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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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는 폭스트롯이다.(왜 있지 않은가 '사교댄스'의 대명사.)폭스트롯은 192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춤이다.주로 래그타임이나 스윙재즈의 발랄한 리듬에 맞추어 춘다.어원을 살펴보면 재미있다.폭스 트롯(fox trot)을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여우의 빠른 걸음'정도가 되겠다.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골머리를 싸고 계신 예비 학자분들께서는 자신들을 심각하게 만드는 텍스트를 그딴 가당치도 않은 춤에 비유한다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하지만 가라타니 선생은 이 비유를 좋아할 듯 하다. 고진은 분명히 이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폭스트롯의 경쾌한 스텝을 음미하는 마음으로 읽혀지길 바랬을 것이기때문이다.

 고진은-그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이 책을 '수능 앞둔 학생들이 보는 100일 마무리 총정리 하이라이트 버전으로 썻다'고 밝힐 법 하다.(물론 고진이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고진은 이 책이 고딩이나 직딩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했다.(이건 고진이 직접한 말이다.) 정리하자. 이 책<세계공화국으로>는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이후 만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가라타니 고진'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저자 스스로 요약 정리해주기 위해 만든 책이다.영화로 비유하자면 '반지의 제왕 따라잡기 디렉터스 버전'이다.

이 책이 대중을 염두에 둔 감독의 배려 섞인 책이라고 할 지라도 굳이 사교댄스가 될 필요는 없다.하지만 가라타니 선생은 한번 더 친절을 배푼다.책의 한 장 한 장이 폭스트롯의 스텝처럼 경쾌하다.강의투의 편안한 어법에 애써 애둘러 말하지 않고 요점과 핵심만을 탁탁탁 소리를 내며 찍어내는 문체다.그러니 독자의 손이 래그타임을 따라하듯 책장과 만날 수 밖에 없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현재의 체제를 '자본=네이션=국가'가 '세가지 교환양식의 접합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 삼자 연합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서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국가 해체로 가는 라인과는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먼저 사적 유물론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파악하여 역사를 재구성한다.교환 양식은 크게 호수(증여와 답례)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상품교환(화폐와 상품)으로 나뉜다.그리고 마지막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념으로 존재하는 네번째 교환양식(교환양식D)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 양식에 대응하는 사회구성체를 갖는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에서는 지배적 교환양식이 상품의 교환(교환양식C) 이다.(물론 각 양식은 단계적이지 않으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비중이다.) 하지만 반대로 여기서 벗어나려는 내적 움직임을 갖는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어소시에이션'이라고 하고 이것이 칸트의 '규제적 이념'으로서만 역사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실제로 없으면서도 있는 '초월적 가상'이다)

정리하면 가라타니의 작업은 사회구성체를 '교환양식'으로 파악하여 구분하고 이후 자본,네이션,국가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맥락에서 각자 자리매김하는지 그리고 이 셋이 어떻게 견고하에 손발을 맞잡고 실체성을 갖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가라타니는 마르크스가 괄호쳤던(등한시했던) '국가와 네이션'의 성립과정에 대해 많은 장을 할애한다.그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공동체 사이에서 약탈-재분배(교환양식B) 사이에 기초한다고 본다.또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국가를 타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에 반대한다.쉽게 말하자면 국가는 다른 국가의 존재를 실존의 토대로 갖는다는 것이다. 일부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국가가 지배계급을 위한 봉사 기관이라는 주장에도 선을 긋는다. 통속적인 마르크스의 혁명론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후 국가는 소멸해야한다는 당위론은 부정된다.

가라타니는 국가의 기원을 동양적인 전제국가,즉 동양적인 세계제국에서 부터 찾는다.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과 같은 고대제국들이다.이 제국들은 전제적인 권력과 관료지배를 형성하지만 공동체의 호수원리를 훼손시키지 않고 유지되었다.반면 이후 주변에서 분화하게 되는 국가들(그리스나 로마같은)은 제국 문명의 여러가지 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집권적 국가체제는 수용하지 않는다.이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정점에 이른 것이 서유럽의 봉건제 시기이다.이 시기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집권적인 중앙화 대신 분산과 다중심화가 목표인 시점이었다.이 시기는 호수관계(교환양식A) 에 바탕을 둔 교환관계가 지배적인 양식을 갖는다.

유럽에서는 절대왕권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진다.이것은 도시 발달과 밀접하다.절대 왕권은 도시와 부르주아의 결탁의 결과이다.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은 결국 상품교환과 화폐경제 원리의 승리라는 형태로 결론지어진다.자본과 국가의 결합은 결국은 절대왕정기를 기점으로 해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점에 이루어진것 이다.

네이션에 대해서서 가라타니는 이것이 세계제국의 분절화나 근대 제국주의의 분절화과정에서 생긴것으로 본다.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처럼 그저 네이션을 환상으로 보고 깨어나야만 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계몽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네이션의 실체에 대해 존중한다.그리고 네이션이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이라는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에게는 어떤 해방의 가능성,또는 상상력이 있는가? 가라타니가 생각하는 해방의 힘이 벌어질 수 있는 장은 '생산' 영역이 아니라 '소비'영역이다. 가라타니는 기본적으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자본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그러면서 노동자의 힘을 소비자의 힘에서 찾는다.노동자는 종속적인 반면 소비자는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서 자본과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업장을 떠나면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그는 소비사회에서 옛날 방식의 계급투쟁은 무효화되어간다고 말한다. 그는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 나타났을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이 논리로 보자면 소비자운동=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된다.그리고 소비자의 비폭력적인 보이콧 운동이 파괴력을 갖출 것이라고 보는 듯 하다.나는 이 지점이 영 석연치 않다. 소비자라는 존재는 파편화 되어 있다.일종의 음모론 처럼 보이지 만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소비자로 탈취시켜 버린다.최소한  그런 이데올로기적 작업은 자본의 현명함 속에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원도 이마트가면 전부 소비자일뿐이다.또한 현대 사회에서 소비를 한다는 행위 자체에는 단지 사용가치의 구입뿐 만이 아니라 차이나 신분상승이나 하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많이 내재해 있다. 소비자라는 층을 프롤레타리아라는 애매모호하지만 정치적 개념으로 묶어낼 수 있는 계급으로 치환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런 질문이 생긴다.자본주의가 이미 소비자를 포섭해낸 단계에서 과연 소비자가 변혁의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자본 자체에 흠결을 내는 방식보다는 기업의 도덕성을 독려하는 도덕주의운동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결국 가라타니식으로 말해도 '도덕주의적 소비자운동'으로는 '교환양식의 변화'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것은 아닌가?

가라타니의 사회구성체에서 네번째인 어소시에이션은 자발적인 상호교환 네트워크이다.이는 삼자연합의 교환양식에 대항하는 전선을 갖는다.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이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장적 사회를 닮아 있고 동시에 시장경제의 경쟁이나 계급분석에대해 상호부조적인 교환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와 닮아있다고 밝힌다.그는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의 가치가 보편종교에 기원한다고 말한다.초기 기독교 사상을 사회주의와 연관짓는 연구들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역사적으로 보편종교가 사회운동을 낳고 자유의 호수성이라는 윤리적 이념을 펼쳤다고 말한다.물론 보편종교가 정치적,사회적 변혁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가라타니는 '자본=네이션=국가'가 완결체이며 영속체다.그러므로 국가의 사멸을 꿈꾼다거나 자본에 대한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에 대해 경계한다.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궤적하에 있다.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어소시이세이션'을 이루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칸트를 인용한 가라타니는 국가의 본성이 '반사회적인 사회성'에 있다고 말한다.이런 속성은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가라타니는 이러한 자기실현적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현실주의적 타협안을 세계연합 같은 것에서 찾는다.칸트가 그러했던 것 처럼.그는 각 국의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한다.이것은 일종의 '위로부터'운동의 양상을 띄며 그 결과 새로운 교환양식에 의한 새로운 사회가 구축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계공화국으로>는 칸트의 아이디어와 마르크스의 비판적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그는 그의 주요 주장들이(어소시에이션 같은)것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규제적 이념'이라는 말로 현실성문제를 피한다.그러므로 주장들이 현실성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재구성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의 실천성 문제들까지 재구성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그의 주장과 논증 하나하나를 비판할 능력은 내게 없다.그렇지만 가라타니가 전개하고 있는 자본=네이션=국가의 연결고리와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의미에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내용 또한 손도 못 댈만큼 어렵지는 않다.춤추듯 읽자.거대한 주제이며 알려고 들면 한 챕터마다 논쟁과 공부거리가 넘쳐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즐거운 자극 아닌가..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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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9-06 00:32   좋아요 0 | URL
리뷰 또한 폭스트롯풍이군요.^^

마늘빵 2007-09-06 09:38   좋아요 0 | URL
아니 언제 춤까지 섭렵하셨습니까. 역시 왕년에 작업의 달인에겐 비법이 따로 있었군요. =333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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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포영화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메노키오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난다.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박쪼개진 듯 나뉘어진 무덤에서 둥둥 떠나오는 소복귀신보다 리얼하다.세대간 소통을 위해서 좀 최근 비유를 쓰자.그렇다.이것은 <링>의 공포를 능가한다.(..이것도 오래되었나 ? ^^;.. 네!!)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링의 관절꺽기 귀신이 TV를 뚫고 나오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책장을 기어나왔다.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뚜벅 뚜벅 (# 음향효과..찌이이이익...)

도대체 관뚜겅 덮고 잘 자고 있는 방앗간 주인을 400년이나 흘러서 꺼낸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누구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를 깨웠을까? 그가 깨워낸 살아있는 좀비가 역사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박사는 알았을까?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는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학의 첫 단추를 끼운 고전이다.마치 탐정소설 같은 이 역사책을 읽다보면 왜 이탈리아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방앗간 주인을 깨워서 20세기에 되살려 놓았는지 알 수 있다.박사의 음모를 알고 싶은가?  진즈부르그 박사는 실로 엄청나다.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공동묘지와 야산,또는 어느 산비탈에 뿌려진 모든 시체들을 깨워내려는 것이다.이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전지구적 카니발 아니겠는가? 

<치즈와 구더기>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았던 필부필남들이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일깨우는 책이다.즉 야산이나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의 역사이다.이는 민중의 역사이며 나의 역사이기도 하다.진즈부르그 박사는 '종속계급'의 역사라고 말한다.이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그래서 역사책은 언제나 '태정태세'와 '당파싸움'의 기록일뿐이다.그는'미시적'이라는 의미를 '현미경적 분석'이라고 말한다. 즉 갑오년 전쟁이 호미 들고 나갔다가 나주 부근에서 종적을 알 수 없게된 개똥이 아버지가 연구 대상이다.개똥이 아버지가 어디서 만든 무슨 브랜드의 호미를 들었는지..개똥이 아버지가 어쩌다가 거기에 휘말리게 되었는지..개똥이 아버지가 밥은 먹고 다녔는지..미시사는 개똥이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다.사료만 있다면 CT와 MRI도 불가능할게 없다.진즈부르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한 평범한 개인에게서 특정한 역사기간에 존재한 한 사회계층의 모든 특징을 어떤 소우주 (마이크로코스모스)속에서 추적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민중들의 역사라고 하늘 아래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아니던가.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민중들의 역사라는 것도 지배계급의 역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독단적인 것은 아니다.진즈부르그는 바흐친의 '문화 상호간 교환모델'을 받아들여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그에 영향을 미친 지배계급의 문화와 사회적 변동을 읽어낸다.

메노키오는 16세기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울리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살았던 방앗간 주인이다.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마을에서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존재였다.그렇다고 그가 무슨 정규 교육을 받은 엘리트는 아니었다.그는 1582년 종교재판소에 이단 혐의로 피소되었다.이후 투옥과 석방이 이어지다가 1599년에 화형에 처해진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를 죽음으로 이끌어간 그의 우주관과 종교관에 대해 추적한다.은밀하고도 친절한 추적이어서 읽는 동안 이것이 역사서인지 탐정소설인지 헷갈린때가 있다.물론 이 추리소설에는 잔혹한 살인이나 얽힌 치정관계나 히치콕식으로 표현하자면 '맥거핀'같은 것들은 없다.조금 남달랐던 방앗간 주인의 뇌 속을 들어가보는 정도일 뿐이다.물론 그가 재판관에게 증언한 내용이 객관적 추적의 열쇠가 된다.그리고 하나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들에 대해 유추한다.그의 머릿속에 악마가 돌아다니게 한 것.그것은 다름 아닌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책'이었다.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종교관은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는게 나을 듯 하다.대략 이렇다.그는 유물론적이었으며 4대원소로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다.이 책의 제목<치즈와 구더기>는 다름아닌 메노키오의 우주론이다.또한 그는 범신론적이었다.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했으며 동정녀 마리아를 세속화시켰다.교회의 의례들을 무시했으며 복음서를 장사를 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겼다.관념적인 종교성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종교의 핵심으로 보았다.또한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했으며 모든 신앙이 동등하다고 믿었다.

뭐가 이상하냐고? 21세기에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시라..메노키오의 시대에는 종교재판소에 끌려갔어야 마땅하다.메노키오는 자신의 종교관과 우주관을 저자거리에서 이야기하고 다니다가 고발당했다.종교재판 과정에 메노키오는 자신의 신념을 종교재판관들에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최소한 말귀를 알아먹는 엘리트들을 만나서 신나게 토론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종교재판관들 방앗간 주인 주제에 이단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들어볼 만한 이야기를 풀어헤치는 메노키오에게 관심을 보였다.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주장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가 읽었음직한 책들과 만났음직한 사람들을 따라간다. <신곡>,<성서의 약술기>,<멘더빌의 기사>,<코란> 등등이 유력하게 추정된다.또한 당시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던 루터파의 교리,재침례파의 교리등의 영향을 추정한다.그렇지만 메노키오는 종교재판과정에서 그의 모든 이단적인 생각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진즈부르그 역시 메노키오의 이 주장에 공감한다.메노키오가 몇 몇 금서들을 읽었고 또 몇 몇 위험한 인물들을 만났지만 그의 주장은 그의 것이라고 말한다.왜냐하면 메노키오는 읽엇던 책을 의식했던지 의식하지 못했던지 왜곡하고 단순화시키고 재구성하여 자신의 가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즉 그가 읽었던 책이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즈부르그는 이러한 '왜곡을 통한 재구성'에 주목하며 이에 영향을 준 것들로 농민들의 급진주의와 농민적 물질주의를 예로 들고 있다.그는 메노키오의 독자적이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역사학이 소홀히 여겨온 민중문화의 전통에서 나온것이며 이러한 사고가 지족적이고 심층 구조적인 민중문화의 토대에 바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즈와 구더기>가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상상력은 실로 대단하다.지나가는 사람 하나 하나가 역사가 되어버린다.역사에는 수많은 개똥이 아버지들이 있었고 메노키오들이 있어 왔다.단지 우리들의 인식 영역 밖에서 살다가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이들의 존재감이 느껴져서 가슴이 묵직하다.그리고 한가지 더 마을을 뻑뻑하게 만든 것...

메노키오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종교재판'을 떠올렸다.우리에게도 수많은 메노키오들이 있지 않았던가...그들이 살아나기를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지니고 있다.....물론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잇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다.다시 말해서 구원된 인류만이 그들 과거의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하게 될 것이다.다시 되살리는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은 그날,즉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의 일정표가 될 것이다.".......발터벤야민

 ## 무화과나무님께 감사를..그리고 보다 학술적인 글을 원하시는 분들도 무화과나무님의 리뷰를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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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8-28 16:41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덕에 도킨스의 새책이랑 번갈아 읽고 있는데
그게 또 신선한 재미가 있더라구요 ^^

드팀전 2007-08-28 16:55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신>을 보고계시는군요..^^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듯이 저의 무신론도 과학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안보고 있는데 ^^ 사실 밀린 책들이 많아서요
전 무신론자인데.. 문학적으로는 범신론자이기도 하구요...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적 관념론이 사회에 끼치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악영향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입니다.물론 갑의 약이 을의 독이고 바이스벌사 하기도 하지만..^^

2007-08-28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8-28 21:19   좋아요 0 | URL
최근에는 별로 보지 않는데 그래도 그분의 책을 너댓권은 읽었던 듯 합니다.
역사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던적 접근으로 분류하는 편인 듯 합니다.제가 전공이 그쪽이 아니라 정통한 것은 아닙니다만....
일단 읽기는 좋지 않을까요...난해하게 쓰는 편은 아니니까
저도 말씀하신 그 책을 제일 처음 읽었습니다.그 책은 동시대 한국지형 안에서 고민할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이후에 나온 책들은 한국적 근대 형성지점인 구한말로 갑니다.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문제와 동아사아 문제로 넘어오시더군요.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본축은 '근대'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글샘 2007-08-29 12:02   좋아요 0 | URL
현대의 지성이란 것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암것도 아닌 것들의 연합체겠죠.
요 책은 재밌을 것 같아서 보관함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드팀전 2007-08-29 17:33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합체라...무슨말인지 모르겠지만.뉘앙스상은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듯 합니다.미시사를 한단어로 이야기해야한다면 결국 '개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듯 합니다.역사에서 '개체'의 합이 '전체'는 아니지요. 또한 구조나 제도 등의 거대담론의 영향에 무게감을 덜다보니 그 지점에서 비판이 될 수 있겠네요.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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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은 시골집 담장안에서 만난 수돗물같다.

주변을 돌아봐도 물 한 통 구할 수 없는 산길.우연히 인가를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곧 깨끗한 물이 갈라진 논바닥 같은 내 목청을 타고 흘러내길 것이라는 기대감. 발걸음이 빨라진다.낯선 집이지만 주인은 절대 물을 찾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수돗물을 콸콸 틀어 입을 적시고 있으면 주인은 컵에 차가운 보리차를 담아 온다.  '아...왜 그걸 마셔...찬물 떠왔는데'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타는 내게 머리통이 짜릿할 만큼의 차가움을 주었다.기분좋은 차가움은 살바토르 달리의 시계처럼 일상의 햇살 아래 흐물흐물 녹아가고 있는 내 의식에 죽비 한 방을 날린다.더 겸손하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충실하게 살라고 말이다.

'가난'의 해법은 세계 7대 수학난제보다 어렵다.문제는 다층적이고 역사적이다.또한 광범위하게 만연해 있다.결국 사람들은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 라는 말로 더 이상 '가난'을 나의 문제,우리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TV의 축복 아래 '전쟁'만 네모난 전자상자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가난' 역시 'TV 속 드라마'로 성격을 바꾸었다.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는 이제 TV속에서 만난다.그리고 그들을 동정한다.ARS 모금방식은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우리는 ARS 전화 버튼을 누른다.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위해 2번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얼마나 배려깊은 장치인다.이제 우리는 '가난'에 대해 할만큼 다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시혜적 지원'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근본적인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그것마저도 외면하는 상류층들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내게 그들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적들일뿐이다.) 얼 쇼리스는 '가난'이 '무력'에 대한 포위라고 말한다.

빈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물여섯 종류의 무력들을 다음에서 예시하려고 한다.이것들 중 어느 것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빈민들은 하나나 둘 ,또는 대여섯 개 정도의 무력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무력에 둘러싸여 갈아간다.....포위전략들이 역사를 거듭하면서 살인이나 사냥을 할 때 이용됐다.이 작전은 두 가지 이점이 있다.우선 사냥감을 고립시키고 탈출 가능성을 줄인다.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포위망에 걸린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일 것이다.자신이 포위당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사냥감은 절망에 빠져 외로워지고,격노하거나 자포자기하여,생각할 능력을 상실한다.탈출의 희망을 잃은 사냥감은 운명 앞에 굴복한다.자신이 포위당했음을 인식하는 그 순간,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일말의 저항심마저도 증발해버린다.오직 영웅만이 죽지 않는다.문제는 그런 영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빈민을 둘러싼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무력'은 이런 것이다.'굶주림,소외,가정 폭력,비열함,질병,감옥,정부,총,타인의 시선,학대,인종대립,지적 폭력....'

'클레멘트 코스'는 이 '무력의 포위망'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인문학'이라는 무기를 꺼낸다.얼 쇼리스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들도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에게 인문학이라니? ''못배운 가난한 사람들이 플라톤을 이해할까?' <희망의 인문학>은 이러한 편견이 어떻게 깨어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인문학'은 가난한 이들에게 '정치적 삶'과 '성찰적 삶'을 깨우치게 한다.즉 사회와 역사로 부터 배제된 자신들을 그 다시 복원시키는 것이다.이 복원작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과 자기통제를 얻게 되고 이것은 '무력'과 대치 되는 그들의 '힘'이 된다.우리 속담에도 있는 '아는 것이 힘이다'를 유비하면 여기서 아는 것은 '인문학'이고 '힘'은 '정치적 삶으로의 깨어나게 하는 힘'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떠올렸다. <페다고지>의 원제목은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교육학'이다.<희망의 인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의 총체로서 '가난한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페다고지>의 자유주의적 접근이 <희망의 인문학>이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 봤다.물론 역사적 맥락에는 차이가 있다.프레이리식 접근에는 인간해방적인 사고와 전복적인 가치가 담겨있다.얼 쇼리스는 이에 비해 자유주의적인 시각이다.좌파적 시각으로 보자면 인문학을 통한 '부르주아 사회로의 동화'가 한계라는 지적도 가능하다.그렇지만 얼 쇼리스의 인문학 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단순한 '사회적응'에만 있지 않기때문에 이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묘사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얼 쇼리스가 '클레멘크 코스'를 확산해가는 과정에 안티오크 대학의 데이비드 엘 트립과의 의견차이는 대표적인 예이며 여러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트립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행위가 잘못된 통합 탓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형성해 놓은 종잡을 수 없는 공동사회에 빈민들을 편입토록 하여 권력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으로 오인될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맥락화'를 '인문학 코스'에 개입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우리는 인문학을 그것이 발생하게 된 특정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맥락 안에 놓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또한 그러한 담론의 긍정적,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인문학이 항상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이용됐는지 새롭게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지역사회 인문학 교육이 담아야할 두번째 과제는 학생들이 저항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데이비드 엘 트립

얼 쇼리스는 안티오크의 지역사회 인문학 교육이 클레멘트 코스와는 상반된 지점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이는 한세기 전 유행했던 푸코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육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그렇지만 얼 쇼리스는 안티오크의 인문학 코스를 포용한다.결국 빈곤,교육,민주주의에 대해 동일한 윤리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세기 말에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의적 숙명론, 즉 다수의 삶을 희생시키면서 소수가 대부분의 이득을 취하는 시장 윤리에 대해 결단코 반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바꿔 말해서 경쟁할 수 없는 자는 죽는다는 윤리다. 그것은 잘못된 윤리이며, 사실상 윤리가 부재한 윤리다. 나는 계속 인간으로서 살아갈 것을 주장한다...파올로 프레이리

이제 선택은 시장이 주도하는 문화를 선택할 것인지 인문학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때문이다...사실 우리는 눈송이들 만큼이나 차이가 나면서도 눈 자체 만큼이나 흡사하다..얼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면 당연히 '한국의 인문학위기론'이 떠오른다.이 문제는 여기저기서 많이 이갸기 되어서 더할말이 없다.대신 '소비하기 위한 인문학'과  '변화시키는 인문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이 든다.나는 인문학의 본령은 후자에 있다고 믿는다.우리사회가 '인문학'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사회이기는 하다.그렇지만 그 '인문학'도 나름대로 층을 이루고 찾는 이들이 있다.내가 '소비하기 위한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쟁투에 지나지 않는다.생계문제로부터 조금 여유로와진 중산층이나 경제적 자본만으로 호기가 차지 않는 상류층들은 '인문학'을 택한다.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은 <희망의 인문학>커리큘럼에도 등장하는 철학이나 예술같은 것들이다.그들은 나름대로 독서를 통해 일정 수준을 얻는다.또한 예술작품의 감상이나 심미안등도 키울 수 있다......그런데 무언가 늘 빠져 있는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무엇일까? 거기에는  '인문학'의 정수가 빠져 있다.그저 '인문적 지식'만 채우고 가득한 것 뿐이다.그것은 '인문학'의 부활과도 상관없고 '인문학'을 하고 있는 것과도 상관없다.그것은 그저 '인문적 지식'만을 소비할 뿐이고 '누적된 인문적 지식'을 가지고 아마추어 인문학도 흉내를 내고 있는 것 뿐이다.그렇다면 그 정수라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하고자 한 모든 바가 '인문학의 정수'이다.이념의 좌우와 상관없이 <희망의 인문학>은 '변화시키는 인문학'으로서 본질에 충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일포스티노>야 말로 <희망의 인문학>을 영상화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시와 글쓰기도 클레멘트 코스 과목이다) 거기서 네루다는 소크라테스였다.그가 피신한 그 섬은 자체가 시이다.우체부 마리오도 원래 시인이다.단지 네루다를 알기 전에,시를 알기전에 그것들이 단지 돌덩이 바위섬이자 평범한 우체부였을 뿐이다.네루다는 여자꼬시기를 목적으로 하는 마리오에게 시의 은유에 대해 설명한다.예쁜 여자 꼬시기에 성공한 마리오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이제 자기를 표현하는 법을 알게된 것이다.그는 평범한 우체부에서 정치적 삶과 성찰적 삶을 사는 시인이 되었다.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섬의 소리를 담는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인문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깨우친 마리오는 섬의 소리들과 함께 시인으로 완성되었다.인문학의 힘...강당에 있지 않으며 화려한 영상,음향설비가 갖추어진 시청각실에 있지 않다.

추천)바람구두님의 극찬으로 읽게 되었다.좋은 추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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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8-12 15:17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추천에 먼저 읽은 친구 극찬에,
드팀전님의 리뷰까지...순서를 당겨 읽겠습니다

드팀전 2007-08-12 18:00   좋아요 0 | URL
제게 약간 힘이 되는 책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기회가 닿으면

바람결 2007-08-12 17:39   좋아요 0 | URL
아..저도 구입해놓고 여태 읽지 못한 책인데, 리뷰를 읽고 나니 얼른 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일포스티노>와 연결도 전혀 새롭네요. 원작은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란 책이죠? 지난해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드팀전 2007-08-12 18:0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영화는 저도 참 좋아했습니다.그리고 OST도 신선했습니다.유명가수나 예를 들면 스팅같은...유명 영화배우들이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지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 봤지요.^^ 영화속에서 묘사되지 못햇던 성적인 메타포들이 얼굴 화끈하지만 재미있었다는...^^

라로 2007-08-13 03:36   좋아요 0 | URL
추천 안할 수 없네요..
'일포스티노'와 '희망의 인문학'과의 연결,,,
필연적이란 느낌마저 들잖아욧~.^^;;;

드팀전 2007-08-13 09:18   좋아요 0 | URL
^^ 일 포스티노 재미 있었잖아요...요즘 애들은 그 영화를 잘 모르니 안타깝네.

turnleft 2007-08-13 06:57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려도 대기 중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드팀전 2007-08-13 09:19   좋아요 0 | URL
좌회전 대기중이신가요.깜빡 깜빡...신호 났습니다.좌회전은 짧으니 빨리 끊어셔야 뒤차가 나가겠네요.^^ 반갑습니다.
 
신제국주의 한울아카데미 737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제국주의'는 너무 많이 말하여져서 이제는 말하여지지 않는 용어 중에 하나이다.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기억처럼 과거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용어가 되버렸다.'제국주의'라는 용어의 과잉과 급속한 몰락은 금새 달구어졌다가 식어버리는 양철냄비같은 지적 토대의 부실함에도 관련이 있다.한때 '제국주의'는 '패권적 강대국'과 동일시되어 버리는 불운을 겪었다.아무 곳에나 '제국주의'라는 말을 붙이면 상대는 '악'의 콧바람을 뿜게 된다.'파시즘'이라는 말이 '권위주의적 군사정권'과는 다른 의미를 갖음에도 전부 다 '파쇼'라고 지칭해서 의미론적 혼돈을 불러일으킨 것과 유사하다.상표로서 '제국주의'를 일회용 젓가락처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요즘은 오히려 그런 말이 남발되던 시절이 오히려 나은 것 아니었나 싶기도하다.)실제 많은 사람들은 '미제국주의' '일본제국주의''또는 '제국주의적 속성'등이라고 하는 미디어적 수사를 넘어서서 그 속살을 고민하지 않고 사용했다.

'제국주의' 논쟁에서 언제나 중심축에는 레닌이 있다.레닌은 역사결정론적이 방식으로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걸을 수 있는 길은 '제국주의'라고 언명했다.즉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듯이 자본주의도 궁극적으로 제국주의가 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존재적 속성이라는 것이다.20세기 초 레닌의 지적은 분명히 옳았다.(그리고 지금도 그 유효성은 현존한다.)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하물며 맑스나 레닌쯤이야..자기들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교조적으로 해석되고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의미에서 맑스는 좌파내에서 훨씨 많은 비판과 재구성 작업을 거친다.'제국주의'는 그럼 어떨까?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보다도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한나 아렌트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 정치 통치의 첫 번째 단계라고 주장했다.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는 포스트모던한 '제국'논쟁과 대립되는 측면에서 고전적 <제국주의>에 더 까깝다.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입장에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과 새로운 제국주의적 운행방식을 '신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책을 썻던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전이어서 하비의 예측과 분석이 현실정합적인 것은 아니다.그렇지만 하비는 '신제국주의'가 지향하고 진행되고 있는 경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지난 이야기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주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세계체계론의 입장을 따른다. 함께 공동연구한-존스홉킨스대학에서-지오반니 아리기의 틀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아리기는 <장기 20세기>에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국가를 매개로한 자본주의 헤게모니 경쟁의 차원에서 설명한다.아리기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 체계'이다.그는 국가간 체계에서 헤게모니 국가의 등장은 '조직혁명'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은 마르크스의 위기론과 슘페터의 조직혁명론의 조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데이비드 하비 역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권력의 영토적 논리'와 '자본주의의 논리'의 모순적이 결합으로 파악한다.왜 이 관계가 모순적일까? 일단 '영토적 논리'(국민국가라고 이해해도 될 듯 하다)는 주권이 작용하는 한정적인 공간에 국민에 대한 사회적 책임,정치적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제약등이 걸리는게 많은 체계이다.반면 '자본의 논리'는 시공간에 자유롭고 고정된 영토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자본이야말로 유목이다.역사적 자본주의를 보면 결국 이 둘의 상호배치되는 논리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물론 브로델적인 모델에 따라 '자본주의는 독점을 지향하고 독점을 위해 국가를 필수로 한다'라고 환원해버릴 수도 있을 것 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이 둘은 논리적으로는 상호배제적이지만 실제로는 상호협력적이었다.아리리 역시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신제국주의>를 구성하는 데이비드 하비의 두가지 중요개념은 '시공간적 조정'과 '강탈에 의한 축적'이다.먼저 '시공간적 조정'이란 무엇인가? 이는 맑스의 과잉축적의 위기를 만드는 이윤율 하락과 그에 대한 재정식화 이론으로 부터 도출된다.맑스의 위기론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잉여와 노동력의 잉여와 관련이 있다.노동은 항상 잉여상태로 유지되어야하고 자본 역시 잉여가 없으면 돌아다니지를 못한다.데이비드 하비는 그중에서 축적되어 남아도는 '유휴자본'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시공간적 조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었다.즉 '남아도는 자본의 갈 곳은 어디인가? '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가 주어진 영토 내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내적으로 흡수될 수 없다면 이들은 감가되지 않기 위해 이윤 창출 가능성이 실현되는 새로운 지형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금융'과 '국가'이다.흔히들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차관'이라는 것 역시 '시공간적 조정'의 개념으로 보면 미국식 소비주의를 확산하는 자본의 공간적 재조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현재 '유휴자본'이 올인하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거대한 제조업의 엔진으로서 발진한 중국은 전 세계적으로 갈 곳 잃어 헤메이는 '축적된 자본'의 해우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아리기가 다음번 헤게모니 이행지로 '중국'을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궤를 같는다.

다음으로 중요한 개념은- 이 책에서 처음 소개된 것이라고 하는 -'강탈에 의한 축적'이다.여기서 말하는 강탈에 의한 축적은 식민지를 만들어서 원자재 공급시장과 상품의 수요시장을 만드는 전통적 의미의 제국주의적 강탈과는 다르다.그러므로 '모든 자본주의적 축적은 강탈이다'라는 말은 구체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마나 한 말이다.데이비드 하비는 맑스의 '시원적 축적'이 현단계 자본주의에서 설득력이 미약하다고 본다.맑스는 기술적으로 유도된 산업예비군을 제외하곤 '시원적 축적'에 대해 그닥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고 말한다.또한 데이비드 하비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세계를 자본주의화하면서 축적한다'는 테제에 대해서도 일정정도 선긋기를 한다.룩셈부르크의 테제는 자본주의 타자를 상정하기 때문이다.그런데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제국의 안과 밖이 없다'라는 분석이 나오는 마당에 룩셈부르크의 테제 역시 고찰이 필요하다.(룩셈부르크의 비자본주의 영역이라는 것은 훨씬 광범위한 범위이기때문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데이비드 하비가 이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보완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탈에 의한 축적이 수행하는 것은 매우 낮은 비용으로 일단의 자산을 방출하는 것이다.과잉축적된 자본은 이러한 자산들을 취득하여 즉각적으로 이들을 이윤 창출이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감가된 자본 자산은 과잉축적된 자본에 의해 불티나는 가격으로 판매되어 이윤 창출이 가능하도록 자본순환과정에 재회전 될 수 있다.그러나 이 점은 일종의 위기를 의미하는 감가(가격을 낮춤)의 파도를 우선 요구한다.위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합리화하도록 계획되고 관리 통제될 수 있다.

강탈에 의한 축적은 97년 IMF를 겪어 세계경제의 칼바람을 눈앞에서 목격은 우리들에게 오히려 쉬운 개념이다.TV 뉴스에 나오는 '00기업 헐값 매각' '00그룹 대규모 구조조정' '00노조 민영화반대' 등등이 전부 '강탈에 의한 축적'의 예들이기 때문이다.이런 것이다.과잉축적된 자본은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IMF와 세계은행의 이름을 단) 국내에 경영합리화를 요구한다.구조조정도 하고 인원도 비정규직화하고 복지도 삭감하고 비용도 줄이고-그 중에는 또 분명 합리적 요구들도 있다-하여간 이런 걸 다 해서 기업의 똘방똘방하며 팔아먹기 좋은 상태로 만든다.즉 딱 삼광만 남기도 나머지는 팔아먹어 버린다.삼광의 가치를 높이 부풀려서 다시 팔아먹는다.그러면 자본은 또 이윤을 챙기고 이제 이 나라를 떠나면 된다.다른 화투판은 늘 있으니까...쉽게 말하면 이런게 '강탈에 의한 축적'이다.외환은행..론스타..뭐 이런거 떠올리면 된다.그 외에도 '민영화'는 '같탈에 의한 축적'의 대표적 프로그램이다.공공재의 성격이 강했던 물,전기,에너지,교통 이런 것들을 전부 '민영화'한다.(이런 관급 기관들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낸다.)그리고 매입된 공적 소유기업들을 또 이리 저리 굴려서 다시 매각한다.그리고 다른 화투판으로 간다.데이비드 하비의 '강탈에 의한 축적'은 상위 계급들에게는 그닥 여파가 없다.어차기 미국 자본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상위계급들을 포섭하고 동지로 어깨동무해서 영토내의 저항을 무마해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소설가보다 활동가로 이름을 날리는 아룬다트 로이의 결론은 이 점을 명확히 말해준다."생산적인 공적 자산을 국가로부터 민간기업에 이전하는 것이다.생산적 자산은 자연자원을 포함한다.땅,숲,물,공기,이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가 맡아두고 있는 국민의 자산이다...이들을 탈취하여 민간기업에 재고로 판매하는 것은 역사상 전례없는 규모로 야만적인 강탈과정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이 책을 쓴 것은 사실 이라크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이 석유라는 향후 헤게모니의 중요한 요소를 장악하기 위한 작업을 명백히 밝히기 위함이었다.석유를 잡아야 향후 중국의 헤게모니 부상에 대해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미국이 앞으로 50년간 헤게모니를 더 편안하게 유지하려면 이라크를 거점으로 하는 중동문제에 있어서 힘있을 때 반드시 잡아놓아야 한다는 것이다.이라크의 후세인이 사형을 당하고 후견정권이 들어서고 있지만 미국의 의도가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미국이 설령 전세계적 패권국가라고 하더라도 국제관계에서 내적 외적 변증접은 여전히 중요하고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데이비드 하비는 현재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자본축적과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뉴딜'정책을 주문한다.이를 통해 국가가 훨씬더 개입적이고 재분배 문제에 접근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데이비드 하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선진국들 사이의 이런 시혜적 뉴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결론에서 미국내 새로운 행정부의 구성이 전환점이 될 수 잇다고 말한다.현실 정치 수준에서 분명히 현재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공화당에 지친 미국은 다음 번에 힐러리든 오마하든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물론 그들중 누가 되더라도 미국의 거대한 움직임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또한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썻던 자본/노동/국가의 삼자 연합체로서 '뉴딜' 역시 그대로 제현되기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뉴딜'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자본의 무분별한 유동성을 막고 국내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방식이었다.또한 노동은 포드주의적 방식으로 포섭했다,그러나 이후 국제 통화체제의 변화와 자본의 고도화.프롤레타리아층의 다변화등을 고려할 때 국가의 개입적 방식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뉴딜'식의 전면적이 되기란 요원해보인다.

레닌의 질문과 로이의 대답 사이에 그 답이 있을 지 모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세계에 발생하고 있는 것들은 포괄적으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어마어마하다....이의 범위와 둘레를 찬찬히 생각하는것,이를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들 모두와 한꺼번에 싸우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특정한 방법으로 특정한 전투에서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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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7-30 15:44   좋아요 0 | URL
참 어려운 책을 이리 정갈히도 쓰시는지 또 한번 감탄을 하고 갑니다. 보관함 속에 들어갑니다.

드팀전 2007-07-30 17:29   좋아요 0 | URL
늘 과찬에 몸둘바를...사실 읽기에 만만치는 않은 주제이다보니 비판적 접근보다 정리하는 쪽에 힘을 더 많이 싣고 있어요.점점 딱딱해져가는 리뷰에 대해 고민중입니다.조금 더 쉽게 풀어쓰기엔 제 내공이 아직 부족해서..리뷰에 쓰진 않았는데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듭니다.처음에는 내용이 어려워서라고 생각했지만 그 외에도 군데 군데 국문법이 맞나 싶은 정도인 경우가 여럿 있습니다.로쟈님 정도라면 원본 대조 번역문제를 찾아내겠지만..그건 제 능력 밖이어서..어쨋거나 찾으면 번역상 오류가 꽤많을 것 같다는 혐의를 두게 됩니다.별 세개 주었어야되나??^^

오월의시 2007-07-30 23:51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드팀전 2007-07-31 12:07   좋아요 0 | URL
^^ 아 그럼 저 이주의 마이리뷰 되는거에요..호호호

마늘빵 2007-07-31 10:45   좋아요 0 | URL
여기 한울 아카데미 책들은 다 묵직하더라구요. -_- 읽기 쉽지 않아보이던데.

드팀전 2007-07-31 12:08   좋아요 0 | URL
읽다보면 끝이 나오는게 모든 책의 장점입니다.
아프님이 좋아하시는 진씨부터------>복씨까지 지루해지시면 보세요.

마늘빵 2007-07-31 12:21   좋아요 0 | URL
'진씨부터 복씨까지'라는 말이 참 많은걸 담아내고 있네요. ^^

드팀전 2007-07-31 12:41   좋아요 0 | URL
옹..별뜻 없이 생각나는 두 사람이어서 그런건데...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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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깊은 곳에 빠져 버린 느낌이다.무릎까지 차오른 유체의 흐느적거림,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져 화석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벽면의 이끼들,작은 물방울 소리마저 흡수해버릴 듯한 절망적인 어둠, 닿을 수 없어 더 초자연적인 원형의 하늘...영원히 닫혀 버릴 시간들. <슬럼,지구를 뒤덮다>는 도시의 묵시록이다.책을 덮고나면 지옥은 예언된 것이 아니라 실현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구현되는 지옥은 종이 위에 엎질러진 검은 잉크처럼 거침없이 진행한다.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도시 빈민들을 가끔 만난다..요즘같은 장마철은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다.슬럼까지는 아니지만  판자집에 가까운 저질주택에서 장마철의 습기는 살인적이다.벽지 위로 1미터 이상씩 습기가 올라찬다.비만 조금 내리면 집 안에 있는 양재기들은 전부 들고 나와야 한다.천장에 수십번 덧바른 벽지들이 전부 들고 일어난다.방에 있는 것인지 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그 곳에서 작은 선풍기 하나로 온 식구가 바둥거린다는 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다.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감옥에서의 여름나기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가까와질수록 인간이 미워지는 것이다.도시 빈민들의 삶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너무도 반가운 사실(?)은 중간계급이 대거 포진한 도시에서 주류인간들이 도시 빈민들과 그들의 주거공간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도시빈민은 분명 도시 안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가끔 리어카에 박스 모으는 꼬부랑 할머니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시선을 거두면 되는 것이 중산층이 하는 일의 전부다.(박스 모으는 꼬부랑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박스 모으면 대략 7-8천원정도 번다고 한다.)

<슬럼,지구를 뒤덮다>는 한국의 도시빈민보다 더 열악한 제 3세계 슬럼 문제에 대해 그 원인과 실태,그리고 묵시록적인 도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국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형태의 슬럼은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한국의 도시 주거문제에 대해서는 '철거민'이라는 인적 유형과 '쪽방'이라는 주거형태가 가끔 언급된다.김동원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을 떠올리게 하는 단일규모 최대 철거였다는 88 올림픽 철거도 나온다.) <슬럼의 도전>이라는 책에서는 도시빈민과 슬럼을 동일선상에서 논의하지 않는다.도시 빈민과 슬럼 주민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도시 빈민의 수가 슬럼 주민의 수보다 월등히 많다.현재 지구상에는 20만 개 이상의 슬럼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거대 슬럼은 주로 판자촌과 스쿼터 마을이 비공식 주택과 빈곤 지대를 형성하며 연결될 때 발생하며 도시 변두리에 나타난다.

대규모 슬럼은 대개 1960년대 만들어진다.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농촌의 붕괴이다.우리 나라에서도 그랬듯이 짐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온것이 달동네를 만드는 것이다.제 3세계의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복잡하다.대개 그 연원을 식민지 시대의 공간분할 정치와 환금형 작물 재배로부터 찾을 수 있다.저자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도시화 과정의 부산물로 생긴 이런 슬럼이 1980년대에 이르러 전지구적으로 확대된다고 본다.굳이 말을 붙이자면 '슬럼의 전지구화'현상이다.대규모 슬럼화 작업의 1등 공신은 IMF와 세계은행이다.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IMF의 구조조정프로그램'은 빈곤과 사회불평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의 후퇴'이다.공공지출의 축소는 도시 내에서 빈곤층의 삶을 극단적으로 악화시켰으며 사회적 안정망이 전무한 상황에서 중간층의 하층민화도 급격히 진행되었다.저자는 SAP와 도시빈곤 문제의 관련성의 설명하면서 비공식 노동계급이 늘어나고 여성과 아동들이 직접적인 희생자로 부각되었다고 말한다.연구자들은 제3세계 대다수의 도시에서 '비공식적 생존지상주의'가 주요생활양식으로 자리잡았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슬럼,지구를 뒤덮다>에 나오는 슬럼의 생활상과 증가하고 있는 도시 슬럼의 통계는 흘러넘치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주로 아프리카,동남아시아,라틴 아메리카,중국,동유럽과 러시아 등지가 연구대상이된다.전세계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슬럼 도시와 현황들이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한참 읽다보면 그런 통계들과 현상들에 무감해져버리기도 한다.각 슬럼마다 생성의 역사가 다르고 슬럼의 형태가 다르다 하지만 공통되는 요소들이 있다.

몇 몇 사례들을 보자.슬럼들이 도심에서 밀려날 경우 도시 외곽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열악한 지형위에 만들어진다.그렇다보니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하다.물론 제대로된 건축물조차 만들어지지 않다 보니 재난에 맞닥뜨릴 경우 그 피해는 엄청나다.

2005년 인구 520만명의 카라카스.도시 인구의 3분의 2가 거주하는 슬럼은 지진이 수시로 일어나는 카라카스 계속의 불안정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1999년 12월,갑작스런 홍수와 산사태로 카라카스에서 약 3만 2000면이 사망했고 14만명이 집을 잃었고 2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TV 뉴스를 보면 이런 건 단지 '자연재해'로 비춰진다.그러나 그 안에 분명히 정치경제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슬럼과 재난'사이의 관계가 보여준다.

슬럼 주민들은 도시의 쓰레기 더미들과 공존한다.슬럼의 위생상황은 아주 심각하다.가장 중요한 급수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정화되지 않는 더러운 물을 끌어쓰다보니 당연히 전염병과 유아사망율이 높다.또한 기본적인 욕구처리 조차 불가능하다.  

남이 버린 쓰레기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한 사회의 빈곤층을 정희하는 가장 심오한 특징 중 하나이다.키베라에 위히찬 라이니사바 슬럼에서는 1998년 4만명의 주민이 구덩이 변소 10개를 공동으로 사용했고 마타레 4A에서는 2만 8000명이 공중화장실 2개를 함께 썻다..

정말 지옥같은 일은 이런 슬럼에서 화장실이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라는 것이다.가나의 쿠마시에서는 한 가족이 하루 1번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기본급의 10%를 소비해야한다.실제 이 지역외에도 유료화장실 3세계 슬럼지역에서 각광받는 성장산업이다.

정말 수많은 슬럼의 지명이 나와서 다 기억하기도 힘들다.그렇지만 킨샤사는 기억에 남을 듯 하다.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강 옆에 위치해있으면서도 사하라 사막에서 물구하기 만큼 물구하기 어려운 곳,도시경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자발적 조직화를 도모하지만 결국 한계에 봉착한 곳.빈곤으로 인한 가족의 위기가 종교를 통해 해결되는 곳,종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일상화하는 곳....지옥이 어디인가?

저자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만이 슬럼의 착취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부패한 국가 권력과 내전,보수적 NGO 등도 슬럼 확산의 공신들이다.보수적 NGO의 경우 재원마련부터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고 있다.또한 '자조주의'라는 환상을 통해 실제 슬럼의 구조적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며 또한 슬럼의 공간적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공고화하는 개량주의적 한계를 드러낸다.저자는 슬럼 주민들 사이에서도 착취/피착취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을 지적한다.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피착취그룹은 슬럼에 거주하는 세입자들이다.슬럼 주민들 중에서도 일부는 더 가난 한 사람을 월세라는 형태로 착취한다.리스미스는 소규모 임대와 전대는 빈민의 주요 축재 전략이며 집이 있는 사람들은 좀 더 가난한 사람들의 착취자로 신속하게 변모한다 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은 '도시 중산층'이다.이 문제는 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때문에 성찰적 질문을 던지게 해준다.

도시가 슬럼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인 것 같다...지타 베르마

이 책에서는 제 3세계 변두리에 들어서는 '폐쇄형 교외 주택단지'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베이징 외곽의 오렌지 카운티,카이로 외곽의 유토피아,홍콩의 팜스프링스 등이 그런 곳이다.이들은 사회상류층으로서 미국식 소비패턴을 즐기며 그들만의 도시를 만든다.이 단지는 공통적으로 정교한 보안체제를 자랑으로 삼는다.주택들이 전부 요새화되는 것이다.이 단지들은 교외에 위치해있기때문에 좋은 도로망이 필수적이다.이 도로망을 만들어주는 것은 개발업자들과 정부이다.사회적 비용은 빈민들로부터 얻어내면서 부자들은 거저 도로망을 얻는다.실제 빈민들에게 그 도로망보다 필요한 것은 물과 위생시설일텐데 말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3세계 엘리트 중심의 모습이라 볼 수도 있다.그렇지만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도시 내의 '장벽 도시'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보론을 쓴 우석훈 교수는 '타워펠리스'같은 공간을 적당한 예로 들었다.그뿐만이 아니다.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개발업자들이 펌프질하고 있는 '타운하우스'같은 경우도 고급화경향을 띠면서 그들만의 주거공간을 만들것이다.조금만 더 확대해보면 요즘 새로 짓는 대규모 고급 아파트들과 그 입주민들도 전부 철통같은 경계망을 선호하고 유사한 계층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주거공간이 '구별'되기를 선호한다.내가 아는 어떤 경우의 아파트는 주민이 승합차를 타고 들어갔다니 아파트 품격떨어진다고 이웃들이 눈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모든 중산층이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루 하루 압구정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중간계급의 경향성은 이러한 '장벽도시'를 선호한다고 볼 수 도 있다.

메트로폴리스 공간이 근본적으로 개편되면서 부유층과 빈민층의 교루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기존에 있었던 계층간 차별 분리문제나 도시 공간의 파편화문제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최근 몇몇 브라질 작가들은 '중세도시로의 회귀'를 말하지만,중간계급이 공적공간-그리고 빈민층과 공유하는 최소한의 시민생활-으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에는 그보다 훨씬 큰 사회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안소니 기든스에 이어 로저스 역시 공간 재편의 핵심과정을 엘리트 활동이 해당 지역의 물리적 맥락에서 '귀속탈피'하는 현상으로 파악했다.여기서 '귀속탈피'는 빈관과 사회폭력이라는 숨막히는 매트릭스를 외면하고 사아비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시도를 뜻한다...

<슬럼,지구를 뒤덮다>는 묵시록적이다.이 책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그저 현상의 원인과 실태,그리고 분석만이 있을 뿐이다.대안은 그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의 역자가 대신 이 부분을 설명했다.

"이렇듯이 파국적 전망은 '막아야 한다'와 '어쩔 수 없다'라는 두가지 상반된 입장으로 나뉠 수 있다.<슬럼,지구를 뒤덮다>의 파국을 어느쪽으로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선택일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에는 독자의 존재방식이 반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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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07-07-22 03:36   좋아요 0 | URL
밤에도 글쓰시네요~ 이 책의 내용과 밑에 적으신 이랜드 사태가 왠지 어느날 밀접한 연관성을 띌 날이 올거 같군요. 결국 역사는 순환하는 걸까요.. 웅~

드팀전 2007-07-22 11:59   좋아요 0 | URL
바밤바님>..맞습니다.이랜드사태가 비공식 경제 영역의 확산의 한 형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현재도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