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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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포영화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메노키오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난다.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박쪼개진 듯 나뉘어진 무덤에서 둥둥 떠나오는 소복귀신보다 리얼하다.세대간 소통을 위해서 좀 최근 비유를 쓰자.그렇다.이것은 <링>의 공포를 능가한다.(..이것도 오래되었나 ? ^^;.. 네!!)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링의 관절꺽기 귀신이 TV를 뚫고 나오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책장을 기어나왔다.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뚜벅 뚜벅 (# 음향효과..찌이이이익...)

도대체 관뚜겅 덮고 잘 자고 있는 방앗간 주인을 400년이나 흘러서 꺼낸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누구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를 깨웠을까? 그가 깨워낸 살아있는 좀비가 역사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박사는 알았을까?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는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학의 첫 단추를 끼운 고전이다.마치 탐정소설 같은 이 역사책을 읽다보면 왜 이탈리아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방앗간 주인을 깨워서 20세기에 되살려 놓았는지 알 수 있다.박사의 음모를 알고 싶은가?  진즈부르그 박사는 실로 엄청나다.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공동묘지와 야산,또는 어느 산비탈에 뿌려진 모든 시체들을 깨워내려는 것이다.이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전지구적 카니발 아니겠는가? 

<치즈와 구더기>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았던 필부필남들이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일깨우는 책이다.즉 야산이나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의 역사이다.이는 민중의 역사이며 나의 역사이기도 하다.진즈부르그 박사는 '종속계급'의 역사라고 말한다.이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그래서 역사책은 언제나 '태정태세'와 '당파싸움'의 기록일뿐이다.그는'미시적'이라는 의미를 '현미경적 분석'이라고 말한다. 즉 갑오년 전쟁이 호미 들고 나갔다가 나주 부근에서 종적을 알 수 없게된 개똥이 아버지가 연구 대상이다.개똥이 아버지가 어디서 만든 무슨 브랜드의 호미를 들었는지..개똥이 아버지가 어쩌다가 거기에 휘말리게 되었는지..개똥이 아버지가 밥은 먹고 다녔는지..미시사는 개똥이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다.사료만 있다면 CT와 MRI도 불가능할게 없다.진즈부르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한 평범한 개인에게서 특정한 역사기간에 존재한 한 사회계층의 모든 특징을 어떤 소우주 (마이크로코스모스)속에서 추적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민중들의 역사라고 하늘 아래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아니던가.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민중들의 역사라는 것도 지배계급의 역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독단적인 것은 아니다.진즈부르그는 바흐친의 '문화 상호간 교환모델'을 받아들여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그에 영향을 미친 지배계급의 문화와 사회적 변동을 읽어낸다.

메노키오는 16세기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울리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살았던 방앗간 주인이다.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마을에서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존재였다.그렇다고 그가 무슨 정규 교육을 받은 엘리트는 아니었다.그는 1582년 종교재판소에 이단 혐의로 피소되었다.이후 투옥과 석방이 이어지다가 1599년에 화형에 처해진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를 죽음으로 이끌어간 그의 우주관과 종교관에 대해 추적한다.은밀하고도 친절한 추적이어서 읽는 동안 이것이 역사서인지 탐정소설인지 헷갈린때가 있다.물론 이 추리소설에는 잔혹한 살인이나 얽힌 치정관계나 히치콕식으로 표현하자면 '맥거핀'같은 것들은 없다.조금 남달랐던 방앗간 주인의 뇌 속을 들어가보는 정도일 뿐이다.물론 그가 재판관에게 증언한 내용이 객관적 추적의 열쇠가 된다.그리고 하나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들에 대해 유추한다.그의 머릿속에 악마가 돌아다니게 한 것.그것은 다름 아닌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책'이었다.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종교관은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는게 나을 듯 하다.대략 이렇다.그는 유물론적이었으며 4대원소로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다.이 책의 제목<치즈와 구더기>는 다름아닌 메노키오의 우주론이다.또한 그는 범신론적이었다.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했으며 동정녀 마리아를 세속화시켰다.교회의 의례들을 무시했으며 복음서를 장사를 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겼다.관념적인 종교성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종교의 핵심으로 보았다.또한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했으며 모든 신앙이 동등하다고 믿었다.

뭐가 이상하냐고? 21세기에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시라..메노키오의 시대에는 종교재판소에 끌려갔어야 마땅하다.메노키오는 자신의 종교관과 우주관을 저자거리에서 이야기하고 다니다가 고발당했다.종교재판 과정에 메노키오는 자신의 신념을 종교재판관들에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최소한 말귀를 알아먹는 엘리트들을 만나서 신나게 토론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종교재판관들 방앗간 주인 주제에 이단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들어볼 만한 이야기를 풀어헤치는 메노키오에게 관심을 보였다.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주장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가 읽었음직한 책들과 만났음직한 사람들을 따라간다. <신곡>,<성서의 약술기>,<멘더빌의 기사>,<코란> 등등이 유력하게 추정된다.또한 당시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던 루터파의 교리,재침례파의 교리등의 영향을 추정한다.그렇지만 메노키오는 종교재판과정에서 그의 모든 이단적인 생각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진즈부르그 역시 메노키오의 이 주장에 공감한다.메노키오가 몇 몇 금서들을 읽었고 또 몇 몇 위험한 인물들을 만났지만 그의 주장은 그의 것이라고 말한다.왜냐하면 메노키오는 읽엇던 책을 의식했던지 의식하지 못했던지 왜곡하고 단순화시키고 재구성하여 자신의 가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즉 그가 읽었던 책이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즈부르그는 이러한 '왜곡을 통한 재구성'에 주목하며 이에 영향을 준 것들로 농민들의 급진주의와 농민적 물질주의를 예로 들고 있다.그는 메노키오의 독자적이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역사학이 소홀히 여겨온 민중문화의 전통에서 나온것이며 이러한 사고가 지족적이고 심층 구조적인 민중문화의 토대에 바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즈와 구더기>가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상상력은 실로 대단하다.지나가는 사람 하나 하나가 역사가 되어버린다.역사에는 수많은 개똥이 아버지들이 있었고 메노키오들이 있어 왔다.단지 우리들의 인식 영역 밖에서 살다가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이들의 존재감이 느껴져서 가슴이 묵직하다.그리고 한가지 더 마을을 뻑뻑하게 만든 것...

메노키오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종교재판'을 떠올렸다.우리에게도 수많은 메노키오들이 있지 않았던가...그들이 살아나기를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지니고 있다.....물론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잇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다.다시 말해서 구원된 인류만이 그들 과거의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하게 될 것이다.다시 되살리는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은 그날,즉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의 일정표가 될 것이다.".......발터벤야민

 ## 무화과나무님께 감사를..그리고 보다 학술적인 글을 원하시는 분들도 무화과나무님의 리뷰를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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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8-28 16:41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덕에 도킨스의 새책이랑 번갈아 읽고 있는데
그게 또 신선한 재미가 있더라구요 ^^

드팀전 2007-08-28 16:55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신>을 보고계시는군요..^^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듯이 저의 무신론도 과학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안보고 있는데 ^^ 사실 밀린 책들이 많아서요
전 무신론자인데.. 문학적으로는 범신론자이기도 하구요...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적 관념론이 사회에 끼치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악영향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입니다.물론 갑의 약이 을의 독이고 바이스벌사 하기도 하지만..^^

2007-08-28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8-28 21:19   좋아요 0 | URL
최근에는 별로 보지 않는데 그래도 그분의 책을 너댓권은 읽었던 듯 합니다.
역사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던적 접근으로 분류하는 편인 듯 합니다.제가 전공이 그쪽이 아니라 정통한 것은 아닙니다만....
일단 읽기는 좋지 않을까요...난해하게 쓰는 편은 아니니까
저도 말씀하신 그 책을 제일 처음 읽었습니다.그 책은 동시대 한국지형 안에서 고민할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이후에 나온 책들은 한국적 근대 형성지점인 구한말로 갑니다.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문제와 동아사아 문제로 넘어오시더군요.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본축은 '근대'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글샘 2007-08-29 12:02   좋아요 0 | URL
현대의 지성이란 것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암것도 아닌 것들의 연합체겠죠.
요 책은 재밌을 것 같아서 보관함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드팀전 2007-08-29 17:33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합체라...무슨말인지 모르겠지만.뉘앙스상은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듯 합니다.미시사를 한단어로 이야기해야한다면 결국 '개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듯 합니다.역사에서 '개체'의 합이 '전체'는 아니지요. 또한 구조나 제도 등의 거대담론의 영향에 무게감을 덜다보니 그 지점에서 비판이 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