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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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이 누굴까?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본다면 망나니라고 할 수 있고 소설에 등장하는 사형집행인은 그야말로 죄를 지은 사람의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행동이나 고문등을 할 수 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민간 의술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나 직업을 가진 자인가 보다. 사람의 목숨을 앗는 사람이니 사람들에게 존경이 아닌 천하게 여기고 손가락질을 한 것은 당연하지만 시대를 보면 누군가는 꼭 해야할 일을 한 사람이다. 오물을 치우고 사형집행을 하고 약초를 재배하거나 채취하여 약을 제조하여 팔고 간단한 의술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모두 긇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형집행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조상은 물론 그들의 후손까지도 천대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같은 일을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결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소설의 주인공인 '야콥 퀴슬' 저자는 퀴슬가의 자손이다. 퀴슬이란 인물은 실제 사형집행을 했던 인물이지만 사형집행 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음을 이야기 한다. 중세에는 마녀의 존재를 믿고 산파일을 하거나 허브등을 재배하며 약초를 만들고 요리하는 여자들을 마녀라 일컫기도 했고 그녀들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마녀사냥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죄를 뒤집어 씌어 매장하거나 피해를 입게 하는 마녀사냥이라는 말은 이어오고 있다. 지금처럼 형법보다는 관습이나 미신이 더 중요하게 작용을 하던 때였고 '마녀'라는 말에도 민감하게 작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다수가 마녀라 지목하거나 죽음을 원하면 잘못이 없어도 죽음에 이르는 그야말로 답답함을 안개처럼 깔린 시대의 이야기다.

 

"파이팅의 농부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면, 마녀들이 호헨푸르흐의 숲에 모여 사탄에게 구애하는 밤이지. 딱 이런 시기에 그 기호가 나타난 것이 그냥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어쨌든 이상한 건 사실이야."

 

사형집행인인 야콥 퀴슬에게는 그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산파를 도와 일을 잘 처리하며 민첩하고 약재에 대해서도 잘 아는 막달레나라는 딸이 있다. 퀴슬은 사형집행 뿐만이 아니라 약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거나 거리에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 간다.그가 하는 일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도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이기에 그의 딸인 막달레나 역시나 천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그녀가 사형집행인 자식을 만나야 한다고 여기지 다른 이와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게 된 지몬,그는 전쟁터를 누비며 그야말로 의료지식 없이 돌팔이 의사가 된 아버지 밑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다려고 하지만 대학을 다 마치지는 못한 햇병아리 의사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퀴슬과 막달레나의 의술을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믿고 존경한다. 그런 시기에 독일의 중세도시 숀가우 지방에서 어린 소년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뒤이어 고아 소년이 차례로 시체로 발견되고 뗏목나루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고 교회에서 짓고 있는 나병 요양소 공사를 방해하는 일들이 일어난다.왜? 그런데 한가지 소년들의 시체에서 등에 문신처럼 마녀를 상징하는 그림이 발견된 것.그로 인해 산파 일을 하던 마르타 슈테홀린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고 사형집행인은 그녀가 범인이 아닌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고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소년들을 죽이고 나루터 창고에 불을 지르고 왜 다른 소녀들은 행방불명이 된 것일까?

 

"너도 얼른 가라. 여길 떠나는 게 좋아. 넌 사형집행인의 딸이니까 사람들 눈에는 마녀 못지않게 불쾌한 존재잖니."

 

클라라와 조피가 행방불명이 되면서 등장하게 된 '악마'라는 인물은 왜 여기저기 나타나서 숀가우 지방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으며 정말 마녀들이 마녀가 부활한다는 축제일 때문에 소년들이 죽거나 사라지고 모든 것을 마녀들이 저지른 일일까? 마녀라 지칭되는 슈테홀린과 어울렸던 고아소년과 소녀들은 왜 죽거나 행불이 되었을까? 그녀의 집에서 없어진 맨드레이크와 기호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알리바이가 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무섭게 작용을 한다. 불을 지르고 공사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소년들을 죽이고 왜 모든 것을 감옥에 갇혀 인사불성인 마녀가 저지른 일이라고 믿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사람들은 그저 결론을 '마녀'로 이끌어 그녀의 화형으로 마무리 지어야 마땅한지.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실제론 조작이나 마찬가지인 어느 누군가의 욕망 때문에 진실이 은폐되고 진실 위에 거짓이라는 것이 튼튼한 성을 지어 부서지지 않는 관습과 미신으로 모두를 몰아 간다는 것이 정말 낭폐다. 하지만 냉철하고 판단력이 뛰어나고 어느 면에서나 몸을 사리지 않는 정의의 사도 사형집해인 야콥 퀴슬이 있고 그를 지지하는 지몬과 막달레나가 있다. 그들은 함께 뭉쳐 거짓과 싸운다.

 

고아 소년과 소녀들이 왜 죽어가고 숨어 들어야 했을까? 악마라는 인물은 왜 나타나서 숀가우 지방을 휘집고 다니는 것일까? 그와 더불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지몬과 막달레나는 어울려서도 안되고 사랑을 해서도 안되는 집안이고 이들이다.그러나 그들은 훼방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건이 점점 결말로 치달을수록 사랑은 더 깊어지고 돈돈해진다. 지방에서 의사노릇을 하고 있는 아버지 밑과 대학에서 공부한 의술이 다 인줄 알았던 그가 민간의술을 접하면서 자신이 알던 세계가 아닌 금지 구역을 탐하듯 점점 퀴슬과 그의 지식에 빨려 들어가며 아버지가 아닌 퀴슬을 택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단순한 사형집행인인줄 알았던 퀴슬의 지식은 그야말로 방대하며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얻은 지식이며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거짓보다는 정의의 편에 서고 진실을 위해 일을 하며 남이 싫어하는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천해보이지만 모두가 알게 모르게 인정하는 인물이며 직업이라는 것이다.

 

'묘하군.세상에 태어날 때도 필사적으로 투쟁하고, 세상을 떠나야 할 때도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사람이야.'

 

중세 마녀재판과 살인사건 음모 그리고 금지된 사랑까지 첨가되어 조화가 잘 된 추리소설로 읽어 나갈 수 있고 집단 히스테리를 한방에 날리는 시원한 장타를 날리는 인물로 사형집행인인 퀴슬이란 인물이 재밌기도 하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형사와 같은 일까지 도맡아 하기 때문에 더 재밌다는 것이다.자신의 조상에 대한 소설이라 숨기고 싶을 것 같은 이야기도 이렇게 재밌는 추리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고 추악한 권력의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그 시대를 여행할 수 있는 이야기로 꾸며지기도 하지만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지목된 슈테홀린을 구해내기 위하여 보인 인간적인 면이 따뜻하면서도 자신을 돕는 지몬을 살뜰히 챙기는 면이 또한 따뜻하게 작용을 하여 퀴슬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게 해준다.'사형집행인의 딸'이라고 이름한 것은 어쩌면 사형집행인은 집단적 히스테리가 난무하는 시대에서 살았지만 그의 딸인 막달레나가 사는 세상은 그런 집단적 히스테리가 없는 세상에서 직업적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냉대를 당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의 능력을 인정 받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분명 자신의 선조가 물려준 일을 거역할 수 없어 군인의 길을 걷다 사형집행인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딸은 다른 세상을 살길 원했을 것이다.분명 그런 세상이 도래하길 바라며 그도 사형집행 뿐만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직업에 귀천이 없어져야 하듯이 거짓이 난무하기 보다는 진실이 정의의 편에 서는 그런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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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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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프로이트,그의 가족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쟁으로인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 프로이트,그는 자신의 가족과 아내의 동생들과 하인들 그리고 자신의 애견까지 데리고 가면서 그의 누이들은 한명도 망명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먼저 망명한 후에 누이들을 데려가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프로이트 누이들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대 그들과 관계한 이들의 삶과 함께 하며 시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여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하여 조명해 본다.

 

 아돌피나를 둘러싼 침묵이 매우 요란해서 나는 이 소설을 그녀의 목소리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은 소설의 배경이나 내가 몇 년씩 헤매던 미로의 벽과 같았다. 나는 미로 속에서 아돌피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통로를 찾아다니며 그녀의 목소리를 글로 옮기면서 소설을 통해 역사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현실은 언제까지나 알 수 없는 채로 남을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그 현실을 살지 않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의 삶은 역사 속에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자의 여동생이면서 정신병원 생활을 하기도 한 그녀의 삶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스러져갔지만 프로이트의 여동생으로 그리고 언니들과 그가 사랑했던 첫사랑인 라이너까지 그녀에게도 삶이 있었지만 기억되는 것은 없다. 인생 전반에서 의지하고 믿고 따랐던 정신적 지주였던 프로이트가 망명자 명단에 올리지 않아 영국에서의 안정된 삶이 아니라 수용소에서 마침표를 찍은 삶이라고 해서 프로이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삶인가 하고 씁쓸했는데 그보다는 한 여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아돌피나라는 '여자의 일생'을 읽다보니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가슴이 먹먹했다.

 

태어남 자체로 부담이 되었던 아돌피나 그녀가 어머니에게서 늘 듣는 말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그녀의 탄생자체가 부정적인 말이었다.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어도 될까말까 하는데 늘 부정적인 말에 병약해서 늘 다른 자식들과는 비교되었던 아돌피나, 그는 학교에서의 공부가 아니라 오빠인 프로이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듣고 의지하게 된다.그런 오빠에게서 사춘기 때 자신과는 다른 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하여 잠시 서먹한 관계에서 그림공부로 그리고 이성에 눈을 뜨며 다시금 관계를 회복해 나가기도 한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프로이트마져 아돌피나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매달리다 보니 그녀는 세상에 홀로 떨어진 존재처럼 마음 둘 곳이 없던 삶,그런 그녀에게 첫사랑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들었지만 첫사랑은 그 나름대로 상처를 가지고 있어 현재라는 시간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이라 그녀를 채워주는 존재가 되지도 못했고 그와의 관계에서 얻게 된 아이마져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지워야 했던 가슴 아픈 여인의 삶은 그 혼자 짊어지고 나갈 멍에였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살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이 찾아온다. 어떤 고통은 이내 수그러들지만 어떤 고통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겪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이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고통을 통한 아픔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읽으며 자식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부모가 해줄 수 있는 칭찬의 말들이 자식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닫게 되었다.자식이 부모의 욕심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나부터 녀석들에게 칭찬보다는 늘 녀석들의 기를 꺾는 말들을 일삼은 듯 하다. 믿고 의지하게 해주기 보다는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을 아돌피나의 삶을 읽으며 반성하게 되었다. 엄마의 부정적인 말이 얼마나 그녀의 마음을 병들게 했는지 그녀 인생전반을 걸쳐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그렇다고 곁에서 언니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준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의지하고 믿게 된 삶은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클림트의 여동생인 클라라정도다.가족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야 하는데 타인에게서 받는 위안이 얼마나 그녀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것은 가족일 것이다.

 

"그래서 더 맞는 말 아닙니까.아이러니가 없으면 삶이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무섭도록 견딜 수 없겠죠."

 

태어남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그 기로에 서게 된 삶처럼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던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까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누워서 몸 위로 한 뼘 띄워 이불로 만든 하얀 하늘처럼 그녀의 삶은 공중에 떠 있는 삶처럼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부유하는 기구한 삶이었다.어머니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힘이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니면 첫사랑 라이너가 자신의 뿌리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좀더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일구며 자살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일구어나갔더라면 아돌피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정도 이루어보지 못했고 어머니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녀와 함께 한 우울증,괴테 박사는 우울증이라고 하기 보다는 광기라고 했다. 정신병원에 갇힌 여인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가 만들어낸 광기 속에 갇혔다고 볼 수도 있듯이 그녀 또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광기 속에 갇혔다고 볼수도 있을 듯 하다.그런 그녀의 삶이 가련하고 안쓰럽다.

 

나는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뒤러의 판화 한 점을 볼 때마다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판화 속 여인은 망연히 아무대도 아닌 어딘가를 쳐다보는 순간에 포착되었고 날개가 있지만 천사는 아니다.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있어서 주먹 쥔 손으로 받치지 않았다면 가슴으로 떨어졌을 것이다......다른 한 손은 축 늘어졌는데 어차피 지푸라기를 잡아도 가라앉는 것을 막지 못할 걸 알아서였다.-뒤러의 멜랑콜리아 표현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누렸다고 본다면 그 그늘에 가려져 있던 누이동생 아돌피나의 삶은 너무 기구하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없다. 그녀의 것이 된 것은 어느 것도 없는 것 같다. 엄마도 오빠도 첫사랑도 아이도.죽는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을 버리듯 '잊어버릴 거야.' 라는 한마디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듯 했던 한 여인의 삶을 재조명해 보니 분명 그녀의 삶에도 족적은 있다. 프로이트의 착한 여동생으로 라이너의 첫사랑으로 클라라의 친구로 그리고 자신이 평생 꿈이었고 가지고 싶었던 아이의 모자가 꼭 필요한 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그녀도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존재로 거듭났다는 것.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장선상에서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삶이 중요하다고 죽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아돌피나의 삶이 어쩌면 프로이트가 망명자의 명단에 올리지 않아 죽음도 수용소에서 맞이해야만 했다. 씁쓸한 삶이지만 잊히기엔 선명하게 역사와 함께 머물렀던 한 여인의 삶이 무겁게 가슴 밑바닥을 헤집는다.'잊어버릴 거야' 라고 했지만 그녀는 반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 하다.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그녀의 삶은 잊지 못하고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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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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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이 작품을 읽기 전에 그의 작품중에 <숙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신간소식을 접하고 이 작품이 <백은의 잭>과 이어지듯 그 작품에 등장했던 구조요원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더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 <백은의 잭>도 스키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스피드 있고 이야기와 함께 질주하듯 사실감이 있었는데 이 작품 또한 스키장의 이야기가 잘 그려져 있다. 어찌보면 그야말로 일본식 이야기가 잘 담기지 않았을까? 스키장과 생물병기 K-55인 탄저균으로 자연과 인간을 지켜내야 한다. 형사나 그외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면서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스포츠와 추리소설을 절묘하게 잘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만능스포츠맨으로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가 이야기의 주가 되기 때문에 더 사실적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어느 것을 읽어도 독특하고 재밌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살인사건이 등장하지 않고 추릿소설에 정형화되듯 등장하는 밀실트릭이나 그외 트릭을 쓰지 않고도 긴장감 있는 추리소설을 탄생시키거나 <나미화 잡화점의 기적>등은 어찌보면 동화적인 면도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가 하면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요즘 유행하는 유럽식 추리소설 같은 맛도 나는 듯 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그와 일본에 딱 맞는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일본의 스키장에 대하여 나오는 다큐를 본 듯 한데 몇 몇 스키장은 그야말로 파우더와 같은 눈으로 세계 스키인들이 모인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몸살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소유주가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인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어 사회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야기의 주 무대인 스키장도 주민들이 스스로 관광객을 늘이기 위하여 애쓰고 있음이 보였다. 그런 곳에 생물병기인 탄저균인 K-55가 묻혀 있는데 잘못하여 대기중에 노출된다면 자연은 물론 주변 온천지와 함께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다. 설원도 지켜야 하지만 사람도 지켜야 한다.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일을 스키장 주조용원 네즈와 스노보더인 치아키가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이루어낸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만들어 내길 바랐지만 구즈하라는 살인병기인 탄저균을 만들어 냈다. 9.11테러이후 탄저균의 공포는 지구촌 모두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 가공할만한 생물병기인 초미립자 탄저균이 사람들이 많은 스키장에 묻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고 묻어 놓고 협박하던 범인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탄저균이 묻힌 증거사진은 단 몇 장,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아내고 안전하게 제거해야한다. 구리바야시는 소장 도고의 협박과 같은 압력에 못 이겨 스노보드에 빠진 중학생 아들 슈토와 스키장으로 향하지만 그는 오래전 타 본 스키실력으론 도저히 찾아낼 수 없다. 거기에 부상까지 당해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를 대신해 구조요원 네즈와 치아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스키학습을 온 중학생 아이들이 생물병기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물병기를 음지로 이용하려는 이가 있다. 무서운 탄저균을 돈으로 환산하여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그런가하면 누군가는 음지에서 그 무서움이 알려지지 않고 존재하는 탄저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고,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믿는 진정한 친구들도 있다. 탄저균의 존재를 알려야 할까?

 

연구소장과 구리바야시 및 몇 사람을 빼고는 K-55의 위력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들이 깨지기 쉬운 유리병에 들은 백색가루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자신들의 목숨은 물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고 해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처음 그들이 생물병기라 아닌 죽어가는 이의 목숨을 살려낼 백신으로 알았기 때문에 더 사력을 다해 K-55를 찾아내고 지켜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아들의 진심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희망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았을까.살인병기인 탄저균을 지켜내야 하는 임무와 더불어 가족간 그리고 친구들간에 틀어진 감정을 제자리로 바르게 돌여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엮이어 더 재밌게 짜여졌다. 살인병기가 묻혀 있는 줄도 모르고 통제 구역에서의 짜릿한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파우더와 같은 최고의 눈으로 덮힌 설원에서 속도감을 즐기는 이야기는 긴박함을 잊고 좀더 설원을 즐기게 만드는 작가의 배려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조금 아쉽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가벼워 보일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재한된 독자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키나 스노보드와 같은 스포츠처럼 추리소설도 또한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저자만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배경 속에서 짧은 행과 행 속을 네즈 혹은 치아키과 되어 함께 질주하듯 속도감 있고 짜릿함을 안겨 주며 생물병기의 무서움을 극대화하여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환경임을 좀더 극대화 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미래는 생물학전이라고 하듯이 감기와 같은 인플루엔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그런 균을 만들어 내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도 안되고 환경을 담보로 해서도 안된다는,스키장 주변의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그 작은 행동과 말까지도 한 명의 관광객에게까지도 피해를 주지 않아 다시 찾아 올 수 있게 만들듯이 우리 스스로 지켜 나가야한다는 환경 경고까지 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짠 했다. 아무리 깨끗한 눈이고 스키어들이 최고로 치는 파우더와 같은 눈이라고 해도 환경이 오염되면 찾을 수가 없다.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비보다 무서운 눈이라 하는데 탄저균까지 등장한다면 생각만 해도 무섭다. 정말 충격 그 자체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백색가루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게 만들고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경종으로 다가온다.

 

*이 도서는 한우리 북카페 서평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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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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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라는 책을 읽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읽지를 못했다.그리고 만나게 된 <내 아내에 대하여> 이 책은 두껍다. 부담스런 두께지만 읽다보면 금방이다. '긴 병에 효자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긴 병과 큰 병은 환자 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피폐하게 만들고 더불어 한 가정의 몰락까지도 가져온다.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기도 하지만 심심치 않게 뉴스를 통해서도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질병에 대비하여 의료보험과 개인보험을 들어 놓는다고 하지만 내가 당하게 되면 보험도 피해가는 경우가 있다. 보험은 내가 타려고 하면 해당사항이 없는데 종종 보험을 역 이용하는 이들이 더 많이 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긴 병이나 큰 병을 앓는 이들은 간병인이나 가족중 누군가 환자를 돌봐야만 한다. 친정아버지가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동안 나는 자처해서 아버지 곁에서 머물면서 아버지와의 시간을 가졌다. 엄마가 와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엄마의 밥도 해서 날라야했고 병원생활을 따분해 하는 아버지 곁에서 웃을 수 있고 운동도 시켜 드리며 함께 한 시간은 영원토록 잊을수가 없고 내게는 값진 선물과 같은 시간이었다. 셰퍼드,그는 대학을 가려다 미루고 대학가 주변 동네에서 아르바이트 식으로 집수리를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그 길로 정착을 하게 된다. 친구 잭슨과 함께 하며 수리공을 자처하며 키운 회사를 떠넘긴 후 회사는 그들이 운영할 때보다 몇 배로 커져서 그는 그곳에서 관리직으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다른 곳에 살 생각을 하며 아내 글리니스와 답사여행을 다녀오곤 하다가 아프리카 서남쪽 '펨바'라는 곳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며 살고 싶어하여 식구들 몰래 짐을 꾸려 놓았지만 갑자기 금속공예를 하던 아내가 불치병이고 희귀병인 '중피종'이라는 암에 걸렸다고 해서 다시 주저 앉게 되었다.

 

"게다가 그 대가를 당신이 치르다니,너무 부당한 일이야.아파도 내가 아파야지.당신이 아니라 내가 암에 걸린 거라면 좋겠어.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좋겠어."

 

아내는 자신보다 건강한 사람처럼 군살도 없고 현재는 금속공예가 아니라 초콜릿 공장에서 밀랍으로 틀을 만들고 있었지만 아픈 내색 없이 갑자기 희귀병인 중피종이라니. 중피종은 석면과 관계된 암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수리일을 하였던 자신 때문에 아내가 암을 얻게 된 것일까? 아내는 전적으로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이 남편 셰퍼드 때문이라며 20년이 넘은 그가 관계했던 집수리 재료들에서 석면과 관계된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한다.정말 자신 때문에 아내가 중피종에 걸렸단 말인가? 셰퍼드 그는 혼자서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경제를 도맡아 하듯 하고 있다.아버지 집의 가스비며 다큐제작을 하며 오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동생까지 그리고 성인이 된 딸의 보험이며 모든 돈을 그가 책임지고 있다.아내는 나가서 번다고 해도 도움이 안되었고 그가 매각한 회사의 돈은 제2의 삶을 위하여 계좌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아내가 암을 치료하기 전에는 말이다. 아직 부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펨바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중피종,그것도 희귀암이라니.

 

"난 그 기계들을 유지 보수하도록 세금을 내잖아요. 결국 이것도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릴 탄압하는 도구를 살 수 있게 자금을 조달해야 할 의무가 있죠. 하지만 당국에서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나한테서 몰수해 간 돈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으면 그건 내잘못이 되고 내가 두 배로 돈을 내야 하는 겁니다. 주 당국은 모든 걸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잖아요. 이성이나 형평성,심지어는 상식이 적용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니까요."

 

그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의료보험'과 마주하게 되었다. 친구 잭슨이 FD를 앓고 있는 딸 플리카와 비만인 헤더로 인해 카드빚에 집대출도 갚지 못해 허덕이고 거기에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저 자신앞에 닥친 고난만 토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잭슨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불만이 한층 고조되고 자신의 문제까지 겹쳐 더이상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글리니스의 암은 그들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아내 때문에 회사 생활도 엉망이 되고 아내만으로도 벅찬데 동생과 아버지의 문제로 인해 그야말로 셰퍼드는 혼자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데 아내는 점점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 다녀야 의료보험의 혜택이라도 누려 보는데 그 의료보험이라는 것이 국가만 용이하게 해 놓았는지 환자에게서 돈을 있는 대로 다 빨아 먹고는 쓸모 없으면 뱉어 버리듯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간다. 통장은 점점 텅텅 비어가는데.

 

제2의 삶은 커녕 다음달 월세를 낼 돈도 없게 된 상황에서 그는 직접 현실과 부딪혀 보기로 한다. 아내에게 삶이 얼마나 남은 것인지.자신의 아버지를 동생 손에 아니 사설 요양시설에 맡겨야 하는 것인지.그러다 잭슨의 자살과 마주하며 일생일대 결심을 하게 되는 셰퍼드, 아내가 거짓 연기로 통장이 다시 가득차게 되고 그는 가족과 잭슨네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아프리카로 날아가기로 한다. 더이상 자본주의 미국에서 버티고 살 자신을 잃었다. 잭슨네도 집어 삼킨 미국이지만 자신의 삶도 거기에 목사였던 아버지는 신을 부정하게 되었다. 왜 이런 날이 오고 만것일까? 승승장구하며 아니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닥칠지 모르고 살아 왔는데 아내가 암에 걸리고 나서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의 음지를 보듯 국민의 혈세만 빨아 먹는 국가,국민이 쓰러져 가도 나몰라라 하는 국가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은 국가에 자신과 연결된 가족에게 할만큼 했다. 더이상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의사도 병원도 환자를 어떻게 해서 병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약과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진절머리가 났다. 환자는 그야말로 돈덩어리다. 아내 글리니스가 몇 달 동안 병원에 쏟아 부은 돈은 자신이 벌었던 돈보다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인생과 제2의 삶을 흔들어 놓은 의사는 끝까지 글리니스를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려 했지만 그녀에게도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신약의 실험대상이 되어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란 희망은 환자를 더 아프게 할 뿐이며 병원과 의사가 결코 환자에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내를 통해 깨닫게도 되었지만 노환인 아버지에게서도 요양원의 실체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가족중 누군가 큰 병에 걸렸다면 우선은 고쳐 놓고 보길 원한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는 나중 문제로 작용을 하지만 그게 또 내가 막상 닥쳐 보면 그렇지가 않다.물론 환자도 살려야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한다.내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면서 환자를 포기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아내는 물론 아버지 그록 가족에게도 정말 할만큰 했다. 잭슨이 마지막 자살이란 것을 택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이제 남겨진 그들을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 히키코모리인 아들에게도 FD라 걱정했던 플리카에게도 비만이라 걱정했던 헤더에게도 그리고 아내와 아버지에게도 펨바는 지상 낙원처럼 그들을 새로운 삶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아프리카는 미국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자본주의에 젖어 미국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줄 알았던 이들이 자연에 빠져 건강해지고 혹은 아름답고 평온한 마지막을 맞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곳에서 더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양 손 가득 쥐고 있는 현실을 놓아 버리면 못살것 같은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내려 놓거나 놓아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것처럼 아둥바둥 현실에 목 매며 살아가고 있는데 셰퍼드는 결정이란 오랜시간을 걸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순간에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모두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결정하게 하여 떠난 아프리카의 삶은 만족 대 만족이다. 아둥바둥하며 살아야 했던 미국의 삶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해피엔딩이라 조금 덜 씁쓸하다.

 

셰퍼드,그가 아프리카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제2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글리니스로 인해 정말 바닥까지 떨어져 보았기 때문이다.혼자서 다 감당하듯 가족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가야 했던 고난한 미국의 삶,분명 잭슥이나 타인들이 보면 행복한 삶처럼 보였겠지만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집 한 채없이 살았고 자신이 일군 회사를 매각 후에 회사는 몸채를 몇 배는 크게 늘려 그야말로 그가 가졌던 부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왜 그렇게 현실에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일까? 대학을 다니지 않서일까? 그렇다면 행복의 기준은 가치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평생 신을 모시고 살았던 아버지가 자신이 눕게 되고 신을 부정하듯 자본주의속에서 잉태하고 숨쉬고 살았던 그가 자본주의를 떠나 자연속에서 적응하며 살 수 있을까? 그가 살았던 미국에서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면 펨바에서 그란 존재는 반짝반짝 빛나는 값어치를 지녔다.꼭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즐기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아내가 선물해주고 간 제2의 삶이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바닥까지 내려가보지 않았을 것이며 제2의 삶을 위한 종잣돈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 때문에 경험하게 된 자본주의의 실체에 진저리도 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나도 나이가 들어 병원생활을 많이 하게 되지만 부모님을 지을수가 없다. 부모도 가족도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일까 소설이 더 와 닿는다. 현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셰퍼드와 잭슨의 이야기는 여운이 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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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밥상 - 평범한 한 끼가 선물한 살아갈 이유
염창환.송진선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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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런가 제목부터 숙연해진다. 이 책을 읽고 싶어한 이유도 사년 전에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아버지가 마지막 드셨던 물에 말았던 밥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물에 말아 엄마가 한 술 한 술 드렸던 밥을 다 드시지 못하고 가셨다. 장지에서 돌아와보니 식탁위에 그래도 놓여 있던 물에 말은 밥을 보고 엄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고 우리도 울었다. 아버지 또한 암으로 보내드렸고 당신은 아프셔도 가족에게는 아프다는 표현을 안하셨고 평소처럼 드셨기에 책에 소개된 내용과 같은 상황까지 가지 않았기도 했지만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심하게 겪질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본인이 직접 드셨기 때문에 가족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시지는 않았다.그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고통이 덜했기 때문에.

 

"어떤 인생을 사는가는 그 과정을 통과할 때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음 앞에 설 때에만, 때론 죽은 뒤에야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그 가치를 만든 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어요.

 

아버지를 보내드린 기억이 떠올라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해서 중간에 읽다가 잠깐 책을 내려 놓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 평범하게 먹는 것이나 행동들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며 살아야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평범하게 먹던 열무국수 닭볶음탕 콩국등 비싼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평범한 음식들이고 자신이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먹었던 음식들이다. 음식들이 병을 이기게도 해주지만 삶을 연장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 하루 한 끼 별생각 없이 먹던 것을 감사하며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먹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지 자주 잊는다.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늘 기억하려 한다. 먹기 싫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남기는 음식이 지금 몸이 아픈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에 꼭 먹고 싶은 마지막 희망의 음식일 수도 있음을.

 

삶 뿐만이 아니라 죽음도 삶의 연장선상에 있고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 죽음이란 삶의 또 다른 얼굴이지만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죽음이 아닌 병마와 싸우며 맞게 되는 마지막이란 남겨진 이들에게는 너무 큰 아픔이고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말로 다 할수 없는 고통이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물론 병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겠지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이들과 가족의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징하게 울려준다. 살아가면서 한순간 한순간 모두 소중하겠지만 마지막 그 순간까지 서로의 가슴에 남겨진 앙금 한 조각 모두 불태워 버리듯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사랑해주며 서로의 기억에 사랑했던 사람들로 기억하며 소중한 빈자리를 남겨 놓는 이야기는 生도 설렘이고 감동이지만 死도 감동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굽이굽이 넘어온 인생의 고비가 많은 만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누군가 머물 그늘이 되어줄 수 있는 걸까?

 

가족의 정말 소중한 일부분이었던 한사람을 먼저 보낸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나보다 먼저 보내는 이는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은 정말 가슴에 묻게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식구, 밥을 함께 먹었던 소중한 이들과의 행복한 시간과 추억은 한사람의 인생 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조명하며 좀더 우리 삶의 생과 사를 솔직하게 보여주어 가슴을 울린다. 음식은 맛으로 먹지만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먹는다고 한다. 유한한 삶의 끝에서 소중한 이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을 떠 올리면 그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잠시나마 삶의 연장선이 될 수 있음은 거기에 함께 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가족이 함께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가족도 딸들이 객지에 나가 있으니 함께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이다. 방학이나 되야 겨우 모여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또 행복한 추억을 쌓아 간다.식구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을 때에는 함께 모여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던 때,맛있는 것을 먹었던 그 시간을 추억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사람은 먹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먹기도 하겠지만 먹는 다는 것이 점점 시간에 쫒기고 자신의 위하기 보다는 남의 눈치에 길들여지며 건강을 잃는 경우도 많은데 건강을 잃고 나서야 우리는 기초적인 '섭생'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식구를 찾기도 한다. 무엇이든 곁에 있을 때에는 소중함을 모른다. 곁에서 사라져봐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평소에 즐겼던 것들이 내가 평소에 함께 했던 이들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도 하지만 평범해서 잊고 있던 그 무언가를 깨닫게 해준다.

 

오늘이란 시간은 어제 죽어간 이가 간절히 바라던 '내일'이다. 그 오늘이란 시간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가. 사년 전 아버지를 보내 드렸던 엄마도 그리고 나도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잘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이들이 아직은 힘든 시간이겠지만 잘 이겨내고 고통에서 벗어나 밝은 내일을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행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생명이란 유한한 것이기에 순서없이 누군가는 먼저 가게 되어 있는 것,숨쉬고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베풀어야겠다는,행복의 가치가 거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함 속에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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