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 - 영화심리학자 심영섭의 마음 에세이
심영섭 글.사진 / 페이퍼스토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영화에 한참 빠져서 지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아니 그런 시간이 지나고 이젠 조금 시들해졌다고,극장에 간다는 것이 귀찮고 챙겨 본다는 것 자체가 왜 그리 싫은지.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데 봄이 오면 아마도 다시 영화에 빠져 모든 일 제쳐두고 극장으로 달려가지 않을까 싶다. 요즘 영화를 챙겨보기 보다는 그저 주위에서 들리는 이야기들로도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느낌,아마도 스마트폰과 그외 SNS 때문에 영화에 대한 갈증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궁금증이 있어야 달려가는데 그 궁금증을 매체나 SNS에서 너무도 해부를 잘해 놓으니 호기심이나 궁금증없이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단물 다 빠진 껌을 씹는 것과 같아 극장나들이를 조금 미루고 있다.

 

 

그런면에서 EBS에서 금요일과 토요일에 해주는 '고전영화'를 보고 있는데 느낌이 좋다. 다시 영화에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고전이란 그래서 고전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본다. 오래전 보았던 흑백영화나 그외 영화들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면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좀더 세상을 살아 본 연륜이 있어서 그런가 더 폭넓은 안목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전에 보지 못하고 읽지 못했던 행간을 읽듯 그 행간에서 삶의 깊이를 보기도 하고 인간의 감정 그 정도를 헤아리며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영화 속에서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듯 하면서 삶이란? 물음표를 던져 보기도 하지만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다시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것들'

프롤로그의 제목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것들' 정말 영화를 보다보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시간에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영상이 주는 텍스트만 받아 들이며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런 것들이 있었지 하면서 보는 그런 느낌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첫째장에서는 '사랑에 관하여' 사랑을 이룬 이야기도 많겠지만 사랑에 실패를 하고 느끼는 그 감정,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두번째 장에서는 ' 내 안을 파고드는 고통스런 감정에 관하여.' 분노,외로움,열등감 같은 감정들,'부정적'인 감정이라 표현한 것들을 다시 재단해 본다. 세 번째 장에서는 '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영혼의 회복에 관하여.' 행복,용서,감사와 같은 마법과 같은 감정들에 대하여 알아 본다.

 

사랑이라는 그 놈,사랑이라는 것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사랑,이별,두려움,외로움,쓸쓸함 뿐만이 아니라 이별 후에 느끼는 또 다른 감정들.아픈만큼 성숙해지듯 사랑을 해봐야 감정의 열매가 영글어가듯 어떻게 보면 사랑을 하면서 그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것 같다.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사랑을 사랑하지 말고, 당신의 사람을 사랑하라. 조건 없이.욕망 없이. 두려움 없이.' 아무런 이유없이 시작한 사랑은 사랑을 하면서 욕심을 부리게 된다. 내것이기에 가지는 감정이지만 얼마나 거짓되게 만드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사랑 그 순수한 감정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농후해진 후,모든 것을 겪어 보고 난 후가 아닐까.사랑이라는 감정에 비를 맞기도 눈이 내리기도 그리고 맑은 날 모든 것들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모든 맛을 경험한 후에 겸허히 받아 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슬픔이나 기쁨 이별의 아픔등과 같은 감정들이 내게 오면 무척 큰 파도에 휩쓸린것처럼 생각 되지만 그것이 타인의 아픔이라면 어떨까? 영화는 그런 면에서 간접적으로 감정의 경험을 해보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나 온 감정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아 가끔 먼지가 낀 거울을 닦듯 감정의 정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 '시네마천국' 모든 부분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부분인 영화 속 아름다운 키스장면들,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맞이하는 감정이 아름다운 교감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또 다른 감정에 행복함을 느끼던 그런 시간도 있었다. 극장을 찾을 때에는 둘이 가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는데 무엇보다 좋은 것은 '혼 자 서' 갈 때가 제일 좋다. 내 감정에 폭 빠져들수도 있고 흔들리지 않고 느낌을 온 몸으로 흡수하듯 할 수 있어 가끔 혼자가는 영화를 선호한다. 그것도 조조로 말이다.이른 아침 시간에는 소음이나 방해요인이 덜 하다. 그런 시간에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그것도 개봉 처음시간 조조로 본다는 것은 정말 행복이다. 그렇게 느끼며 보았던 영화 속 모습과 감정은 우리네 삶이다. EBS영화로 중간에서 보았던 <자전거를 탄 소년>이라는 영화가 인상 깊었는데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정말 좋았다. 다른 영화들도 보았거나 혹은 조금 그 느낌을 알고 있는 것들이라 무리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자전거를 탄 소년>이란 영화는 보고 나서도 뒷감정이 남아 있었는데 그 갈증이 조금 풀렸다고 해야하나? 이 영화에 대하여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 표현해 놓았는데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려지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도 버려지듯 겉돌기만 하는 소년이 도망치듯 나무 위로 갔다가 소년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것처럼 나무 밑으로 떨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다.돌을 던진 소년들은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겁을 내고 소년에게 다가 온 순간,전화벨이 울리고 소년은 누군가 자신을 찾는 전화에 화답을 하고는 무심하게 자전거를 끌고 다시 현실 속으로 달려간다.소년이 누군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헤치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현실이 아련하게 소년을 한참 보라보게 했던 장면이 자꾸만 여운처럼 남아 있는데 읽게 되니 내가 그 영화를 조금이라도 보게 된 것은 이런 인연을 맺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영화에도 정답은 없다. 누군가가 내린 결론이 아니 리뷰나 이야기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개개인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과 느낌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느낌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어느 것 하나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우리의 삶은 계속 되고 있고 감정이란 무한반복처럼 전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지 말란 법은 없으니 간접 경험으로 좀더 내 감정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여유를 부려 보는 것은 좋다고 생각을 한다. 너무 깊게 파고 들려고 신경쓰며 보기 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즐기듯 볼 때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감정의 곡선이 말랑말랑해지고 있을 때 이불을 박차고 나가 창가에 핀 한송이 꽃과 마주하게 해주는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는 느낌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그저 무작정 어느 페이지를 펴고 읽어도 좋을 듯 하다.느낌아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1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쓰다 신조의 책은 <기관,호러 작가가 사는 집>으로 만났다.으시시 하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호러 미스터리,이 책은 겉표지부터 반은 여자 반은 남자의 모습이라고 봐야할까? 암튼 특이한 인물(?)이 범인이 누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한데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민속신앙 토속신앙과 미스터리가 만나서일까 더 일본적이고 시골 어느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토속신앙과 연쇄살인사건이 결부된 이야기 같아 좀더 빠져들며 읽게 된다.

 

타칭 명탐정이라 불리는 괴기환상 작가 도조 겐야와 그와 함께 하는 편집자 소후에 시노,그 둘은 하미 지방을 방문하게 되고 그들은 하미 지방의 증의와 마주하게 된다. 이들이 방문했을 때만해도 마을의 위쪽에 위치한 진신호에는 물이 많이 말라 있었다. 증의제가 필요해 13년만에 기우제를 지내게 된 것인데 증의는 사요촌에서 준비하게 되고 류지의 양녀였던 사기리는 전쟁 후에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기리와 그녀의 딸 쓰루코 사요코 그리고 아들 쇼이치는 일본까지 오는 동안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게 되는데 무언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자신들의 어머니에게는 무언가 대단한 힘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쇼이치도 그와 비슷한 것을 배에서 느끼게 된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 오지만 할아버지 류지의 힘보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자신들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과 아버지없이 몸으로 부딪혀 일궈 나가기엔 힘에 부쳤던지 어머니는 허망하게 돌아가시게 되고 그들은 할아버지의 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왜 류지는 사기리를 양녀로 맞이했고 그녀의 딸 쓰루코를 편애하게 될까?

 

사요촌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외눈 광'이라 불리는 곳이 있고 이상한 '우물'이 있으며 외눈 광에 가려면 대숲을 지나야 한다.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외눈 광과 그리고 증의 때 신남인 류조가 살해된다. 그의 형인 류이치도 13년 전에 증의 때 밀실과 같은 물 속에서 놀란 눈으로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범인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또 13년만의 증의에 또 이런 류지의 아들인 신남이 죽은 것이다. 밀실과 같은 공간에서 누가 신남을 죽였을까? 모두가 바라 보고 있었고 진신호에서 배의 아주 작은 움직임이 잠깐 있었을 뿐 누가 접근한 것도 아니고 사공이 있었을 뿐인데 그렇다면 자살인가 타살인가? 신남의 살인사건 이후 신관이 차례대로 죽는 신남연쇄살인사건,신관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지만 류지는 경찰에 알리지 않으려한다. 경찰에 알려지만 덮어야 할 것들이 수면으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피해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중에 살인사건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증의 때문인지 비는 계속적으로 내려 마을을 위협한다.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사는 산골마을,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미즈치 님이다. 물신에게 재물을 바치며 비가 오지 않으면 증의를 비가 많이 오면 감의제를 지내며 그야말로 자연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토속신앙과 민속신앙이 전부인것처럼 떠받들며 산다. 그런데 그 기우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왜 자꾸 신남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인지.마을에 쇼이치네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사건은 겁잡을 수 없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도조 겐야는 경찰도 아니면서 탐정도 아니면서 명탐정이 되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추리하게 된다.그렇다면 누가 왜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것일까? 그는 명탐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철저한 메모' 그 메모를 정독하고 냉철하게 판단한다. 물의 신을 섬기며 농사를 짓고 사는 촌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서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주던 물의 신 때문에 빚어지는 전통과 금기가 시간이 흐른 뒤에서 그 전통이 변하지 않고 지켜져야 할까? 토속적인 것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변화를 거치지만 그 뼈대는 변하지 않고 지켜지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전통이 변질되어 지켜져 내려오듯 인간의 욕심이 보태어지면서 전통은 무섭게 그 모습을 바꾸지만 많은 이들의 눈을 속이면서도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을 전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분명 류지가 사기리를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을 시키며 가르칠 때도 잘 되지 않았던 것이 그녀의 딸들이나 쇼이치에게 통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도 끝났고 시간은 흘러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전통은 어쩌면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밖에 보일 수 있으며 인간이 바라는 염원에 자연이 맞추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보면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이들이라 순박하고 순진하다 할 수 있는데 그들이 감추어 왔던 진실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순간에 진실은 또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그들이 모시는 미즈치 님처럼 가라앉아 진실을 은폐하여 진실되게 살아가라 이르는 것처럼 물은 넘쳐 흘러 길을 바꾸어 버린다. 물과 함께 사람의 삶의 길도 바뀌어 진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피어나는 전통, 전통은 그 뿌리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새로운 생명의 수액을 빨아 들인다. 도조 겐야의 추리를 따라가다 '아' 하던 순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해버리고 나도 진실을 덮어야 할것만 같은 이야기에 그의 다른 이야기를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작가가 절필선언도 특이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하고는 다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그녀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말해주는 듯 해서 챙겨 읽어봐야지 했는데 '단편 소설의 절정'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 '오랜 커리어의 절정' 이라 하니 무언가 그녀가 들려줄 삶이라는 이야기가 무직하게 그 무게감으로 내리 누르는 듯 해서 선뜻 손에 잡질 못했다.장편소설도 즐겨 읽지만 단편도 좋아하는데 장편이라고 하면 글을 읽고 소감을 쓰기가 좀 편하지만 단편은 무언가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끝마쳐야 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처음부터 힘겹게 다가왔다. 새해가 시작되고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읽는데 고전이나 세계문학을 멀리했던 탓인지 어렵게 다가와 앞부분은 힘들게 읽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재미를 느끼고 읽게 되었는데 이작품이 그랬다.

 

삶이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갖자기 표정이 다 숨겨져 있다. 누군가는 그랬다고 한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남이 보기엔 모두가 다 희극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비극아닌 비극이 없고 타인에게는 금방 잘도 지나가는 일들이 내게 닥치면 파고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꼭 내게만 와서 무섭게 파도가 칠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파도가 거세게 치겠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희극으로 보일 뿐인 것이다. 내 삶에도 도사리고 있는 상실 이별 죽음 겹핍... 그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 삶에도 어느 순간 어느 모퉁이에서 숨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게 있다. 다만 타인의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아니 남의 기쁜 그 순간만 오래도록 기억될 뿐이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은 금방 잊는다. 그리고 내 슬픔은 오래도록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그에게 있는 것,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뿐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곂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책에는 10편의 단편과 자전적인 단편 4편이 실려 있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 잊어 버렸을지도 모를 그 순간을 행간에 좀더 귀 기울이며 읽게 만드는,아니 삶에 좀더 귀 기울여 보라는 의미처럼 단순하고 짧은 문장들 속에서 왔던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한참 읽다가 '이거 뭐지..?'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되돌아 와서 어느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듯 다시 읽어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좀더 집중하고 읽지 않으면 그녀의 호흡을 놓쳐 버릴 수도 있다. 그것이 노작가의 힘이 아닐까 한다. 인생의 끝에서 더하고 색칠하고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간결하고 무미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맛'이 들어 있다. 삶이라는 얼굴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상실이나 결핍 이별 죽음등 나 혼자만 가질 수 있는 표정이 아닌 누구나 가질 수 있음을,저자의 삶에도 그런 표정이 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짜내고 정말 바특한 비지만 남아 있으면서도 그 맛을 전해주는 그녀만의 독특함이 자꾸만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삶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나 캐나다의 어느 작은 타운에서나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상실과 결핍 어느 것 하나 다르지 않고 그것이 결과일수 없다는 것이다. 기차의 레일처럼 평행선을 달리며 삶은 그렇게 똑같은 궤도를 달려간다. 자신의 삶에 연민이나 동정을 하기 보다는 합리화를 시키듯 결론을 짓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시간은 흐른다. 삶도 흐른다. 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앞으로 흘러간다. 삶 또한 그 옹이를 채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삶이라는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에 가 닿기를> 다른 누군가를 바랄수도 있지만 지금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을 놓지 않으려 한다. '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 라는 말처럼 정거장을 하나 지나치면 다른 정거장이 다가오듯 부딪혀 보는 것이 삶이다. <아문센>에서 요양원에 교사로 간 그녀와 의사는 결혼을 결정한다. 하지만 결혼식을 하기 전에 그들은 이유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차고만다. 하지만 먼 훗날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공간이지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결혼식날 상실을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온통 빈 상태는 아니다. 다른 무언가로 채워져 어떻게 보면 그가 그 때 그녀를 놓아 준것을 다행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삶은 변했지만 사랑의 본질도 변했을까.

 

타운의 영화관에서 일하던 아가씨 리아가 없어졌다. 그녀의 행방불명,하지만 그 아가씨는 다른 이유가 아닌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생활이 원만했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알콜중독에 부모들에게 아이까지 빼았겼다.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무너질까? 그녀를 알고 지낸 레이,그의 아내는 몸져 누웠다가 서서히 사라져가듯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빈자리가 클 줄 알았지만 죽음이란,아니 누군가의 빈자리란 그순간에는 무척 커보이다가도 지나고 나면 점점 작아진다. 리아가 남편과 자식을 잃고도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 채우듯이 어제는 흘러가고 오늘은 다시 시작되며 내일을 아직 비관할 필요는 없다. 상실의 아픔이란 내가 당하고 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든,누군가는 영원히 그 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나 또한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한동안 그 아픔에서 허덕였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에서 오래도록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상실감을 마주했을 때하고는 다르다. 그만큼 세월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순간에는 불에 데인 화인처럼 상처가 크지만 지나고 나면 흔적만 남는다. 점점 그 흔적도 사라져 버리려 하는가하면 잊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다 담고 살아간다면 가라앉고 말것이다. 결핍에 상실감에 이별의 아픔에.

 

자갈 채석장 옆에서 살았던 그들,엄마와 아버지의 이혼후 카로의 죽음은 오랜시간 트라우마처럼 마음의 병으로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죄의식에 빠져 오랜시간동안 카로의 죽음을 담고 살아 왔지만 누군가는 말한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그 순간에 묶여 오랜시간 동안 자신을 말뚝에 박아 놓듯 죄의식에 살았던 시간,이제는 놓아 버리고 받아 들이면 가벼워진다는 것을,아니 이젠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카로의 죽음은 그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도 아니다. 카로는 어쩜 엄마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을지 모른다.죽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지는 것으로 엄마에게 경고를 하여 아빠에게 돌아가게 하려고 한것이 그녀도 생각지 못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놓아 버려야 한다. 카로의 죽음을.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에겐 카로가 물에 빠지던 그 소리가 늘 경적음처럼 울린다. 살다 보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때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물길을 다시 수정한다고 그 길로 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삶이 그렇다.욕심을 버리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살아야 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지금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이 희극일 수 있는 그 시간이 온다. 그러기 때문에 삶은 이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삶의 단편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누구나 비극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희극만 존재하는 것이 삶은 아니다. 적절하게 비극과 희극이 비빔밥처럼 공존하며 살아갈 존재이유를 던져주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송현방 암살 사건 - 정도전의 죽음에 얽힌 역사 추리소설 쌈지떡 문고 3
박은숙 지음, 김창희 그림 / 스푼북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궁궐 담장의 횃불이 모두 꺼진 밤 복면을 한 무사들이 바람을 가르며 나타나고 그들의 칼끝이 향한 곳은 경복궁 건너편의 송현방, 그곳에 있던 조선 건국 개국공신이 정도전이었다. 개국공신인 정도전 그는 왜 죽임을 당해야 했고 그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 정도전의 죽음을 파헤치며 그 시대 역사를 들려주는 이야기다.요즘 드라마로 책으로 많이 접하게 되는 정도전,그는 누구인가? 그가 궁금해서 이수광의 <정도전1,2>을 구매했는데 어린이 책으로 먼저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이 들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검색하니 나오는 그에 대한 설명이다.이야기에서는 남휘와 양녕이 정도전의 죽음에 대하여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뒷조사를 해나가듯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정도전이 역사의 어디쯤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지 발자취를 따라가듯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읽어나갈 수 있게 그려냈다.

 

태종의 부마인 남휘,그는 역적의 집안이었지만 왕은 그들의 집안을 멸한 것이 아니라 '남은'만 정도전과 함께 역적으로 몰렸다. 왜 자신의 역적의 집안인데 자신들이 건재할 수 있었으며 홀어머니 밑이며 부실한 자신이 부마가 되어야했을까를 파헤쳐 가다가 그는 '남은과 정도전' 이라는 인물들과 부딪히게 된다.그리고 궐에서 만나게 되는 '양녕' 그와 함께 정도전이 왜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지 정도전의 일기를 따라가며 그 시대를 읽어나간다. 저물어가는 고려가 아닌 조선을 건국하기 위하여 친구였던 정몽주와는 이상이 달라 적이 되어야 했던 운명,그리고 조선을 세우고 왕이 아니라 신하로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려 노력했던 그를 왜 역적으로 몰아가야 했을까.

 

권력의 욕심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서로 이상향이 달랐기 때문에 친구였던 정몽주와는 다른 길을 가야 했지만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세계의 실현은 보지도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 재물이 되어야 했던 인물.왜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일까?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지만 어느 한 편에 치우친 이야기라 아니라 자라나는 꿈나무들이 좀더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고려와 조선,정몽주와 정도전,이성계와 이방원 등 연관지어 좀더 재밌게 역사를 파헤쳐 나간다면 재밌게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많을 듯 하다.

 

이방원은 자신의 권력 욕심으로 정도전이라는 거물을 제거하고 서서히 자신의 욕심을 드러낸다.이야기는 그가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제거하는 ' 제1차 왕자의 난'과 2년 뒤 왕자들의 싸움이 벌어진 '제2차 왕자의 난' 까지 해서 그 뒷이야기를 전해준다. 고려가 멸하고 조선 건국 초기의 권력다툼의 핵이 되었던 정도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질수도 꺾일 수도 있다고 봐야하나.조선의 밑그림을 그려 놓았던 정도전이라는 인물, 그를 다시 좀더 깊게 조명해봐야겠다. 정몽주와 정도전,역사는 어느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승자로도 패자로도 보일 수도 있다.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듯이 강한 것이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 권력인 듯 하다. 피 비린내나는 이야기라 조금 씁쓸하지만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밌게 역사를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은 한우리 서평도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보스 이야기 - 세계 거물들은 올해도 그곳을 찾는다
문정인.이재영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다보스포럼' 많이 들어 보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무얼까? 다보스는 스위스의 작은 휴양지로 인구가 1만명 정도라고 한다. 그런 곳에 세계에서 '1%'의 정계 재계 문화계 학계 언론계 등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다보스포럼'의 정식 명칭은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라고 한다. 다보스포럼이라고 더 많이 알려져서 두개가 다른 포럼이라 할수도 있는데 같은 포럼인데 다보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다보스포럼이라 하는 것이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보스포럼은 단순히 유럽의 기업인들이 경영 기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하기 위한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그러나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여러 변화를 시도했기에 오늘날 정계,재계,학계,언론계 등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국제사회 속의 유력 집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보스 안과 밖에서 함께 한 두사람이 함께 '다보스 이야기'를 해준다. 참석자들을 까다로운 방식으로 선정하는 포럼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해 교수 요원으로 초대를 받아 다보스포럼과 함께 한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그의 제자였으며 석사 학업을 다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다보스포럼에서 일하고 싶어 그곳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한국에서 편하게 인터뷰를 하고 정식 직원이 되어 다보스포럼에서 일하게 된 이재영 국회의원이 다보스의 안과 밖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준다.

 

왜 세계1% 저명인사들은 교통 숙박이 불편한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들어 해마다 포럼을 할까? 다보스포럼의 극과 극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나빠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서로 윈-윈하면서 살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잃는 것보다는 포럼에서 얻어지고 만들어내는 것이 더 많을 것 같다. 토론에 익숙한 외국인들은 좀더 적극적인 자세이겠지만 우리의 문화는 토론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소극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이며 세계은행총재등 그리고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등이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뉘어 있고 1부에서는 다보스퍼럼이란 무엇인지,왜 다보스퍼럼인가,국제사회 속의 다보스포럼에 대하여 나오고 2부에서는 다보스포럼과 글러벌 논쟁으로 문정인씨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참관기가 나온다. 다보스퍼럼에 참관하여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다보스포럼에 대하여 좀더 가깝게 느끼고 알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중간중간 이재영씨가 다보스포럼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하게 되었는지 들려주어 다보스퍼럼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들려준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다보스의 세계,그 빛과 그림자라고 하여 둘이 대담을 나눈 것을 정리해서 들려준다.

 

다보스포럼이 여러가지로 알찬 이유로 첫째,다보스포럼은 지난 한 해 동안의 세계경제를 평가하고 새해 경제를 전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다보스포럼이 다루는 주제는 단순히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셋째,대기업 CEO들이 거의 3천만 원에 가까운 등록비를 부담하면서까지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식과 정보, 그리고 아이디어의 수집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1퍼센트에 속하는 재계,언론계,학계의 주요 인사들만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 등 전 분야에 걸쳐 글로벌 어젠다를 설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보스포럼을 비난하는 이들도 많지만 안밖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네임파워와 네트워크파워가 눈길을 끈다. 세계저명인사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그야말로 네임파워는 대단할 듯 하고 하루하루 다르게 발달하는 IT사회에서 네트워크파워란 대단할 듯 하고 세계 1%가 모여서 포럼을 나누니 '지식을 모으는 일'은 말해무얼할까.'다보스포럼은 '지식을 모은다' 고 표현하지요' 라는 말이 와 닿는다.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세계1%의 인물들이 모여 네트워크의 힘으로 뭉친다면 무언가 얻어지는 시너지 효과는 있을 것이다. 다보스포럼을 어렵게 다가가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야기로부터 쉽게 풀어나가 읽으며 이해할 수 있고 다보스포럼이 이젠 멀지 않게 느껴지기 않고 뉴스에서 만나도 좀더 관심을 갖고 듣게 되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