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과 지하에 마련된 작은 식당에서 이미 식어버린 채소 수프 한 그릇에 빵 한 조각을 먹고 나와서는 불이 켜진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나는 책 읽기가 노동인 인간의 슬픔 같은 것을 느낀다. 읽기와 쓰기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작은 항의 같은 것도 들어있겠다 싶다. 빠른 시간 내에 최대의 결과를 얻어내야만 하는 시대정신에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우울도 분명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 해치우지 못하는 일이 진득한 책 읽기이다. 한두 장에 지나지 않는 글을 일주일 이상이나 붙잡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저 별 같은 이름 모를 수많은 책들이 누군가 와서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도서관. 내가 발굴하지 않으면 도서관이라는 무덤 속에서 사라질 책들. 그리고 책 읽기가 끝나도 다시 열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책들. 책 노동자들이 자주 우울한 건 그들의 노동으로도 책 읽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p.204
아호수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읽으며, 내 일생에 있었던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거의 죽을 것처럼 차오르던 열정과 실망 뒤의 아픔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는지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순간에, 또한 사랑이 떠나가고 난 뒤에 저절로 솟아오르던 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내 속으로 들어와 거대한 물 흐름을 만든다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니 떠난 사랑들이여, 당신들이 남기고 간 물은 인공 호수가 되어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에 머물고 있음을 아시라. 어떤 사랑도, 비참하게 배반된 사랑마저도 사랑이었으므로 그 사랑의 마음이 물처럼 흐르던 동안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삶은 살 만했는가. 물은 흐르고 사랑은 그 밑에 고여 흐르지 않는다.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