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 이 영화는 제목만 알고 가서 봐야합니다. 
 * 내내 공포감을 조성하는 드르륵 드르륵 소리의 정체는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길

  공포영화의 계절이 돌아오는가.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찌감치 공포영화들이 채 녹지도 않은 땅을 헤집고 하나 둘 머리를 내밀고 있다. 얼마전 <엑소시스트>가 다시 나오더니, 이번엔 <뎀>이다. 여기서 말하는 뎀은 'THEM'. 영어로 '그들'이다. 범인의 이름을 대신해 '그들'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이유일까?

  개봉한지 이제 이틀된 따끈따끈한 영화다. 프랑스 영화사 스튜디오 까날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진 영화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필름 마켓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범인을 칭하길 '그들'이라고 하질 않나 영화를 몰래 만들질 않나. 도대체 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2년 나는 군대에, 사람들은 전국 곳곳 거리에 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던 그 때, 지구 반대편 루마니아에서는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10월 7일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수사끝에 범인은 밝혀졌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이 사건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루마니아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모두 검색에서 삭제했다.



* 어두운 지하터널로 숨어봐야 소용 없다. 여긴 '그들'의 아지트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 그렇게 달렸건만 내가 머물 곳은 여기구나. 밤새도록 달려 이른 새벽 도착했으나 나를 봐주는 이는 없다. 뒤에선 '그들'이 달려오고 있다. 여기서 끝이구나.

  교사 클레멘타인은 퇴근 후 소설가인 남자친구 루까를 만나러 그의 숲 속 깊은 곳의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큰 별장에서 두 사람은 둘만의 오봇하고 사랑스런 시간을 보내고 잠든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클레멘타인은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기 위해 홀로 1층 쇼파에 앉아있었으나 잠의 적막을 틈타 들리는 수상한 소리. 무시하고 남자친구의 품 속에서 잠을 청하지만 새벽 3시. 침묵을 깨는 또 다른 수상한 소리, 빛.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무슨 소리일까. 알 수 없는 소리가 커다란 집을 휘감는다. 누군지 확인하러 간다는 루까와 뒤를 다르는 클레멘타인. 아니 무슨 남자가 이렇게 겁도 없어.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루카. 하지만 겁도 없는 건 그때뿐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루까는 다리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고, 손잡이는 막 돌아가고, 기분 나쁜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밖에선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다. 한 명이 아니다! 도대체 몇명이나.

  인간의 공포는 매우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악령을 소재로 하여 공포를 전해주는 <엑소시스트>나 <오멘>과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개의 공포영화는 매우 사소한 곳에서 출발한다. 평소엔 신경쓰지도 않던 티비소리, 하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안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티비소리는 내겐 공포다. 삐이걱. 어릴적 아무도 없이 집에 혼자 있는 때가 있었다. 바람에 살며시 문이 열리는 것이었건만 그 소리는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나는 손에 무기를 들고 조그만 우리집을 화장실, 안방, 내 방 하나하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무기를 들이밀곤 했다.

  때로 공포는 거울에서 오기도 한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꼭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손을 살며니 내밀고 나를 향해 다가올 것만 같다. 내가 찡그렸을 때 갑자기 거울 속 내가 기분나쁘게 웃기라도 한다면?

  영화 <뎀>에서 보여지는 공포 또한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숲 속 한 가운데 숨어있는 커다란 저택. 전화 끊기도, 전기 끊기도,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밖에서 조명을 쏘아대고, 드르륵드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갑자기 달려든다면 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가 누가 있겠는가.

  잔머리 굴려 저택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런다고 도망갈 곳이 있는건 아니다. 달려도 달려도 숲뿐인 것을. 나는 도망치고, 그들은 쫓아온다. 여러명이 사방에서 나를 조여온다. 그들은 그걸 즐기고 있다. 내가 공포에 질린 것을 즐기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지만 막다른 골목이다. 아 죽는구나. 그래 죽는거다 그렇게. 공포에 질린 채로.

***

  범인은 밝혀졌다. 그리고 루마이나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국가적 패닉상태를 맞이했다. '그들'은 10살에서 15살의 어린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왜 그랬어요? 재밌잖아요. 재미삼아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고 찌르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그것을 즐겼다. 살인이 목적이 아니었다. 살인은 그저 한참 재미본 뒤에 마지막에 오는 결과물일 뿐이었다. 상대를 위협하고 공포에 몰아넣고 쫓으며 상처 입히고 때로는 풀어줬다가 다시 또 쫓고. 그들은 그걸 즐겼다. 클레멘타인과 루카가 범행의 대상인 것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원한을 사서가 아니라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는 주변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들은 거기에 숲이 있고 거기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 하다. 그런 멍청한 질문도 없다. 재미인 것을 어쩌랴. 재밌는 것을 어쩌랴. 왜 라는 질문은 행위의 목적이 있을 때 성립하는 물음이다. 그들에겐 목적이 없다. 왜 라는 물음에 굳이 답변을 내놓는다면 그냥, 정도가 가장 훌륭한 대답일 듯 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인건 그들이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렇게 교활하고 못될 수가 있는가. 세상의 때가 채 묻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청소년 범죄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전북 익산이었던가.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남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한 사례가 있었다. 한번이 아니었다. 그런 사례는 끊임없이 나왔다. 아버지가 돈이 있는데 안내놓는다고, 어머니가 혼냈다고 찔러죽인다. 영화 <공공의 적>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실화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실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래선 안되는 거다. 정말 그래선 안되는 거다.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성인의 범죄보다 더 한 경우들이 많다. 성인들은 죄를 저지르고 잘못한 것이라도 알지, 범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잘못을 알지도 못한다. 이런 아이들을 어리다고 내보내고, 기껏해야 소년원에 잠깐 머무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된다. 사회의 책임이라고? 아니다.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어른들이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라고? 그러지 말자. 사회에도 어른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들의 잘못을 사회나 어른들의 잘못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죄 값을 치뤄야 한다. 루마니아의 '그들' 은 다수가 풀려났고, 일부는  소년원에 있다 했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발적인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계획된 잔혹한 범죄다. 이유도 없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대상으로 장난치고 데리고 놀다(?) 죽인다. 그들도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맞먹는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뎀>은 그냥 공포영화로 끝낼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그저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해 감독이 재구성하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실화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범행의 과정은 그저 '추측'일지 모르지만 내용은 '사실'이다. 사실이지만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에 너무나 충격적이기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를 원한다. 감독은 그저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던져줬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영상을 본다. 그리고 충격받는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로서가 아니라 그 사실로서 모든 이들이 봐야 할 영화다.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청소년들이 봐야 할 영화다.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

<루마니아 살인 사건의 전모>

2002년 10월 7일 오후 5시 35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근교 스나고브 지역의 외진 국도에서 모녀로 추정되는 시체 2구와 심하게 훼손된 차량 한 대가 발견되었다. 차량 안에는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 옆의 수풀 속에서는 흉기에 난자 당한 중년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사건 당일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범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수사는 미궁으로 빠졌다.

2002년 10월 11일 오후 1시경 부쿠레슈티 경찰서로 클레멘타인이라는 여교사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다. 경찰은 실종된 여교사의 집을 찾았고, 찾아간 집안에서 진흙 묻은 여러 발자국과 혈흔을 발견, 곧장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색 결과, 집 안의 모든 전기선과 전화선이 잘라낸 듯 끊겨져 있었고, 곳곳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2002년 10월 12일 오후 3시 경 주변 수색을 펼친 지 하루가 지나 저택 부근의 숲속에 폐쇄된 지하 수로에서 남녀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두 사람은 실종 신고 된 여교사 클레멘타인과 그녀의 남자친구인 루까로 밝혔졌다. 부검 결과 두 사람은 사망한 지 5일 정도 지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10월 15일 경찰은 비슷한 지역에서 닷새 간격으로 시체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으로 판단, 수사망을 좁혀갔고 마침내 여교사의 집 바닥의 발자국과 주변의 증거물을 토대로 범인검거에 성공했다.

이후 경찰의 사건보고 발표로 ‘그들’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2002년 전 유럽은 혼란에 빠졌고, 그 해 10월은 루마니아에서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는 가장 충격적인 달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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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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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혹은 거짓, 픽션 오어 논픽션.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허구를 다루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사실을 전달해주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책이다. 간략히 줄여 '논픽션 노블'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법은 저널리즘의 방법론과 소설의 작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로 그칠 수 없는, 저널이지만 저널로 그칠 수 없는 '글'이다.

  1959년의 미국 캔자스 주의 작고 조용한 동네 홀컴에서는 일가족이 무참하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왜.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더군다나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좋은 분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고 <앵무새 죽이기>의 저자 하퍼 리와 함께 이 작은 마을로 달려온 트루먼 카포티는 이곳에 머물며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게된다. 그들이 이 마을에 머무는 사이 두명의 범인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두 살인자의 살인동기와 과정, 삶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고,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음성 녹음을 통해 재생하지 않고 카포티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엮어냈다.

  책의 분량은 가벼운 추리소설로 생각하고 읽어나가기엔 꽤나 두껍다. 본문만 526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카포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100% 사실만을 바탕으로 하여 꾸며진 소설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조합하여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마치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카포티가 직접 사건을 목격이라도 한 듯한 이 소설은, 살해장면이나 배경의 세밀한 묘사와 살인범들의 내면에 숨어 엿보는 듯 자세한 심리묘사로 사건의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마치 카포티의 눈을 빌려서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는 듯 하다. 카포티는 비록 마을에 체류하며 이런저런 객관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범인들과 인터뷰를 함으로써 풍부한 자료수집을 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상황종료된 사건에 대해 이만큼 실감나게 재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살인은 왜 일어났을가? 누가 이들을 살해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하나의 영화를 보는 듯한, 하나의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리라.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더 많은 의문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빨리 눈을 돌리며 한편으로 머리 속에서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가지고 나름대로 또 사건을 재결합해보며 궁금증을 해소하려 애썼다. 카포티가 그 나름대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머리 속에서 사건을 연결하려했다면 나는 카포티가 내게 던져준 정보들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고나 할까.

  이 책을 통해서는 여러가지 분야의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형제도에 관해서. 사형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과연 이와 같은 무자비한 자들에게도 사형을 면케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다시 던져볼 기회를 주었다.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흉악 범죄 행위들에 대해 신문쪼가리의 작은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는 그 사건의 체감온도는 제로에서 왔다리갔다리. 그러나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에게는 체감온도 200도 였으리라. 그럴 때보면 기본적으로 사형제 반대다 라는 입장은 너무나 쉽다.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았으니까.

  왜 살해 당햇을까, 살인 동기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자들이 당연히 갖게 되는 첫번째 궁금증이지만,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들에겐 쓸데 없는 질문이라는 것. 그것은 무의미하다.  

  두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허구를 담고 있는 소설이란 장르와 객관화된 사실을 담아야 할 리포트 혹은 기사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아 이렇게 조합도 가능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세번째는 인간의 性에 관한 물음. 섹스가 아닌 성품에 관한 물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시작되어온 고리타분한 질문이지만 아직도 모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중 한 가지. 두 범인의 가정환경과 배경으로 보아 두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잘못이라고 탓을 해야하는 걸까. 사회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등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인 콜드 블러드>는 단순히 소설로서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내용면에서 형식면에서 내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많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 책 그 자체만으로 놓고보았을 때도 그 작품성은 인정되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의미있었던 책이다.

  카포티 자신은 네 살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이후 어머니의 재혼으로 트루먼 카포티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다 열 일곱살에 중퇴를 했고, 신문사 사환으로 일했으며, 독특한 옷차림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고. 소설이 서서히 여러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고, 사교계에서도 한 인물 했으며, 연극, 영화, 전기, 뮤지컬에도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그다.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이 책으로 대박을 터뜨려, 그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합병증으로 생긴 간질환으로 생을 마감하다. 그의 나이 61세. 다양한 일을 하며 또 사교계에서 재미도 맛보며 인생을 즐겼던 그는 작품 하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대개 '작품'이라 칭송받는 작가들이 사후에 그 업적을 인정받아 살아생전에 이런저런 명예와 부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반면, 그의 경우는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갔으니 후회없으리라. 영화 <카포티>에서는 저자가 직접 나서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니 카포티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 나를 포함하여 - 영화를 보면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
초반에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각각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평온한 일상의 삶을 그려낸 부분은 지루했으나 이 역시 르포르타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건 발생 이전의 그것은 카포티가 임의로 만들어낸 허구에 가까운 부분이겠지만, 그것은 뒤에 일어날 평온을 깨는 반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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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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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자유로운가.
그렇다면 그대는 행복한 것이다.
그대는 행복한가.
그렇다 해도 나는 그대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모르겠다.

- 김용석, 두 글자의 철학 中 -

 

  영혼의 자유를 꿈꾼다며 어디서 주워들은건 있어가지고 이런 글귀 하나 옮겨다가 내 홈페이지에 걸어놓은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난 안다. 내가 영혼의 자유를 꿈꿀 수는 있어도,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기엔 난 너무나 세속적이고 계산적이며 사회의 때가 묻었다. 그래서 난 영혼의 자유를 꿈꾸지만, 언제나,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영혼의 자유로움은 마음의 자유로움을 전제로 하고, 마음의 자유로움은 관계로부터의 벗어남에서 시작한다. 난 너무나 많은 곳에 얽매여있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최병수는 진정 영혼이 자유로운 자이다. 그는 어느 곳에 정착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쓰지도 않으며, 돈이나 기타의 물질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그저 한 몸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세계 어디든 가리지 않고 발벗고 나선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나는 내가 누군인가를 찾기 위해 철학에 발을 들여놨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했다. 허나, 이 책을 읽고, 최병수를 접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최병수는 안다. 그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그는 목수이다. 그는 화가이다. 그는 철학자다.

  <목수, 화가에게 말걸다>는 목수의 인생으로 시작해 화가의 인생을 맞이한 최병수라는 사람에 대한 탐색이다. 화가의 인생으로 시작해 목수의 인생을 맞이한 김진송은 묻는다. 그와 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한 살 어린 최병수라는 사람에게. 김진송은 풍요로운 가정에서 우리나라 최고 학벌이라는 서울대를 나왔고,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그것을 버리고 그저 한명의 목수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 김진송이 처음부터 가난했고, 학교를 다닐 수 없었으며, 생계를 위해 안해본 직업이 없을만큼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그러나 언젠가부터 환경운동가, 행동주의 화가로 변신한 최병수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대담집 형식으로 기획되었던 이 책은, 목수 최병수가 화가가 된 김진송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는 대담으로 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담은 불가능했다. 아니 그런 형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할 이야기가 많았고 나는 그에게 던져줄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의 꼴은 그가 그 자신을 말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책의 제목도 그렇게 정해졌다. 노동자였던 목수 최병수가 화가가 된 최병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말이다. '목수, 화가에게 말을 걸다'는 그런 뜻이다.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되도록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짐짓 침묵하고 때로 화를 돋우며 때로 맞장구를 치며 거든 게 내 일이었다."

  '목수, 화가에게 말걸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제목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목수 김진송이 화가 최병수에게 말을 거는 것이요, 하나는 방금 김진송이 밝혔듯 애초 목수였던 최병수가 화가가 된 최병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김진송은 그런 두 최병수를 매개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최병수는 매우 할 말이 많은 남자다. 그는 한때 여자친구가 있긴 했지만 - 그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 결혼하지도 않았고, 부인도 없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형제가 있긴 했지만,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홀로 공부하고 홀로 돈을 벌며 삶을 배웠다. 어린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전선에 나선 것은 그로하여금 더 많은 삶의 공부를 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공부란 모름지기 책상 앞에 앉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임으로써 하는 것이다.

   군부독재시절 어느 날 번쩍 목수에서 화가로 탈바꿈한, 그것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화가로 탈바꿈한 그는 어느날 자신을 돌아보니 환경운동가가 되어있었다.

  "목수보다는 화가라고 말하는게 더 그럴듯하고 기분 좋은거 아니냐고? 그런건 없었어. 나도 세상 물 먹은 사람인데 그런 게 별거 아니라는 건 알지. 그래서 둘이서 30분을 버티고 앉아있었어. 그 형사도 이상한 고집을 피우대. 나를 화가로 적지 못하면 자기도 못나가고 나도 못 나간다는 거지. 그렇게 서로 버티다가 우스운 생각이 들었어. 저쪽에서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그래서 어차피 별 것 아니니까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그랬더니 형사가 조서에 '화가' 이렇게 찍었지. 그래서 사람들이 농담을 섞어서 나보고 관제화가라고들 했지. 나를 화가로 만든 건 경찰서야. 난 정부가 인증한 공식화가라고."

  최병수는 어쩌면 그 형사에게 고마워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목수에서 화가로 강제로 직업이 바뀌어버린 그는 사다리 짜주고 못질만 하다가 "그거 개나리요? 아니 왜 진달래는 없소?" 라는 딴지 하나로 진달래 한 송이 그림으로써 화가로 데뷔하여 <한열이를 살려내라><노동해방도><장산곶매><펭귄이 녹고 있다><떠도는 대륙><야만의 둥지> 등의 그림을 그리며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신의 출세를 염두에 둔 계획된 행동이 아닌 그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떠돌다 얻게 된 결과일 뿐이다. 미술대학은커녕 중학교로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어엿한 화가가 되었고, 제 5회 교보 생명 환경문화상 환경문화예술 부문 대상을, 2004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예술상 개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런 감투들이 그에게 무슨 쓸모가 있으랴. 욕심 하나 없는 그는 그저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 것을.

  1960년생인 그의 나이 이제 서른 일곱. 아직 젊디 젊은 나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치열하게 삶을 산 덕 분에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들을 해냈다. 평균 수명의 반도  살지 않은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을 벌여나갈지 세계 어느 곳에서 활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그 자신도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으리라. 그는 언제나 계획되지 않은 삶을 살았고, 정처없이 떠돌았다. 유목민은 나에겐 꿈이지만, 그에겐 현실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 한다. 주민등록도, 의료보험도 없는 그가 이제 주소지를 정해놓고 정착하고 싶다 한다. 순박하고 깨끗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다 한다. 화가가 되기 전까지 19개의 직업을 전전한 그는 이제 화가에서 교육자로 옮겨가고 있다. 또 모른다. 교육자에서 언제 무엇으로 옮겨갈지는. 그의 삶에 박수를, 그의 자유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그가 내뱉은 말들 중에서 거두어들이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거나 함께 일해 왔던 사람들에게 누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짐짓 모른 척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다듬고 내 글을 덧붙이면서 하나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했다. 그건 솔직함이다. 때로 사실과 감정과 논리가 거칠게 드러나고 논리적 모순과 감정의 충돌이 그대로 표출 될 수 있다. 또한 솔직함은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을 앞세워 논리의 균형을 맞추고 시각의 틈을 조정하며 주변의 정황이 고려되는 타협은 이 글의 원칙을 벗어난다. 그러니 너무 많은 분노를 드러내고 험악스러운 말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에 허물이 있다면 그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원칙을 허물고 싶지 않았던 나의 탓이다. 하지만 적어도 최병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신뢰를 벗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최병수의 투명하고 솔직한 행동거지가 그를 미워하고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이유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송의 말마따나 최병수의 솔직함은 그의 삶의 바탕이 되었고, 행동의 실천으로 옮겨졌으며,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근본이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 틀렸다 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가 거침없이 내뱉는 말들은 논리를 벗어나 삶에 천착하고 있고, 그것은 그 어떤 논리보다 현실적이고, 옳음을 지향한다. 마음을 비우고 그를 접하자. 이 책을 읽기전 난 최병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소개글을 보고 아 화가구나 싶었다. 그러나 난 지금 인간 최병수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너무나 존경스럽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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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시옷 -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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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시옷>은 <십시일反>의 후속작이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10명의  내노라하는 만화가들이 모여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을 보인 <십시일反>은 기대치 않은 엄청난 반응과 과분한(?) 평가를 받으며 특별한 언론홍보의 수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터뜨렸다. 영화 <왕의 남자>가 이미 본 관객들을 중심으로 한 찬사가 이어지며 주변인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가파른 상승곡선을 이어간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만화책이 그것도 국가가 기획한 만화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고 많이 읽고 대단한 평가를 받은 것은 분명 희귀한 현상이다.

  <십시일反>에 이어 2006년 1월, <사이시옷>이 나왔다. 첫번째의 흥행에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와 10명의 만화가들은 한껏 고무되었고 그들의 열정과 독자에 대한 보답으로 두번째 작품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8명의 만화가가 참여했다. 전작에 참여했던 손문상, 유승하, 홍윤표 세 사람과 새로 탑승한 오영진, 이애림, 장차현실, 정훈이, 최규석이 가세했다. 새로 탑승한 이들 역시 전작에 참여한 이들 못지 않은 만화가들이고, 이들의 만화 또한 또다른 현실과 감동을 안겨준다.

  이번에도 역시 차별과 편견없는 세상을 위한 만화를 그렸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현장은 차고 넘쳐났다. 이번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동성애자, 장애인, 빈부차별, 비혼모와 군인의 모습을 담아냈다.

  사이시옷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 위한 '시옷'이라는 의미와 사람 人자의 시옷을 의미한다. 제목 한번 잘 지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서는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이 와야 한다. 모두가 다 평등하고 정중하게 존중받는 사회가 와야한다. 전작 <십시일反> 과  후속작 <사이시옷>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전작과 분명 다른 주제를 가지고 차별 철폐와 편견 극복을 노래하지만, 전작의 그 신선함과 위대함(?)을 넘어서지는 못한 듯 하다. 전작에 드러난 풍자를 통한 웃음과 현실의 삶에 밀착해 그려낸 실제같은 이야기와 그림들(일부는 실제사건을 소재로 했다)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관찰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겐 매우 충격이었다. <사이시옷>은 전작의 흥행에 힙입어 계속해서 편견과 차별 극복에 대한 관심을 불러오려하지만 전작을 넘어서지는 못한 듯 하다. 그것은 <사이시옷>이 갖는 어떤 단점 때문이 아니라 <십시일反>이 획득한 충격과 찬사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난 뮤지션이 첫 음반을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신선함과 강한 충격을 전해줬을 때, 그는 단번에 대중을 사로잡을 것이나 두번째 작품에서도 그러하리란 보장은 없다. 되려 두번째 작품에서는 첫번째 작품으로 그나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 대중들의 더 큰 기대로 인해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만큼의 관심과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사이시옷> 역시 1집의 충격이 되풀이 되고 있기에 새로운 하나의 작품집으로서 평가받기보다는 1집의 후속작 쯤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단지 현실을 알려주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된다. 단지 독자가 눈물 한 방울 떨궈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편견과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발걸음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현실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에서 독자가 차별 극복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실천할 수 있도록 자극해줘야 한다. 만화가들에게만 이런 일을 맡기려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그림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세지와 강한 호소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왕에 나선 바 여기서 그치지 말자.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줘야한다. 깨달음을 받고 각자가 실천에 나서 정말 하나의 밥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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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4-1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두 책이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이라는 건 몰랐네요. 십시일반부터 읽어봐야겠어요.^^

마늘빵 2006-04-1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두 권 사서 <십시일반> 먼저 읽고, 바로 이어서 <사이시옷> 읽었어요. ^^ 두 책 모두 후회하지 않을 선택입니다.

비로그인 2006-05-0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봤어요.. 꼭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확신이 드네요..^^ 요번달은 좀 오바를 해서 담달에 꼭 사야겠군요.. ^^

마늘빵 2006-05-0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 이거랑 <십시일반>이랑 셋트로 보시면 더 좋을거 같아요.

가넷 2006-10-2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랐네요. 교보에 가끔 들리면서 표지만 보고 지나치고는 했었는데. 봐야겠네요.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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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匙一飯. 
 학교에서 가르치길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퍼다가 한 그릇의 밥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해석해주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길 우리의 작은 도움의 손길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십시일반은 본래 그런 뜻이다. 하지만 이 만화책(?)의 제목은 '십시일反 ' 이다. 되돌릴 반 자를 쓰는 것은, 차별의 의미한다. 또한 차별 없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자는 메세지이다.

 언제부턴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곳이 생겼고, 사람들은 너도 나도 목소리 높여 인권을 이야기한다. 초등학생들 일기장 검사하는 것도 인권침해요, 직장에서 신체검사 내용을 본인이 아닌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것 또한 인권침해요, 이력서에 학력과 부모님 직업을 적는 것도 인권침해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매맞는 것도 인권침해다. 17-8세기의 시민혁명 이후의 유럽사회, 그리고 미국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맞이했다면, 그 자유와 평등은 이제 '인권'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과 미국과 같은 선진사회에서 먼저,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인권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어디까지를 인권으로 볼 것인가. 어디까지를 인권침해로 볼 것인가. 인권이 이야기되던 어느 시점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인권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인권침해라고 이야기되는 그것들이 '관용'을 넘어서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해 씁쓸하기도 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0명의 만화가를 모아다 '십시일반'이라는 책을 지어냈다.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장경섭, 조만준, 최호철, 홍승우, 홍윤표. 만화를 즐겨 보지 않는 나로서는 대략 들어본 이라고는 박재동과 홍승우, 홍윤표 뿐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이 정성스럽게 그려낸 만화를 보며 이들의 그림이 익숙함을 깨닫는다.

  각기 다른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다른 스타일로 그림을 그려내는 이들이 모였다. 인권문제를 가지고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그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 곳곳의 차별을 찾아 발품을 팔고 자료를 수집하고 고민과 고민 끝에 여기 실린 만화를 창조해냈다. 10명의 만화가가 모여 한 작품씩 내놓음으로써  十匙一飯. 을, 그리고 편견과 차별의 없앰을 주장함으로써 십시일反 을 만들었다.

  외국인 노동자 차별, 학력 차별, 지역 차별, 남녀 차별, 장애인 차별 등등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여러가지 차별의 현장을 하얀 종이 위에 펼쳐놨다. 하나하나 만화를 보고 생각하며 지하철에서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옆에 아주머니가 힐끔힐끔 쳐다보며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테다. 아니 무슨 만화를 보면서 눈물을 다 흘려. 애도 아니고 다 큰 청년이 만화를 보고 있담.

  리뷰를 쓰며 한장 한장 만화를 다시 읽어보는 지금도, 가슴이 울컥 할 때가 있다. 재밌고 유쾌하게 풍자한 만화도 있는 반면, 너무나 구체적이고 삶에 밀착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낸 만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화이기도 했다. 티비 어느 프로그램에서 보면서 흘렸던 그 눈물은 만화를 보는 지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정말 잘 만든 책이다. 이것을 그저 만화책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하나의 책으로서 간직하며 가끔씩 꺼내보며 처음의 눈물을 간직하고 싶다.

  한 가지 이 책에 대해 지적할 것이 있다면, 몇몇 분들도 지적했듯 차별에 대한 차별, 편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그려진 만화의 내용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의 한 단면이다. 같은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다만 이 만화에서는 차별과 편견의 현장을 그려내느라, 인권침해를 그려내느라,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킨 점도 없잖아 있다.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하다. 어두운 사회 이면의 밝은 사회를 지워버린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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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4-1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읽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할 책입니다.

마늘빵 2006-04-2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마천님 저도 그리 생각하여 기말고사 수행평가에 넣었습니다. 만화라 짧은 시간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생각할 거리들도 많고 해서요. 수행평가로 너무 힘들어 해서 글자책을 읽으란 소리는 못하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