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오 카스텔루치_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들을 스크리닝으로 보고 나흘 만에 직접 신작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에게 마법의 표가 생긴 겁니다.


 

극장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새하얗게 세팅 돼있었습니다. 왼쪽부터 하얀 소파와 카펫, 하얀 테이블, 하얀 침대,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대형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예수의 얼굴, 혹은 예수의 얼굴이 담긴 대형 포스터는 극 후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정시가 되자마자 두 남자가 역시 새하얀 옷을 입은 노인을 부축해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 연극에서 역할이 없는 그들이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는 혼자는 걷기조차 힘든 노인이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채 시작하는 순간 극 중 노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더욱 어색합니다.


 

아버지는 헤드폰을 쓴 채 우리나라의 ‘동물왕국’ 비슷한 프로그램을 보고, 뒤이어 등장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하며 메모를 하는 그는 바빠 보입니다. 하지만 출근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똥을 쌉니다.


 

그는 익숙하게 아버지가 싼 똥을 치우고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아들은 계속해서 아비를 달랩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배변 조절이 힘들어도 아버지가 느끼는 수치심까지 사라지진 않습니다. 어릴 땐 분명 자신의 똥기저귀를 갈아줬을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직장에 늦어도, 전화가 와도, 아버지를 토닥이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아버지가 싼 똥은 새하얀 가구들 사이에 더욱 빛이 납니다. 똥이 묻은 자리가 너무 새하얘서 오히려 초콜릿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내 온 극장에 퍼지는 냄새가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가짜였으며 좋겠지? 하지만 이건 정말로 냄새 나는 바로 그 똥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등받이가 검은 의자에도 아버지가 싼 똥이 묻어있습니다. 연출자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과 모양은 마치 뒤에 걸려 있는 예수의 얼굴과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합니다. 아마 우연이겠죠. 저는 그냥 제가 보고 싶은 걸 본 걸 겁니다. 어쨌든 위치와 각도 때문에 그 검은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이나 모양이 꼭 인간의 얼굴 같이 느껴지는 걸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극은 후반에 극의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치워 놓으면 다시 싸고 닦아 놓으면 다시 쌉니다. 차분하게 아버지를 달래고 보살피던 아들은 어느 순간 폭발하죠. 아버지 대체 뭘 드신 거냐고요.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흐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새하얀 침대에마저 자신의 설사를 묻힙니다. 아마 아무리 착한 아들이라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들은 무대 중앙에 걸린 예수 얼굴로 다가갑니다. 예수의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절규가 느껴집니다.


 

아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여전히 똥 묻은 흰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책가방을 매고 농구공을 든 남자아이가 등장합니다. 책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 예수의 얼굴에 던지기 시작하죠. 이후 계속해서 아이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모든 아이가 다 나오고 나서 세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열 두 명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분은 없을 듯 합니다.


 

실컷 수류탄을 던지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가방을 잠그고 다시 매고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그 후로는 예수의 얼굴 뒤로 불길과 사람의 그림자가 등장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변형됐다가 원래 모습을 찾았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뜹니다.


 

“You’re My Shepherd”


 

그러다 오른쪽 귀퉁이에 어떤 글자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아직 극장 안이 어두울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장 안이 밝아질수록 그 글자는 선명합니다. ‘not’입니다.


 

어두울 때는 “You’re My Shepherd”로 보이지만 밝아오면 “You’re not My Shepherd”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레이디 가가의 공연은 그토록 반대하면서 이런 작품이 상영될 때는 왜 이렇게 고요한가를 반문하기도 하더군요. 명백한 신성모독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상영됐을 때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의도는 꼭 신이 있다, 없다와 같은 단순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이 어떤 고통의 순간에 직면해있을 때, 그것을 피할 수도,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이 받아 들여야하지만 고통스러울 때, 또 수치스러우면서도 생을 부지해야 할 때,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고 질문을 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에게도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질문하고, 배우들에게도 질문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에까지 이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믿어온 신은 과연 정말 있는 건지, 나를,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신의 뜻인 건지, 그렇다면 왜 하필 이런 고통과 수치를 주는 건지 우리 인간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우니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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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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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 가운데 이 책 이전에 읽어본 작품이 있습니다. 황정은의 <양산 펴기>입니다. 이 말은 제가 원래 좋아하거나 관심 갖는 작가가 황정은이라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읽어본 작품이라서 이 작품집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처음 듣는 노래보다 반복해서 들은 노래가 더 좋은 것처럼요. 정리하자면 이 작품집 가운데 역시 저는 황정은의 <양산 펴기>가 가장 좋았습니다.


황정은_ 양산 펴기

이 단편의 백미는 시위구호와 호객멘트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요즘 예능을 보면 서로 말 할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자막 없이 듣기만 해서는 해독이 불가할 정도로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말하죠. 마이크 물리니까 한 명씩 좀 말하자고. 실제로 세상은 마이크가 동시에 물리는 곳 같습니다. 누군가가 말하면 다른 이가 말을 멈추고 들어주는 곳이 아닌 겁니다. 그냥 동시에 각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황정은이 이 단편에서 바로 그런 세상의 단면을 절묘하게 잡아낸 것 같습니다. 


이웃돕기 자선바자회와 노점상연합, 공무원노조, 철거민연합이 생존권을 외치는 집회에서, 장어를 먹고 싶어하는 녹두에게 매몰차게 말한 것이 못내 걸려, 꿀 같은 하루 휴가를 반납하고 양산 겸용 우산을 판매하는 이 젊은이의 모습이라니. 이 사람의 사정과 저 사람의 사정들을 굳이 줄줄줄줄 설명하지 않고 간단한 상황묘사와 대화만으로 보여주는 황정은의 수법이라니. 그리고 잠꼬대를 하는 주인공과 그 잠꼬대까지를 궁금해하며 곁에서 듣고 있는 녹두와의 잠결 대화라니. 


아르바이트라고요 아저씨. 단 한 줄로 끝난 작가노트처럼 황정은 작가는 구구절절 이게 삶이고 그래서 처량하거나 쓸쓸하기도 하고 뭐 이렇게 설명하는 대신 그냥 '누군가의 세상살이라고요 독자여러분'이라고 무심하고 덤덤하게 쓰윽 내뱉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쓰윽 내뱉는 말을 냉큼 주워담아야 할 우리 독자들은 '소설일뿐이라고요 여러분' 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는 못하는 거고요.


손보미_ 폭우

폭우는 제3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는 불행을 맞이한 한 부부와 그 부부의 이야기와 교차하는 다른 부부의 이야기가 교차합니다(앗 이것은 일종의 반전이라서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읽다보면 잊으실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는 불행을 맞이한 부부의 현재 이야기와 다른 부부의 과거 이야기가 교차합니다. 


역시 이 안에도 고통이 있고 불행이 있고 '불행'이라기보다는 '행복하지 않음'으로 써야할 것 같은 권태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그래 뭐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손보미의 말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담담합니다. 문장들은 너무 빨리 마침표로 마무리돼서 냉정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작가들의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짧고 간결한 문장, 무심해보이는 말투 등이 거의 대부분의 젊은작가들의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이런 말을 할 때는 항상 요즘 모든 젊은작가들의 모든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많은 작가들의 수준을 고르게 해주는 장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꼭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미월_ 프라자 호텔

구글에서 '프라자 호텔'을 검색해봤습니다. 이제는 '플라자 호텔'이었습니다. 리뷰를 클릭해보니 첫 페이지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작성한 후기가 더욱 많았습니다. 첫 페이지에 보이는 평은 대부분 좋았습니다.


프라자 호텔은 아마 이런 곳일 겁니다. 과거에는 프라자 호텔이었던 곳, 리노베이션 후 플라자 호텔이 됐고 현재 특급호텔이랄 만한 곳은 아니지만 과거 어느 연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던 장소 말입니다. 알고 보면 현재도 일정 영향을 미치고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역시나 이 부분도 일종의 반전이므로 더 이상의 말은 아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단편에는 윤서로 불리는 여자와 아내로 불리는 여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그 날 약속된 그 장소로 갔는지는 윤서도, 아내도 모릅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그 때의 나, 그 때의 그녀, 그 때의 우리가 지금의 나나 그녀, 우리와는 조금 다를 수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 아닐까요. 설사 그 때 그들과 지금의 그들이 꼭 같다고 하더라도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요.


김이설_ 부고

엄마가 죽었다는 부고를 엄마에게 전해듣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엄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엄마가 전해줬다는 사실을 편견 없이 말 그대로 이해하고 나면, 사실 이야기는 뻔합니다. 여자에게 엄마가 2명 있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그 안에 담길 얘기도 어느 정도는 짐작 가능하니까요. 작가 역시 기대와 다른 이야기 진행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낳아준 엄마와 길러준 엄마, 나를 학대한 아빠, 상처 받은 나, 그걸로도 부족해 더 심각하게 꼬인 가족사들, 그런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어떻게 보면 막장이라 불리는 TV드라마의 단골 소재를 그대로 따른 그렇고 그런 소설입니다. 오히려 TV드라마보다 수위가 높고 꼬인 정도도 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은 막장이야를 외치며 채널을 돌릴 수만은 없습니다. 김이설 작가가 꾸준히 들여다보고 써 온 상처들, TV드라마에서 나오면 막장이라고 할 만큼 익숙하고 진부한 소재지만 정작 그런 일들을 실제로 겪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진부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고통들을 진심으로 쓴 것이니까요. 예전에도 김이설 작가의 장편을 읽고 비슷한 감상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눈 돌리지 않고 끈질기게 써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정소현_ 너를 닮은 사람

스릴러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계속해서 만나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발생합니다. 나는 너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내가 너에게 저지른 잘못을 너가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때 너는 나와 가장 가까운 이였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싫어해서 '사람의 적은 사람'이라고 변형시키고 싶은 저이지만 이럴 때 보면 여자의 적은 여자인 것 같습니다. 나는 너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니까요. 그것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너의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너의 능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네가 꿈꾸는 삶, 그 모든 것을 빼앗지만 결국 끝까지 그걸 지키지도 못합니다. 


이후의 삶은 고통, 너가 나타난 이후로의 삶은 공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가장 적나라한 치부를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이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배회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옵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을 들키고 난 후가 가장 후련합니다. 그나마도 나는 견디지 못하고 또 다른 것, 너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빼앗아버리지만요.


김성중_ 국경시장

환상소설입니다. 강을 건너면 기억을 팔아 국경야시장에서 파는 어떤 것과든 교환가능한 화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코와 로나와 나는 모두 다릅니다. 별 고민 없이 어차피 기억도 나지 않는 출생 직후의 기억을 파는 주코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파는 로나, 별로 기억을 팔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너무 갖고 싶은 것이 생기자 가장 행복했던 기억 직후의 기억을 파는 나. 잘은 모르지만 다른 집단에서 어떤 3명을 무작위로 이 곳에 데려다놔도 대략적으로 이런 패턴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것이 소설의 역할이랄까, 기능이겠죠.


작가는 <국경시장>에서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 그들이 가진 각자의 상처, 이국의 낯설음과 현실세계와의 이질성, 국경시장이 열리는 만월이라는 시간적 설정 등 낭만적인 것들을 끄러모아 국경시장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나면 좀 허전합니다. 단편이라는 장르적 한계가 분명 있겠지만 뭔가 꽉 조이는 힘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들처럼 상처가 있으나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쓰여져 깊이 공감이 되지 않고, 잘 쓰여졌으나 다소 가벼운 로맨스소설을 읽은 듯합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가 명확히 있었다면 제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이영훈_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이영훈의 단편은 저의 개인적인 기억 때문에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화장실은 급한데 눈 앞에는 화장실이 없고, 찾아가면 마침 사정으로 이용할 수가 없고 하는 상황 말입니다. 아마 누구나 겪어본 일이겠지만 저에게는 정말로 흡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모든 상황까지를 원망하고 누구에게든 의지하게 되는 남자의 심리나 상황묘사는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소녀시대 광고판이나 나를 화장실까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인도하려 했던 그 경찰이 마지막에 한 행동을 이 이야기의 주요 맥락으로 연결짓지는 못했습니다. 소녀시대 광고판은 그저 소변이 마려운데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심심해서 가미된 소재 같이 느껴졌습니다(물론, 그 날 그 장소에 가게 된 일종의 원인인 선을 통해 만난 평범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긴 했습니다). 마지막에 커다란 외침을 내뱉은 외손 경찰의 존재 역시 다소 관념적으로 삽입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재밌긴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G20 정상회의와 맞선을 봐서 어떻게든 결혼할 만한 여자를 찾는 자신의 모습과 또 자본주의 시대의 아이돌이라는 소재와 길 잃은 자신을 안내하는 경찰의 정체와 현실 등, 단편 소설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싶어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어쨌든 젊은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이렇게 읽는다는 것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작가 세계에서는 젊다는 기준이 현실에서보다 더욱 관대하다는 것은 큰 위로입니다. 


동시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를 이렇게 구경할 수 있다는 것, 제가 뭐라고 이렇게 후기를 혼자만의 공간이 아닌 그래도 몇 명은 와서 볼 이런 공간에 남길 수 있다는 것, 다 고통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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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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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엄마의 연애 같은 책이었습니다. 듣고 보면 조목조목 너무 맞는 말인데 듣기 전에는 어색한 일. 엄마도 여자니까 연애도 하고 그러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 하지만 우리 엄마를 엄마로만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피로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피로한 것이 당연했던 겁니다.

 

피로는 우리에게 멈춰서서 이 모든 것이 그럼직한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기어 같은 것이었습니다.

 

면역력도 마찬가집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프로폴리스를 먹어보고 있습니다. 아픈 게 싫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단순히 아픈 것보다는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싫은 겁니다. 한 두 번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지만 자주 그러기가 싫은 겁니다. 직장인에게는 몸이 약한 것도 일종의 무능력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뭐 이래 하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은연 중에는 항상 정력적이고 건강한 직장인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몸의 어떤 곳에 확실히 '아프다'고 할 만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이상은 '아프다'는 말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이염을 앓고 있는 것을 누가 알고 아프냐고 묻거나 아파서 어떡하냐고 걱정을 하면 '아픈 게 아니라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거나 '아프지는 않고 그냥 좀 불편한 것'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아플 때 더 많은 영감이 떠오르는데 말입니다. 냉동실에 넣고 인위적으로 얼린 얼음이 사르르 녹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많이 아프지만 않으면 그냥은 쉴 수 없는 회사를 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거의 항상 늘 피곤하고 그래서 언제든 휴식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이렇게 건강과 면역력에 집착하는 저의 깊숙한 내면을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1층에서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깊숙이 깊숙이 내려가본 거죠. 그리고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그리하여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나 자신을 자꾸 채찍질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이것은 분명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자신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겁니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

   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P.21

 

한병철이 정의한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경쟁과 근면을 종용하는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꽤 오래된 폭력'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새로운 폭력' 두 가지 모두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책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성격 때문에 '면역 저항'조차 유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인식하지도 외치지도 못하는 정서적 불구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니라면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P.48

 

그러니 이렇게 꾸짖는 말이, 꾸짖음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고맙고 반가울 수 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고 또 그 나머지 사람들이 앞에서 지팡이를 내밀며 어서 잡고 오라고 하는데 늦추고 멈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즉각 반응하는 것이 천박한 일이라고 일갈합니다.

고맙고 반갑습니다. 죽비처럼 내리치는 이 말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잘 모르겠는 일은 판단을 유보하고 좀 더 생각해봐도 됩니다. 관습적으로 반응해왔던 익숙한 자극들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여도 됩니다. 그게 뭐든지, 이래도 되나 생각했던 것들을 다 그래도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게 더욱 좋습니다.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P.96

 

솔직히 이런 구절을 읽으면 좀 당혹스럽긴 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를 무엇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저로서는 한병철의 거의 모든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것까지 쉽게 인정해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나름의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이 말에 동의하면 왠지 소셜 네트워크 자체를 멀리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화의 달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구절에 대해서는 또 한병철이 요구하는, 멈칫하고 중단하는 태도를 취하면 조금은 편해집니다. 페이스북에 제가 제 자신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친구가 상품처럼 제 자아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그런 구실만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면 저는 기꺼이 속도를 늦추고 필요하면 멈추겠습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ㅡ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P.112


아아 이번엔 니체의 권위까지 동원해 우리의 부지런함을 꾸짖으시는군요! 우리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시는군요! 물론 이를 그저 제 맘을 편히하는 도구로만 악용해서는 안 되겠지요(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아직 저는 긍정성의 폭력에 저를 버려두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그저 저는 기다릴 것은 기다리고 게을러야 할 때는 게으를 것입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중략)......단순한 생명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P.113

 

건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보다는 몸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꽤 분명해보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니요. 이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단순히 생명기능으로만 환원되었다니요. 이건 좀 아깝지 않습니까. 우리는 숨쉬고 몸을 가꾸는 것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데요.

 

한병철이 제시한 피로사회와 우울사회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피로하고 우울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피로하고 우울한 게 정상이라는 거죠,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다면 왜일까요. 그건 한병철 님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해주셨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할 몫입니다.

 

책을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제가 써놓고도 정확히 무슨 의도로 쓴 건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메모가 있네요. [피로사회]에 있는 엄청난 반전은 자아의 피로는 바로 치유적 피로라는 것이라고. 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써놓은 건지는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모르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요.

 

[피로사회]는 피로할 때마다 꺼내 읽는 박카스나 우루사나 뭐 그런 것과 같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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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봄이라는 것은 계절의 이름이기보다는 여름이 오기 직전 명멸하는 대낮이거나 조명처럼 번쩍 벚꽃 흩날리는 밤과 같이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말이 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일을 가리키는 봄이란 건 변함 없어서 조금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매년 3월, 봄이 아직 덜 왔건 바싹 왔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페스티벌 봄'이 열립니다. 그동안 봄이 왔다가 가버린 건 알았어도 이런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은 몰랐다가 작년 연말 젊은 축제기획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축제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멋있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하는 인상을 전달하면 절반은 성공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페스티벌 봄은 그렇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처음으로 선택한 '봄'은 무려 여섯 시간의 대장정을 위한 체력을 기본 요건으로 하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자생하는 비극] 연작의 스크리닝입니다. 페스티벌 봄이 정식 개막도 하기 전에 필름포럼에서 말 그대로 연극장면을 촬영해 재편집한 영상을 극장에 모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해주는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진작 그리스비극 좀 열심히 읽어놓을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라는 이탈리아 태생의 아방가르드 연극연출가에 대해서는 이번 페스티벌 봄을 통해 처음 알게 됐지만 그래도 6시간이나 보고 나니 좀 아는 예술가 같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난감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볼수록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지 점점 재미있어지고 영감을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갈수록 이야기의 배경과 내용이 좀 더 익숙하고 현대적으로 변주된 덕도 컸습니다.

 

총 340분 하고도 25초 분량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염소와 말, 가짜 피와 우유, 물과 빗물, 흰 옷과 까만 옷과 빨간 옷, 복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의 성기입니다. 아방가르드 연극답게 이 연작 속에는 대사도 많지 않고 움직임도 많지 않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고 각각의 장면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한 상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회화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초기 영화 형태인 움직이는 사진 같습니다. 숨을 죽이고 저 사람은 뭘하고 있나, 누군가, 왜 저러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들죠. 그리스비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염소와 말 등 앞에서 언급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더욱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모른다해도 마찬가집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뭐든 한 가지로 해석하고자 하면 쉽고 그게 아니라면 복잡하고 모호하고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단한 생각이 머리를 떠도니까 말입니다.

 

겁에 질린 벌거벗은 남자, 하반신만이 천장에 매달린 소년 혹은 소녀, 나오지 않는 젖을 짜는 노파, 기저귀를 차고 월계관을 쓴 젊은 남자, 나폴레옹의 후예들로 보이는 군인들(파리 공연), 로마교황을 연상시키는 무기력한 노인과 교활한 사제들(로마 공연), 부족한 물과 그 때문에 늘 죽음을 면전에 맞는 기분으로 사는 부부(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만)(마르세유 공연) 등이 연작에 등장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설명한 대로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자생하는 비극]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시기와 공연 장소에 맞게 끊임 없이 변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전혀 없던 서사가 강화되기도 하고 자연스레 대사가 늘어나기도 합니다. 한참을 보다보면 오히려 그렇게 관습적인 형태의 연극이 더욱 어색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듭니다. 그 대화들은 어떻게 들으면 철학적이고 또 어떻게 들으면 전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연작의 후반으로 갈수록 대사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배우들이 표정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대사도 없고, 배경음악도 거의 없고, 배우들에겐 표정이나 제대로 된 얼굴도 없습니다. 얼굴이 있어도 계속해서 복면이 씌워지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동그란 눈과 입매만 보입니다. 이 때의 표정은 일상적인 표정들이라기보다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과장되고 극단적입니다. 과장된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정확히는 몰라도 왠지 알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쁘고 행복하기보다 두렵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장면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크리닝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와 연극이 행해진 바로 저 장소와는 이미 많은 시간차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더, 혹은 두 번 이상 장막을 칩니다. 많은 장면이 연극이 행해지는 공간과 실제 그 곳에 있는 관객 사이에도 한 단계를 더 만들어둡니다. 유리벽을 두거나 커튼을 치거나 뒤돌아서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 관찰하고 생각하게 둡니다.

 

나체나 흰 옷에 뿌리는 시뻘건 피도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부르지만 볼수록 너무 새빨개서 가짜 피구나 하는 안도를 불러 극에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연극이나 영화라면 그걸 보면서 아 피다, 아프겠다, 조금씩 감정이입을 하게 되겠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속 핏물들은 가짜인 게 너무 분명해서 저건 누구의 피일까, 왜 저렇게 뿌려대는 걸까,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졸 틈도 주지 않습니다; 6시간 내내 1초도 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굉장히 몰입해서,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의외일 정도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각 동물이나 인물이나 피나 그 외의 것들이 대부분 상징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걸 알고 나서 보면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기왕에 못 본 거 못 봐도 많은 걸 스스로 상상하고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더욱 흥미진진할 것을 압니다. 서사보다는 상징이 많다고 했던 생각도 바뀔 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그 모든 빈 공간과 빈 시간과 움직임 없음이 다 서사일지도 모르죠.

 

 

각 작품의 크레딧과 아주 적은 분량의 대사 혹은 소리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언데,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글자막이 없어서 비록 그 사실이 미리 공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프로그램북과 리플렛입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했습니다. 참으로 심플하고 모던합니다. 이 자체도 예쁘지만 각 작품들과 결합한 이미지들은 정말로 더 예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다음에는 또 어떤 충격과 영감을 받게 될지 기대됩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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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바다 냄새 쪽빛문고 7
구도 나오코 지음, 초 신타 그림,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은 이렇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알라딘 페이스북 관리자님이 올린 이 글을 본 겁니다. 파란색 표지와 길지 않은 이 글을 읽고 나니 가슴에 파란 바닷물이 차 출렁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슴에 바닷물이 출렁출렁, 파도가 찰싹찰싹, 하는 기분을 못 참고 책을 사서 읽어보니 그 찰싹, 소리는 "잠 못 이루는 돌고래가 밤 산책을 나"와 "바로 누우면서 꼬리로 물을 두드린 소리"였습니다(아아아아). 철썩, 철썩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를 아는 기쁨은 직접 책을 읽을 분들에게 양보할게요.

 

이야기는 잠 못 이루던 돌고래가 밤바다를 산책하다가 커다란 검은 벽을 마주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고독한 걸 즐기지만 이런 날이면(이런 날이 어떤 날인지도 직접 확인하시기를 :)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검은 벽입니다.

 

입매가 야무진 은빛 작은 돌고래와 눈빛이 다정한 새까만 커다란 고래의 우정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시작'이라는 말은 어쩌면 어색합니다. 우정이라는 것은 도처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단지 이 친구와 저 친구가 언제 만나느냐만이 관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 신타라는 작가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도 예쁘지만 표지를 벗겨봐도 참 예쁩니다. 표지를 벗기는 순간, 마치 고래와 돌고래가 산책을 하거나 맥주와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운동을 하거나 잠이 드는 바로 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저 파란 표지를 넘기면 표지와 꼭같은 느낌의 이야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고래와 돌고래의 이야기가 주축이지만 중간중간 시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고래의 시도 적혀 있고 돌고래의 운동기구 리스트도 있고 돌고래와 고래가 쓴 편지들도 있고 돌고래가 뽑은 고래 작품 베스트 10도 있습니다.

 

돌고래는 너무 훌륭한 운동선수이고, 고래는 으아아아 정말 멋진 시인입니다. 고래가 쓴 시들을 읽으면서 혼자서 하하하하 웃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져서 찔끔거리기도 합니다. 정말 아름다워서 '아아아아 너무 아름다워!'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집니다. 실생활의 구어체 대화에서 '아름답다'는 말 보다는 '예쁘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고래의 시를 감상하고 나면 또 고래와 돌고래의 대화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아아아 너무 아름다워!'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립니다.

 

책의 분량 때문에 고래가 쓴 소설은 전문을 읽어볼 수 없었지만 돌고래 선정 고래 작품 베스트 10에서 대략의 줄거리와 제목 정도는 엿볼 수 있습니다. 고래가 쓴 모험소설에 등장하는 악당이 너무 나쁘지가 않아서 돌고래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 새로운 문학의 장르도 탄생합니다. 일명 '운동회소설'입니다.

 

 

혼자 깔깔깔깔 아하하하 웃습니다. 고래의 메모장에 '책갈피, 다시마 숲에서 따 올 것.'이라는 메모를 훔쳐볼 때나 태양에게 '불가사리는 못 됐어'하고 고자질하는 산호나 '나 오징어를 사랑하게 됐어'하고 고백하는 문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처음엔 좋은 구절에 줄을 치며 읽고 너무 좋은 걸 나누고픈 마음에 페이스북에도 옮겨 적고 하다가 곧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줄긋지 말 걸, 안 그은 부분이 아쉽고 그렇다고 모든 구절에 다 줄을 긋자니 괜한 짓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 모든 에피소드, 글자 하나하나를 다 마음에 담고 싶습니다.

 

입을 열면 그 안에 소중한 것들이 다 들어있는 고래처럼 이 책의 모든 글자와 그림과 행간의 비어있는 공간과 행간의 꽉 찬 공간까지 빠짐없이 담고 싶습니다. 엄마가 퍼준 밥처럼 꾹꾹 눌러서 다 담고 싶습니다.

 

 

책띠에는 돌고래가 고래에게 쓴 편지가 적혀 있습니다. 편집자님이 이 책의 수많은 문장들 중에 과연 어떤 걸 책띠에 옮겨적을까를 결정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저라면 머리를 쥐어뜯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각자의 친구를 떠올릴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마침 오랜 친구를 만나 책을 선물하고 집에 돌아와 책을 마저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까똑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엔 까똑이나 문자를 많이 하게 되면서 전화로 목소리 듣는 일은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이게 좋기도 합니다. 우선 더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되고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으니까 다시 보고 싶을 때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고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돌고래는 기분이 좋아지고, 고래는 돌고래 머리를 씀다듬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음에 남은 바닷물의 일렁임을 더 써 봐도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저는 이만하고 친구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직 나가보지 않았지만 밖은 날씨가 좋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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