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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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납치사건>을 낸 후 13년 만에 다시 <신황태자비 납치사건>이 나왔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일본은 내년 봄부터 사용될 초등학교 5.6학년용 사회 교과서에 모두 '일본 고유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령했다.' 는 주장이 담긴다고 한다.정말 신라장수 이사부가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다. 은근과 끈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백의민족인 우리,당연한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우리 땅도 자기네 땅이라 우리고 남의 땅도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은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서 일본의 미래가 도대체 어떻게 되길 바라는 것인지. 과거 역사를 왜곡한다면 미래는 자라나지 않고 퇴화한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듯 한데 그들이야말로 퇴화의 길을 스스로 걷겠다는 것인지.

 

저자의 책은 대부분 다 구매를 하고 읽어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역사를 다룬 소설들이라 소설속에서 만나는 역사지만 좀더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든다. <고구려> <1026> <천년의 금서> <최후의 경전>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읽으려고 갖추고 있지만 기회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들보다 꼭 챙겨보게 되는 작가가 바로 김진명이다. 어떻게 보면 공교육에서도 멀어진 역사를 그가 일깨우고 있다고 보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국사'는 반드시 필수과목이 되어 아이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우리는 지금 뿌리가 없는 나무를 보고 잘자라고 거름을 주고 물도 주고 갖은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잘자라지 못한다. 뿌리가 없어도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나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갖은 비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역경의 시간을 거쳐야만 한다.지금 우리가 그런 위치에 놓여 있는 것만 같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뉘우치기는 커녕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떳떳하게 교과서에 올리지를 않나 '난징 대학살'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난징전투'라는 어처구니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합리화 시키고 있다.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숨기려해도 여기저기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의 '진실' 은 그 오랜시간이 지나도 빛을 바래지 않고 수면위로 올라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들이 짓밟은 한반도 곳곳에 아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거짓을 자기자신들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도 주입식으로 왜곡시키는지 가슴이 끓는다. 그렇다고 딱히 일본을 적대시 하며 행하는 행동은 없으니 그게 더 화가 나기도 하는데 이런 소설이라도 읽으면서 애국심을 키우듯 불끈불끈 하는 일로 삭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다.

 

"그렇다면 역사란 뭔가? 현대사는 어떻게 기술되는 건가?"

"역사는 주장이야. 사실을 잔뜩 열거해 늘어놓고 크고 작은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야. 역사란 어떤 시각을 가지고 그 시각에 따라 사물과 현상을 배치하는 거지."

"그럼 거기에 진실은 없다는 말인가? 역사학자란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야?"

"역사 기술은 힘이야.힘 있는 자의 목소리가 기록되는 거지.학자들이란 그 힘에 기생하는 존재들이고."

"그러나 학자의 소신도 있지 않는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학자의 소신 말이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난징대학살'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것. 왜곡된 교과서에서 그들이 무얼 배우겠는가? 제대로 된 역사를 외면하고 위에서부터 썩을 대로 썩어빠진 역사왜곡이이니 그야말로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제대로 깨이고 현실을 볼 줄 아는 이들이 있기나 할까? 했는데 소설 속에서 다나카나 황태자비 마사코는 그런 잘못된 역사에 대하여 아니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고 사죄를 한다. 자신들이 똑같은 위치에 처했다면 어떠했을까? 역사에서도 역지사지를 해 본다면 답이 나오는데 자신들 입장만 생각하면 뉘우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황태자비 마사코가 가부키자에서 고교동창생들 둘을 만나러 잠깐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된다.누군가에게 유괴가 되었는데 왜? 누가? 무엇 때문에 유괴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나카라는 인물이 투입되면서 날카롭고 냉철하게 사건을 파고 들게 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 왜 황태자비여나 했나? 누구에게 접근해서 캐낸 정보로 황태자비 마사코를 유괴했을까? 그러다 드러나게 된 범인으로 지목되는 인물이 '중국인' 그리고 그가 사부로 여기는 '한국인'이 물망에 오르고 중국인이 난징대학살의 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의 손주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난징대학살이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난징대학살,'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 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그 현장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중국인 범인으로 지목된 이의 조부인데 조부가 평생 외친 말은 '오버타임'이다. '연장전' 이라는 오버타임의 말을 읽고 끔찍하단 생각을 했다.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지고 게임처럼 할 수 있고 그 수가 비슷하다고 해서 '연장전'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그야말로 인간존엄성이 완전히 배제된 이야기다.

 

그런가하면 한국인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민비시해사건 현장에서 민비를 지켜야 했던 임무를 맡고 있던 이가 자신의 임무를 내팽개치듯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쳤다.그리곤 민비는 무참히 일본군들에 의해 시해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능욕을 당했다. 그런 이야기가 쓰인 '한성공사관 제 435호 전문' 이 존재하느냐 라는 것보다 왜 그들은 그것을 감추어야 했는지 묻고 있다. 그 문서에 쓰인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 보고서는 소설이 발표된 후 김진명 작가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얽힌 소설이라고 하지만 정말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감추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국사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꿈나무들이 어떤 미래를 그리게 될지.

 

"이 일은 복수가 아니오. 범죄도 아니오."

"놀랍군요. 사람을 납치해놓고 범죄가 아니라니."

"때로는 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범죄요."

......

"이것은 범죄가 아닌,불의에 대한 궐기요."

 

황태자비를 납치를 해서 인질로 삼고 있지만 범인은 전혀 납치범같지 않은 범상함을 풍기기도 하지만 마사코는 범인의 이야기를 듣고 점점 그에게 동조를 한다. 범인에게 동화되기도 하지만 그가 말해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자신의 현재 상황과 비교해 보게도 되지만 왜 이런 진실이 숨겨져야 했는지 통탄을 하며 범인의 편에 서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사죄를 하기로 맘을 굳힌다.비록 황태자비이지만 자신도 일개 일본인이라는 것,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한다고 그 진실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다나카와 마사코와 같은 인물이 현재 일본과 우리의 관계를 좀더 진취적이면서 우호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저자는 그런 자세를 원하고 있고 우리도 그런 것을 바라고 있지 교과서에 자신들의 땅도 아니면서 자신들의 땅이라고 거짓을 표기하며 가르치는 것을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 것을 왜 자꾸 숨기려 하고 왜곡하려 하는지.하지만 소설은 그런 과거이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풀어 놓는다.우리는 언제쯤 이런 사죄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고나 있기나 할까?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진실이 은폐된 역사를 배우고 있고 강요하며 주입시키고 있는데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나 있는지.

 

소설에서 황태자비인 마사코를 범인들이 민비시해처럼 살해를 했다면 소설은 어떻게 변했을까? 피를 피로 갚는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결코 우리는 그들과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임선규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저자가 13년 만에 다시 고쳐야했던 이유를 알 듯 했다.범인이 한국인 두 명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거기에 '난징대학살' 까지 넣게 되었으니 일본과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과거만행은 한국 중국 모두에 가해자였던 것이고 한중일은 영토 분쟁에 휩싸여 있다. 자신들의 과거도 뉘우치지 못하면서 영토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 일본,언제쯤 속시원히 과거를 청산하려는지.독도 영토 문제를 교과서에 표기하겠다는 문제로 속이 끓는 중에 읽어서일까 더 부글부글이다.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을 '글'이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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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 - 궁극적 암 치료는 항암보다 영양요법!
필립 빈젤 지음, 김정우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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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더이상 남의 일도 아니고 난치병이긴 하지만 암에서 자유를 얻은 이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현대인들의 삶이 풍요로워진만큼 암은 우리 생활 속에 더 밀접하게 들어와 있는 듯 하고 암이 급습하고 나면 삶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암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험을 들기도 하고 생활에서 피해야 하는 것들을 살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식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고 편하다는 이유로 길들여진 식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치기엔 힘들다.내가 아무리 주의를 한다고 해도 환경적인 요인에서도 알게 모르게 암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도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이 암이다.

 

 

암이라는 것이 다른 이들의 일처럼 여기며 살다가 친정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으시고 일년여 고생을 하시다 가셨기에 직접적인 암의 피해자,곁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대부분 암에 걸리고 나면 '종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종양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수술을 하면 살 수 있는지,아니면 수술을 하면 다른 곳으로 전이는 되지 않는지 등 그리고 그 후 방사선 치료나 약물치료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묻게 된다. 그리곤 함께 병행하게 되는 것이 '민간요법' 인 듯 하다.누가 '암에 무엇이 좋더라' 라는 카더라통신처럼 암에 좋다는 말만 듣게 되면 무엇이든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기 보다는 먹으면 만병통치처럼 낫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좋은지 나쁜지 따져보기 전에 한번 써보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래본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났던 기적이 내게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친정아버지의 경우는 암의 발견은 조금 빨리 해서 행운이었지만 암의 자리가 좋지 않은 불운이어서 수술을 할 수 없고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상태였다. 수술을 했다면 그야말로 전이로 인한 내일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라 고통을 줄여줄 약만 의존하는 상태였는데 어떻게 보면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보기 볼 수 없는 자연적 운명을 마치셨다고 봐야한다.

 

아버지의 상태를 바라보며 암이란 수술이나 약물에 의한 치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상태를 고려한 '영양'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암에 걸리시고 본인은 암이란 것을 모르셨지만 급격하게 떨어진 입맛 때문에 도통 예전만 못하게 드셨기 때문에 그게 큰 걱정이었다.바라보는 자식들은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인 것들을 물로 내려서 드시게 하던가 좀더 영양을 고려한 것들을 드시게 했지만 급격하게 떨어진 입맛 때문에 체력이 눈에 보이게 떨어지고 체력저하로 인한 삶의 연장이 안된 듯 하다.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바라 본 결과 병원에서 혹은 의사들이 암환자들에게 하는 것은 수술이나 약물치료,종양을 줄이기 위한 행동이지 영양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의사는 없었던 것 같다.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레이어트릴(비타민 B17)과 영양요법을 알았더라면 좀더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까? 읽으면서 많은 의문을 가졌다.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는 한줄기 빛이라도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곳도 아닌 FDA에서 사용금지를 내렸다면 어떨까?

 

의학박사인 필립 빈젤은 오하이오 주의 워싱턴 코트하우스에서 가정의로 의사생활을 시작하여 40여년간 암 환자들을 치료해 왔다. 그는 영양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영야이 그 질병 예방과 치료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믿게 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의 영양학적 지식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암 선고를 받은 이들중에 그에게서 영양요법으로 치료를 받은 이들중에 암으로 사망한 사람들보다는 다른 병이나 이유로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 암이라는 것이 직간접적으로 생명에 영향을 미쳤을테지만 암을 이유로 사망한 이들의 비율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병원에서는 암 치료를 종양제거 수술이나 방사선치료 약물치료에만 의존을 하고 영양요법을 하지 않을까? 그가 예로 들어 놓은 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 병원에서는 종양의 크기로 치료가 잘 되었는지 판가름하지 그사람의 삶의 질로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치료를 하는 목적은 분명 '살아 있기 위해' 서이다. 정말 책의 제목처럼 '살아 있다는 게 중요' 지 죽음에 이르려고 치료를 하거나 병원에 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자신이 살아야 할 자연적 생명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비타민 B17(아미그달린,레이어트릴):비타민 B17 아미그달린 분자는 두개의 포도당과 벤드알데히드, 시안화물(청산가리)로 구성된  수용성비타민이다. 이 비타민 B17이 체내에 들어가면 정상 세포에는 없고 암세포에만 있는 베타글루코시다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청산을 방출하여 암세포를 죽인다.

 

그의 영양요법 치료를 받고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이들이 건강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살고 있거나 혹은 병원에서 말한 삶보다 더 누리고 산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원에서 말기 암 선고를 받고 몇 개월 혹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고를 받았지만 영양요법 치료를 받고 삶의 질의 높이고 점더 평화롭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이야기지만 병원이나 관계된 의사들이 알고 싶은 이야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저자는 다른 의사들에게는 '레지스탕스'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소송에 휘말린 이야기부터 심상치 않게 나가는 이야기는 결코 그가 하는 일이 녹녹치 않아따는 것을 알 수 있다. FDA가 '레이어트릴을 조심하세요! 인체에 유해합니다!' 하고 사용을 금하게 한 약을 그는 영양요법을 위해 처방해야 했고 환자들은 필요를 느꼈다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약물이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통용이 되는 것을 FDA의 사용금지로 인해 환자나 저자처럼 곤란한 경우가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그는 환자의 편에 서서 레이어트릴 허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의학지식및 모든 것을 다 바치듯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어쩌면 저자와 FDA의 끈질긴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암을 수술이나 방사선치료에만 의존을 해야하나 혹은 영양요법이라는 우리가 놓친 주목적의 차선책이라는 방법에 주목을 해야하는지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암에 걸려서 병원을 찾는 것오 우리가 낫기 위하여 가는 것이지 결코 죽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병원의 상술에 수술이나 방사선치료를 하고도 영양요법보다 못한 삶을 살다 더 일찍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비교를 해 놓았다.암이라는 것은 걸리는 순간부터 환자에게 알려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우리도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당사자는 자신의 생명이 어느 정도 남았다는 것을 아셨는지 유언과 같은 말씀을 차근차근 남기셨다. 물론 환자에게 말을 해서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예전에 누렸던 평범한 삶을 누리고 살아가기를 원한다. 수술과 치료로 지쳐서 더 불행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 힘들게 살기 보다는 평온한 삶을 원할 것이다. 병을 이겨낸다는 것은 몸에 영양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질병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지 수술과 약물로 모든 것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수술과 약물치료가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힘이 될 수 있는 영양이 제대로 공급이 되어야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환자들에게 130세가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비타민,효소,레이어트릴을 섭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환자들이 130번 째 생일날에 그런 음식들의 섭취량을 줄이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환자들에게 암은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당신의 몸에서 방어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암은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환자가 예전의 식습관으로 돌아가면 금세 다시 병을 얻을 수 있다.

 

암세포를 파괴하는 비타민 B17의 실체를 깨우쳐 준 저자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좀더 우리 주변에도 이런 환자의 편에 서는 의사들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게 되었다. 상술로 받아 들여지는 환자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인간 대접을 해주는 진정한 의사가 있어야 환자도 믿고 의지하며 더 병을 치료하겠다는 의지가 생길 듯 하다. 그런가하면 패스트음식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암이라는 친구로부터 좀더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영양요법에 관계된 좀더 조심하고 챙겨 먹어야 할 부분에 관심을 기울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식습관만 고쳐도 병을 어느 정도는 예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한번을 챙겨도 건강을 고려해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가 오랜시간동안 환자들과 나누었던 영양요법이나 레이어트릴과 FDA와의 싸움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중요' 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지 약이 인체에 유해한지 무해한지의 의미라고는 보지 않는다. 의학이 더 발달한다면 정복되지 않는 암은 없을테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환자가 고통을 덜 느끼면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일 것이다. 그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면서 사는 날까지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궁극적인 암 치료 방법 무엇이 해답일지 모르지만 한번 깊게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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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연대기 - 나폴레옹시대의 신고전주의부터 21세기의 복고와 신미래주의까지 패션의 역사를 만든 위대한 순간들
N. J. 스티븐슨 지음, 안지은 옮김 / 투플러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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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적인 패션 사업이 시작된 1800년대 부터 2000년대 까지 사회적 배경과 함께 패션의 역사를 둘러 보는 좋은 책이 보여 패션을 전공하고자 하는 딸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먼저 보게 되었다. 나폴레옹시대의 신고전주의부터 21세기의 복고와 신미래주의까지 패션의 역사를 사진과 글로 보다보니 그 변화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예전에 살았다면 코르셋에 버슬등 그시대에 살았다면 정말 갑갑해서 어떻게 옷을 입었을까 생각이 되면서 현대에 편한 옷을 맘대로 골라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패션은 전쟁과 경제 위기를 견뎌냈으며 개념과 기능 사이에서 혼란도 겪었다.과거의 재해석과 미래의 상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계추와도 같다. 21세기 패션은 기술과 접목될 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패션은 역사와 우리를 묶어주고 역사 속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면서 그 자체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이 책의 역할이기도 하다.

 

패션은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전쟁이나 그외 일들이 패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그런가하면 그 시대에도 분명 패션 아이템과 패션 아이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패션이 사치나 부를 나타내는 단위가 아니라 그 시대와 역사를 나타내는 도구로 보면서 1800년대부터 시작해서 11장으로 분류하고 다시 10년 단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먼저 섭정 시대와 낭만주의, 초기 빅토리아 시대, 오트 쿠튀르, 벨 에포크, 아르 데코와 광란의 1920년대, 스타일리한 1930년대, 전쟁의 여파,뉴 룩, 활기찬 1960년대, 글램에서 신낭만주의까지, 복고와 혁명으로 11장으로 나뉘어 사진과 함께 패션의 역사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게 정리가 잘 된 듯 하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전하여 스마트폰 하나면 연애인 누가 무엇을 입고 들고 나왔나 하는 것을 검색을 통해 그리고 주문까지 바로 할 수 있어 그야말로 아이템 하나로도 대박을 터뜨릴 수 있기도 한 시대인가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을 바로 손 안에서 쉽게 검색하고 따라 할 수 있지만 전쟁이나 산업혁명 경제불황등으로 인해 패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들이 발생하던 시대에는 시대적 배경이 패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알게 되니 요즘도 경제가 불황이면 여성의 옷이 점점 짧아지고 붉은 색 립스틱이 유행한다는 등의 이야기처럼 그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패션의 아이템으로 또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전쟁과 경제불황으로 인해 여성들이 집안 살림을 하다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여성의 복장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몸을 꼭 끼게 만드는 코르셋을 벗어나 편안하면서도 활동적인 옷으로 변화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때마다 변화의 기로에 선두주자가 된 세기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있어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패션에 뛰어들게 되었는가까지 읽다보면 더 재밌게 빠져들 수 있다. 예전에는 왕이나 왕비등이 패션의 선두에 섰다고 한다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나 예술인들의 패션이 한시대를 풍미하기도 하고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아이템이 되기도 하는 패션,그러나 '우리는 패션 때문에 어리석은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일은 패션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정말 옷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리 앙뜨와네뜨와 조세핀 등 유럽의 왕족부터 LBD를 앙증맞고 깜찍하게 입은 오드리 햅번, 그리고 샤넬의 미니 스커트, 고티에의 원뿔모양의 브라까지 정말 그 시대를 나타내는 패션의 상징적인 인물들이나 패션이 그 시대에 맞는 여성복이나 남성복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볼 수 있어 패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본다면 재밌게 볼만한 책이다.그런가하면 패션이 대중문화예술과 함께 한 것이 오래된 듯 한데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대중문화예술이 패션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이 책은 시대별로 구분하여 시대의 콘셉트와 아이템및 사회적 변화를 다루고 있어 패션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기도 하며 엠파이어 드레스부터 프라다 가방까지 패션 아이템등이 사진과 설명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 패션의 변화를 살펴보기에 적절하다.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푹 빠져 들었는데 패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듯 하고 딸에게 선물해줘야 할 책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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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9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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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자리 나름래도 '열심'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유대인이 적지 않았다.그중에는 자신들의 '열심' 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극단적인 폭력의 힘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마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로마에 빌붙어 아첨하는 동료 유대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zealots'  이라고 불렀다.'

 

신앙을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예수'나 '성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특별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린시절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몇 번 간적도 있고 크리스마스 때에는 행사를 구경하느라 가서 비신앙이지만 신앙적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즐겼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읽기 보다는 그의 이력에도 나와 있듯이 '이란 혁명 때 미국으로 건너가 10대 시절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가 다시 가족의 종교인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이었다가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지만 그는 작가지자 종교학자이다. 책은 소설을 읽듯이 읽어나갈 수 있고 '1부: 또 다른 종류의 희생 제의' 에서는 '인간 나사렛 예수' 에 대하여 그린다. 신앙적으로 기자들에 의해 부풀려진 예수가 아니라 좀더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였으며 왜 이런 인물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드라마틱하게 시작을 한다.

 

변방의 구멍이라고 불린 1세기 유대,숱한 침략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리더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봉기했고 그 중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혁명적인 리더였으며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종교가 되어 오히려 로마를 집어 삼켰다.레자 아슬란은 신앙적인 리더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예수의 발자취를 돌아보듯 어떤 시대였기에 예수라는 리더가 필요했는지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인 리더로 그리고 신앙으로 발전하여 이어져 왔지만 종교적 예수보다는 시대가 필요로 했던 혁명적인 리더였던 예수를 잊지 말자는 의미처럼 그 시대를 상기시킨다.

 

'기원후 64년, 그동안 이 땅에 쌓이고 쌓인 분노와 원한과 메시아에 대한 '열심' 이 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폭동으로 분출되기 2년 전이었다. 쿠마누스와 펠릭스, 페스투스와 알비누스, 플로루스, 이들 총독들은 하나같이 갖가지 위법과 부정으로 유대이들이 봉기에 일조한 셈이다. 이러한 잘못에 대한 비난은 로마가 받아야 했다. 고통당하는 주민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 역시나 로마의 책임이었다. 물론 사회질서 붕괴에 대한 책임은 유대 귀족들에게도 있었다. 힘과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로마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까지 아첨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긴장이 고조된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또 예수는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만약 주석가들의 해석이 맞는다면,예수의 대답은 기껐해야 로마에 대한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제사장과 그럴 수 없다는 젤롯의 상반된 입장에 타협하려는 겁쟁이의 대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포함해 나사렛 예수에 대해 기록한 어떤 글이든, 스테파노스와 바울처럼 예수를 한 번이라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앙인들이 읽는다면 받아 들이지 않을 부분들이 있을 듯 하다. 종교학자라고 해도 역사도 모든 것이 진실일 수 없듯이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저자가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신 또한 과거에 기독교에 심취했었고 현재는 가족의 종교인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다고 하지만 그가 신을 부정하기 보다는 부풀려진 예수가 아닌 목수의 아들이었던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은 요즘 뉴스에서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과 비교해볼만 하다.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인용한 부분 보다는 역사적 이야기를 다큐처럼 소설처럼 이야기해 놓은 앞부분을 좀더 재밌게 읽었는데 난세가 영웅을 만들듯이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었던 나사렛 예수,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인 그 이전의 인간 예수.리더쉽을 갖춘 그를 재밌게 조명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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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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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고 보니 페북에서 겊표지 설문에 응했던 책인 것이다.내가 원했던 색상의 표지가 결정되어 괜히 뿌듯한 느낌이지만 책 소개를 간략하게 읽어보고는 '헉'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괜한 생각에 읽기 전에 괜히 불편함에 휩싸였다. '선생님, 남자가 되게 해 주세요! 강하게 만들어 주세요! 착한 유대인 소년은 이제 됐어요. 남들 앞에선 부모님 눈치나 보고,혼자 있을 땐 00나 주물러대고, 이런 건 이제 됐어요!.' 삼십대 유능한 변호사 그야말로 외모 능력 모든 것 갖출 것 다 갖춘이의 불평 불만이다. 그의 속에는 무엇이 잔뜩 쌓여 있길래 불평일까.

 

'포트노이증' - (앨릭젠더 포트노이(1933~) 의 이름을 딴 병명으로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슈필포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노출증, 관음증,페티시즘, 자기색정, 구강성교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환자의 '도덕성' 때문에 공상도 행위도 진정한 성적 만족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강렬한 수치심과 더불어 응징, 특히 거세 형태의 응징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다. 슈필포겔은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앨릭스는 삼십대 중반의 모든 것을 갖춘 변호사다. 그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는 방식으로 쓰인 이야기는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딱딱하고 거기에 사춘기 소년의 자위행위이며 성기를 표현하는 말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거침없이 쓰여서일까 괜히 책을 읽는 나 자신이 관음증인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기도 했지만 읽다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앨릭스가 불쌍하다는 느낌도 들면서 괜히 다독다독 해줘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왜 이런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은밀히 털어 놓거나 자신안에 말 못하고 간직하고 있던 것을 한사람을 붙잡고 이야기 하다보면 봇물 터지듯 거침없이 나오는 것처럼 마구마구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부터 해서 부모님의 치부까지 모두 여과없이 이야기를 꺼낸다.한번 이렇게 쏟아 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멍에를 벗어 버리듯 시원하게 카타르시스가 될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을 앨릭스는 삼십여년동안 묵은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놓고 이제 고치를 벗어나려고 한다.

 

보험외판원인 아버지에게서는 왠지 억눌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늘 변비로 고생을 하는 아버지,하지만 그는 늘 자위를 하듯 성적인 충동에 휩싸여 있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그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집안에서는 유대인인 부모님 밑에서 유대인의 옷을 입어야 하는 거추장스런 환경에서 아버지의 직업 때문일까 우등생인 그와는 다르게 혼자 있을 때에는 소심한듯 하면서도 혼자만의 성에 빠져 있다. 사람의 겉모습을 봐서는 모든 것을 평가하지 못하듯이 친구들은 가정을 이루었어도 그는 아직 자신만의 결정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잘나가는 친구의 이야기를 하지만 어찌보면 자신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그런 남자가 이제는 정말 남자가 되고 싶어 자신의 과거를 거침없이 쏟아 내놓고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는 불편한 진실처럼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고 딱딱하고 재미없을 듯도 한데 난 왜 이남자가 불쌍할까.동정심을 불러 일으킨다고 봐야하나.암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앨릭스가 될 수 있기를.

 

무엇이든 너무 직설적이면 더 재미가 없나보다. 이 책이 '사춘기 소년의 자위행위에 대한 상당한 양의 상세하고 창조적인 묘사 때문에 1969년 출간 당시 미국 도서관들이 금서로 지정하고, 호주에서는 금수 조치되어 펭귄북스가 밀매까지 단행했던 문제작' 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옮긴이가 말한 '야하다' 라는 소문이 한가닥 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옮긴이는 학창시절 야하다는 이야기에 이 책의 내용도 알지 못하고 사서 읽게 되었고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옮기게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정말 묘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는데 책에 대한 평은 반 반 나뉘는 듯 하다. 재밌게 읽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저자의 다른 책들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이 책과는 어떤 면이 다른지, 이 책에서 유머가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발전을 하는지 궁금하다. 몇 해 전에 필립 로스의 <울분>을 읽었는데 그때에도 이 느낌 뭐지 했는데 아직 그의 깊이를 헤아리기엔 내가 조금 부족한 듯 하다.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의 책을 소화하기엔 내그릇이 작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또한번 느끼며 좀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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