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의 남녀관계는 마름과 소작인이라는 계급구조에 가려진 빛바랜 사랑이거나 짝사랑이다."
"그건 너무 확대해석 아이가. 점순이와 머스마(사내아이의 강원도 방언)의 애틋한 사랑이 본질이제."

청량리역에서 김유정역까지 가는 전세 기차 안에서 일행과 김유정 작품에 대해서 데퉁스런 토론을 하던 중에 진행요원에게 '지적'받았다. 4월 27일 일요일 아침잠을 달래고 부랴부랴 9시에 청량리역에서 집결하여 다시 청량리역으로 돌아온 시간이 저녁 8시 반이었으니 11시간 넘는 일정을 소화한 셈이다. 김유정 문학촌에 찾아가는 길에는 유난히 미복행색의 인물들이 많았다. 인하대 국어교육과 김영 교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제2회 유정문학상을 받은 김중혁 작가의 시상소감을 듣고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며 매우 흥분하는 눈치다.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온 교수도 따로 소개를 하기 전에는 존재를 숨기려고 하였다. 나도 이참에 '시민기자'라는 명함을 감추고 '문청(문학청년)'으로 김유정을 맞고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윤리강령 첫줄에 "시민기자임을 당당하게 밝히라"고 되어 있는데, 운치 있는 문학기행 아닌가. 올해로 김유정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서 그런지 손님이 워낙 복작거렸다.  


 

333 : 청량리에서 김유정으로 향한다는 기차표의 표시가 한결 운치가 있다. 김유정 작가를 오랫동아 연구해온 유인순 교수에 의하면 작가의 이름으로 역명을 지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일본에도 사람 이름을 딴 역명이 있지만, 문인이 아니라 무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유인순 교수의 책 위에 열차표를 살짝 포개보았다.

 

 

열차 안에서 동백가지 꺾고 '호드기'를 직접 불다

 

김유정역으로 찾아가는 열차에는 문학적 격조가 넘쳐났다. 김유정은 당대의 작가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프리미엄을 얹지 않고도 흥미롭게 읽힌다. 그것은 당시 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따스하면서도 치밀하게 관찰해내 그들의 삶을 밀착된 언어로 농도 있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인순 교수에 의하면 당시의 방언과 비속어, 육두문자, 관용어 등을 가리지 않고 문학 작품 안에 담고 있다. 예컨대 '낙엽'(落葉)이라는 한자어를 쓰지 않고 '떨잎'이라는 우리말을 구사하며, '추수'(秋收)라는 말 대신 '가을걷이'를 사용했다. 이는 의도된 우리말의 채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표준발음기호와는 다르게 춘천의 당시 말들을 그대로 소리나는 대로 옮겼기 때문에 사전에 잡히지 않는 낱말이 많았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해독하기 어렵다는 일반의 비난이 적지 않았으나, 한국문학전집의 김유정 편 <동백꽃>(문학과지성사) 책임편집을 맡은 유인순 강원대 교수는 "띄어쓰기와 문법구조를 전혀 무시하고 작품을 썼던 작가 이상은 관용하면서 김유정의 실험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유 교수는 전집 편집 당시 구절 하나, 기호 하나를 가지고도 출판사의 편집자와 매일같이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그래서 김유정의 텍스트는 반드시 원본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다. 현재 도서출판 '강'에서 <원본 김유정 전집>이 출간된 상태다.
김유정으로 가는 열차는 '동백꽃 열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동백꽃은 가수 이미자가 부르는 붉은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에서 나는 노란 꽃이라는 것이 김유정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를테면 <소양강 처녀>에 나오는 동백이 바로 그 노란 동백이다. 이 같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들은 '동백가지'를 방문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가지를 잡고 그 끝을 깨물었더니 강한 향기가 풀풀 올라와 코를 확 찔렀다. 작품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점순이'와 '나'가 '노란 동백꽃 속으로 함께 뒤섞여 파묻히는 장면이 나오는 데, 그때 정신을 아찔하게 했던 '알싸한 향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점순이가 머스마에게 수작을 부릴 때 사용하던 '호드기'도 직접 불어 보았다. 대개 '서울 촌놈'들이어서 '픽 픽'하는 바람 소리만 났지만, 개중에는 제법 구성진 가락으로 호드기를 뽑는 이들도 있었다. 당찬 계집 점순이가 무척 궁금했다.

 

19 : 알싸한 향의 동백가지와 호드기를 김유정의 책 위에 올려놓았더니 퍽 어울렸다.  


'김유정' 이름이 들어간 상을 받는다는 것

 

39 : 김유정역은 1914년 신남역으로 불렸으나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2004년에 김유정을 기리기 위한 마을 주민의 성원으로 김유정이란 이름을 찾았다.

 

 

강원도 춘천에 소재한 김유정 역에 도착했다. 김유정 역은 경춘선이 개통된 1914년 당시의 행정지명인 신남면의 이름을 따라 '신남역'이라고 불렀으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작가를 기리고 작가의 고향인 실레마을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꾸기 위해 2004년 마을주민 전체의 협의에 따라 역명을 '김유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단체사진을 찍고 역사를 나섰더니 색동 차림의 꼬마 농악대가 손님을 맞았다. 흥겨운 길트기를 따라 김유정 문학촌으로 들어가자 마침 '제2회 김유정문학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김유정문학상은 한국수력원자력(주) 한강수력발전처가 재정지원을 약속해 김유정 소설의 문학사적 가치 전승은 물론 한국소설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우수한 작품을 시상하고자 지난해 제정했다. 상금은 3,000만원인데, 이 유래 또한 매우 문학적이다. 김유정 문화행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상금을 후원한 한국수력원자력의 전 사장이 남긴 말이 일품이다.

"북한강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지원한다." 

 김유정문학상은 원래 11월에 시상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축제일에 맞춰 일부러 6개월 안의 작품만 가지고 평가를 했다. '변경된 룰'에 의해서 행운의 주인공이 된 작가는 펭귄뉴스를 쓴 김중혁 씨다.  

근작 10편 중에서 이승우의 <실종사례>와 임철우의 <봄비는 내리고>, 김중혁의 <엇박자D> 세 작품이 결선에 올랐다. 결선 심사는 문학평론가 김치수 씨, 소설가 오정희 씨, 김유정 문학촌장 전상국 씨가 맡았다. 김유정 문학상 심사위원회는 김유정 문학상의 취지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평가 대상작품이 "작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야 하며, 김유정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와 삶의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하며, 출품작 중에서 걸작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으로 각 작품을 평가했다고 밝혔다.

오정희 씨는 심사평에서 임철우의 경우 마지막 결말의 구성전개는 인정할 만하지만, 자위적 설정이 노출되어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을 탈락 이유로 밝혔다. 이승우의 작품은 지하철 사고를 계기로 평범한 부분의 관용과 이해관계 등을 잘 표현했으나 작가의 평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김중혁의 작품은 "자칫 소홀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에 천착하여 따뜻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합창에서 엇박자를 낸 사람을 포착해서 삶의 모습과 연결시키려는 참신성과 구성의 치밀성, 주제의 현대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심사위원 전원의 동의를 얻어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수상자인 김중혁 씨의 당선소감은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소감문의 내용 또한 '수작'이므로 내가 듣고 적은 전문을 옮겨 본다.

 

김유정 선생 덕분에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곳에서 뜻깊은 상을 받게 되었다. '김유정'이란 이름이 들어간 상을 받게 되어 좋겠다는 동료 작가들의 시샘을 많이 받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기쁨을 실감했다. 10대 후반 나는 보일러 수리공이 되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싶었는데, 엉뚱하게도 전국 도로에 보일러를 깔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운 눈을 녹이고 그보다 더 차가운 노숙자의 '등어리'를 데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바꾸거나 수리하여 실질적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내가 쓰는 소설이 실질적 도움을 주는지 의심을 많이 했다.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술이 대단하지는 않을지라도 사람들에게 소용이 된다고 생각한다. 콧노래나 낙서, 좀전에 길트기를 구경하던 아이가 흥얼거리던 노래 자락 순간순간이 예술이 아닐까?

나는 게으르다. 늦게 일어나고 빈둥거리고 빈번이 약속을 깨고 중요한 것을 방치하기 일쑤다. 2,000년에 소설가로 등단하고 올해에 겨우 두 번째 책을 냈다. 하지만 게으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고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느려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상이 큰 응원이 될 것이다. 나는 게으르기 때문에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속도는 계속 유지할 것이다. 기분 좋아서 빨리 내달리거나 부담스러워 미적거리지도 않겠다. 나는 내 속도로 가겠다.

 

143 : 제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자로 <펭귄뉴스>의 작가 김중혁 씨가 선정됐다. 당선작은 <엇박자D>

 

 

'작가 이름'의 문화 행사 퇴색되어 가고 있어 아쉬워

 

한편 이번 시상식에서는 김훈, 은희경, 윤대녕, 전경린, 김애란, 김연수, 강여울 등 대한민국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작가들이 모두 모였다. 때문에 나의 사진기는 매우 즐거웠다.

김유정 문학기행에서는 이 밖에도 이팔 청춘들이 두 명의 점순이가 되기 위해 경합을 벌이는 일명 "점순이를 찾아주세요" 행사를 가졌다. <봄봄>의 '참새만한 점순이'와, <동백꽃>의 '당찬 점순이'에게 각각 30만원의 거금이 상금으로 쥐어졌다. 뿐만 아니라 <동백꽃>에서 벌였던 '닭싸움'(투전)을 재현했다. 실제로 고추창을 듬뿍 먹여 싸움을 벌이는 맛이 여간 매콤하지 않다. 직접 닭을 잡는 '닭잡이'를 했다. 가장 화끈하게 닭을 잡는 손님들에게는 '토마토' 한박스가 택배로 배달되었다. 모두들 흥겨운 '닭놀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닭을 잡으려고 날뛰고 날아다니고 하는 통에 사람이 닭을 잡는지 닭이 사람을 잡는지 헛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른 팀들은 김유정 작품에 실렸던 장소들을 답사했다. 유인순 교수와 전상국 촌장이 안내를 맡았다.

이번 행사의 실무를 맡은 뮤지엄뉴스(www.mnews25.com)의 곽교신 편집국장과 열차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다가 '인터뷰'가 되고 말았다. 나는 문학행사를 누리며 행복했지만, 운영을 맡은 그는 썩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세한 부분에서 운용상의 미진함을 보인 점을 아쉬워했다. 예컨대 '닭잡이'를 위해 준비한 비용이 100만원에 달하지만 닭이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점 하며, 닭을 '처리'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상품권'으로 교환해달라고 사전에 제안했으나 결국 준비가 되지 못했다.

그보다 그는 문화행사의 취지를 점점 퇴색돼 가는 세태에 안타까워했다. 예컨대 효석문학상은 얼마 전 지방자치단체가 행사를 접수하면서 경제적 효과는 톡톡히 얻었으나 최초의 취지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한 학교 선생님이 학교 내에서 백일장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행사까지 키워놓았지만, 그는 현재 지쳐서 손을 놓으려고 한다는 전언이다. 다행히 '김유정 문학행사'는 김유정의 높은 작품성과 이를 아끼는 격조 높은 독자들 덕에 현재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것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일행 중 한 명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실용정부가 섰으니 그 다음은 알 수 없겠네요."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4-2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시민기자'님 덕분에 안방에서도 분위기를 충분히 맛보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강원도쪽은 못 가봐서...김유정이나 이효석 관련된 곳 다 가보고 싶어요.
동백꽃은 강원도에선 '동박꽃'이라고 불렀다죠. 작년에 어머니독서회에서 '동백꽃'토론하고 올렸던 리뷰가 있는데, 부시럭부시럭~

승주나무 2008-04-28 15:46   좋아요 0 | URL
잘 키운 시민기자 열 기자 안 부럽다 ㅋ 이런 건가요^^
눈이 즐거우셨다면 다행입니다. 리뷰를 찾으면 제에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늘빵 2008-04-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었겠군요! 아쉽.

승주나무 2008-04-28 15:4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아쉬워요~ 먹고살기가 쉽지 않죠^^;;

2008-04-2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4-28 15:4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지적 고마워요~

프레이야 2008-04-2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갔었어요.^^
강원도 동백꽃의 알싸한 향은 맡아보지 못했지만 사춘기 남녀의
그 마음은 아뜩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승주나무 2008-04-28 15:48   좋아요 0 | URL
네~ 온통 봄봄과 동백꽃에 대한 이미지였던 것 같아요~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 그 작품들이니까요.
저는 그보다 그의 도시적인 작품들에 더 관심이 가더라구요~
시간이 되면 그에 관한 리뷰를 좀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Jade 2008-04-2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 재밌으셨겠어요~~~~ 저도 꼭 가보고 싶네요 ㅜㅠ

승주나무 2008-04-28 15:48   좋아요 0 | URL
진짜 아쉬워요~ 제이드 왔으면 누구보다 더 즐거워했을텐데~
웬디양 님이 더 아쉬워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