나? 평생을? 다른 애인을 찾아서 더 근사한 섹스를 할 수도 있는데 법적인 배우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섹스를 할 수 없는 그런 삶이 좋은가? 하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특히 남자)들이 실제적으로 섹스를 잘 못 한다. 더 정확히는 섹스에 성의가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낸시 부부처럼. 나는 내가 결혼을 했다면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고처럼 되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개봉 당시에도 마고를 이해했고, 지금도 나는 마고를 이해한다. 


결혼을 하여 한 인간의 정조를 소유한 채로 배설과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 시시한 섹스를 하는, 교과서의 삽화 같은 4인 가족을 꾸려서 백년해로 하는 것이 취향인 사람도 있겠지, 이것을 무병장수라고 해 두자. 하지만 나처럼 배우자는 고사하고 나 스스로의 정조 의식도 믿지 않는, 섹스는 긴장과 설렘과 성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요절이라고 해 보자. 둘 중 무엇을 선택할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요절을 선택할 것이다. 


요절을 선택한 나지만 슬프게도 최근 나는 이성애의 한계를 깨달았다. 남자라는 동물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심각하게 결여된 부족한 존재를 내가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비극이다. 내가 구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고르고 골라서 나의 정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으나 부족했다. 이런 내 기분을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200% 대변해주었다. 영화감독이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남녀지만 그들의 언어는 너무나 다르고, 내 입장에서는 남편인 크리스는 심각하게 결여된 남자의 표본이다. 하지만 토니 입장에서는 그나마 고르고 그른 게 크리스 이리라. 크리스보다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여성이다. 이 영화를 남자가 만들 수 없다는 것에 나의 남은 목숨을 건다. 


20대 때에는 나 역시 멍청했기에 로맨틱 코메디 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믿을 정도로 무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험치가 쌓여서 나는 업그레이드 되었고, 이젠 안다. 정서와 섹스가 일치하는 이성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이 든 남자들도 20대처럼 멍청하긴 매한가지다. 


당분간, 어쩌면 계속 나는 여기에 주절주절 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하나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내일은 부디 제발 사냥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빌면서 동굴에 사슴 그림을 그린 특별한 구석기인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