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 왜 미치오 슈스케가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전설의 걸작"이라고 말할 정도였는지 읽어보니 알 것 같았다. 더불어 그도 꽤나 이 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몇 떠올랐다.  

 한마디만 내뱉어도 스포일러가 될 이야기다. 이 책만큼은 아무런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읽어보라고, 그리고 허를 찔리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작품 해제에 물에 비친 후지산의 그림자에 속아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라는 표현을 미치오 슈스케가 했는데, 정말 그런 꼴이 되어버린다. 누군들 후지산의 그림자에 빠지지 않고 벼텨낼 수 있을까.  

 줄거리는 재벌가의 방탕한 외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스트립 댄서 미미 로이가 시아버지의 살해로 위증을 하고 사형을 막기 위해 진범을 밝혀내 변호 할 증인을 법정에 세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건 담당 형사를 찾아가 새로은 증언을 하는 것과 법정에서 변호 측 증인을 내세워 진범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순간 모두들 깜짝 놀라게 된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자신이 놀라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적고 싶지만, 정말 스포일러 될까봐 두렵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고전이긴 하지만 긴다이치 시리즈(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보다는 조금 더 뒤쪽이라는 느낌이 든다. 너무 고전스럽지 않지만, 역시 고전스럽고 일본 감성이 묻어난다. 법정 소설이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는데, 이 책 읽고 나니 다른 법정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이 글 읽으시는 분 중 재밌게 보신 법정 소설을 있으시다면 살짝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놀라운 결말도 인상깊지만, 그 과정 자체도 무척이나 재밌었다. 흡인력이며 가독성이 굉장했다. 올 해 최고 미스터리 소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변호 측 증인』에서는 유명한 외국 미스터리-추리 소설들이나 고전소설이 직접 언급된다. 제목만 언급되는 경우도 있고 대프니 듀 프리에의『레베카』처럼 내용까지 일부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 부분은 주인공 미미 로이가 같이 일하던 스트립 댄서인 에다에게 결혼 후의 생활을 편지로 적어서 보낸 부분 중 일부다. 자신의 결혼 생활을 그녀는 『레베카』를 끌어와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에다, 《레베카》본 적 있어? 여주인공이 처음 남편 맥시밀리언 드 윈터의 저택에 가는 장면을 에다가 안다면 이야기가 간단할 텐데. 아, 맞다. 에다는 책을 읽으면 5분 만에 잠이 온댔지? 

 드 윈터 부인은 지금의 내 처지와 아주 비슷해. 그 소설은 우리 부부와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아.  

 그렇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많거든. 그이는 드 윈터씨처럼 우울증에 걸린 중년 재혼남이 아니려니와, 집 뒤에 시체를 실은 요트가 가라앉아 있는 아름다운 후미가 있는 것도 아니야. 

 p37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외에도 유명한 크리스티의 작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언급된다. 《검은 천사》도 언급되고 있는데, 알라딘 쪽엔 검색해도 나오질 않는다. 이쪽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책인지 혹시 아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살인 이야기를, 특히 가공의 살인 이야기를 듣고 실신할 정도로 품위 있고 고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레베카》뿐 아니라 《검은 천사》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읽었다. 잘 쓴 살인 이야기나 범죄 이야기에는 묘하게 사람을 도취시키는, 가슴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다. 절대로 덤벼들지 못할 우리 속의 맹수를 구경할 때처럼. 

p136

 
   

 

 

 

 

 

 

 

 

  그리고 언급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로 이 작품은 유일하게 미스터리-추리 소설이 아니다. 이 제목을 보고 놀랐던 건, 기 드 모파상의 『벨아미』읽은 후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읽으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언급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운명이랄까, 그런 걸 느꼈다. 사실 요즘 다른 책 읽느라 바빠서 『감정 교육』은 미뤄두고 있었는데, 얼른 읽으라는 신호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감정 교육이라는 책을 나는 플로베르 거 밖에 몰라서 이 책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책에 아래와 같은 폐원이 등장하는지는 읽어보면서 확인해야겠다.)

   
 

 오솔길에서 벗어나 뒷마당의 시원한 관목 숲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저택 안 어디보다도 고요하고, 자연에 가깝다. 자라는 대로 내맡긴 가시나무와 쐐기풀이 흡사 《감정 교육》에 나오는 폐원을 생각나게 한다. 메귀리가 시들어 바람에 솨솨 울기만 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는데. 

p64

 
   

   

 <변호 측 증인>도 재밌게 읽었지만, 이렇게 책에 언급 된 다른 책들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레베카』나 『감정 교육』은 출간 당시 눈여겨봐놨던 소설이라 정말 반가웠다. 크리스티여사님의 소설은 거의 읽지 않지만, 역시 좋아해서 오랜만에 저걸로 하나씩 읽어나가볼까라는 생각도 들 정도다. 책 한 권 사서 읽었는데, 얻어가는 책은 훨씬 더 많은 것 같은 이 뿌듯한 기분! :) <변호 측 증인> 읽으신 분들도, 읽으실 분들도, 관심 있으신 분들도 한 번 찾아보셔서 읽어보시길 권한다. 분명 좋은 책들이니까! (내가 관심을 가져서 그렇다기보단, 워낙 다들 유명한 분들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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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0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측 증인이라... 표지도 마음에 들고 한마디만 말해도 스포일러가 된다니요.. 정말 흥미로운데요?
장바구니로 직행해야겠습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아직 안읽어봤군요 ㅠ

2011-11-09 20:47   좋아요 0 | URL
표지 예쁘죠? 실제로 보면 더 예쁘답니다. 아쉬웠던건 끈 색깔이 좀; 색 자체는 예쁜데, 책이랑 좀 안 맞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어울리기도 한데, 차라리 연분홍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자꾸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
정말 한마디만 더 해도 스포될까봐 정말 조심했습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_*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저도 아직.. 이번에 읽어볼까 생각중인데, 지금 레베카 주문해둬서 그것부터 읽으려고용 ㅎㅎ

ICE-9 2011-11-2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검은 천사'는 코넬 울리치의 37년 작품인데 그 소설도 정부 살해 혐의로 사형선고를 당한 남편을 위해 아내가 진범을 찾아내는 스토리 입니다. 아직 국내에 번역은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코넬 울리치는 세계3대 미스터리 소설로 흔히 손꼽히곤 하는 '환상의 여인'을 썼던 윌리엄 아이리쉬의 또 다른 필명이기도 하죠.

2011-11-23 18:04   좋아요 0 | URL
우와와 *_* 감사합니다. 역시 헤르메스님 최고 ㅋㅋ
<<검은 천사>>는 정말 <<변호 측 증인>>이랑 내용이 흡사하네요. 음, 하지만 이런 반전이 있을련지는 의문이고, 또 어떻게 전개될지 정말 궁금한걸요! 번역본이 있다면 지금 읽어보면 비교해가면서 더 재밌게 볼 수 있을터인데.
<<환상의 여인>>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그야 엄청 유명해서), 역시 읽어보지 않았네요. 같은 작가라니. <검은천사> 대신에 이걸 읽어볼까봐요. :) 그런데 <<환사의 여인>>은 어느 출판사가 괜찮나요? 번역이 좀 잘된 곳이 좋은데. ()
 

 

 

 

 

 

 

 

"그럼 관두면 되겠네. 그런 똥 같은 회사. 헤어지면 되잖아, 그런 똥 같은 마누라.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 거야? 귀찮아서?"

 "그게..."

 "그게 뭐?"

 "그러니까 세상이란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아니, 어렵지. 여러 가지가 얽혀 있으니까. 정론이라면 무조건 통용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나 별로 정론을 얘기한 거 아냐. 당신이 더 높은 사람이고 배운 사람이니까 당신이 하는 말이 정론이겠지."

 "내..."

 내가 하려는 말은...

 "너, 너 같은 사람이 내 고생을 알아? 싫어도 그만둘 수 없어. 괴로워도 헤어질 수 없다고. 괴롭고 또 괴로워서 살 수가 없지만, 이제 한계지만, 그래도 멈추지 못한다고. 빌어먹을!"

 "어째서?"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은 모른다고 했잖아!"

 "그럼 죽.지.그.래."

 겐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죽으라고?"

 "그래. 이봐, 그렇게 모든 것이 슬프고 힘들어서 미치겠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면 말이야, 정말로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살아갈 의미 따위도 없는 거 아냐?"

 "그건...."

 겐지가 다시금 말했다

 "그럼 죽으면 되지. 당신, 죽고 싶지는 않은 거야?

 ""죽고 싶지는..."

 .... 않다. 아마도.

 "어째서 죽고 싶지 않은 거야? 살아봐야 힘들기만 하고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죽지?"

 "그, 그렇게 간단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 말이지, 야마자키 씨 당신. 당신 변명도 뭐, 모르지는 안헥ㅆ지만, 그렇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세상에 어떻게도 안 되는 일이란 건 없어. 회사를 관두지 못하는 건 당신이 관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이혼하지 않는 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분명히 그렇다니까."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아?"

 "등신이라도 알지. 당신, 어쨌거나 부장이잖아. 인정받고 있잖아."

 "이, 인정 같은 건..."

 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거지? 더 인정받고 싶으니까, 더 높이 평가받고 싶으니까 괴로운 거 아냐? 부인한테도 더 사랑받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냉대받는 게 슬픈 거 아냐? 그렇지 않아?"

 "그건..."

 "예를 들어 오늘 집에 들어갔는데, '어서 와요. 피곤했죠?' 그런 말 들으며 어쩌겠어? '지금까지 미안했어요.' 사과하면 금세 용서할 거지, 당신? 뭐, 그래도 지금까지 섭섭했던 거에 대해서는 투덜거릴지도 모르지만, 요는 당신이 우위에 서고 싶은 것뿐이잖아. 회사도 그래. 내일 출근했더니 승진이 되어 있다면 기쁘겠지? 급속히 기분이 좋아질 거 아냐? 떠받들어 주면 모든게 원만해지겠지. 그렇게 떠받들어 주길 바라니까 그만두지 못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거야. 그것 말고 없잖아."

 "나는 힘들...."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밥을 먹으면 맛있고 계집을 품으면 기분 좋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 아냐? 그런 게 전혀 없다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어떻겠어?"

 "그런 향락적인 것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지."

 "없을 것도 없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힘들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거야. 당신이 힘들어하는 건 모두 그런 향락적인 점에 있잖아?"

 "뭐?"

 "당신이 말하는 마이너스란 그저 플러스가 아니라는 것 아냐? 그건 마이너스가 아니지. 인생이든 뭐든 보통은 제로라고. 플러스도 없고 마이너스도 없는 것이 보통이야. 있어봐야 결국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니까. 좋은 일이 없으니 불행하다는 것, 그거 웃기지 않아? 나쁜 일도 없잖아? 인정받지 못해도 칭찬받지 못해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제대로 하고 있으면, 그걸로 상관없잖아? 남의 말 신경 쓸거 없다고. 부인도 그래. 어떤 취급을 당하든 일단 먹여 살리고, 그것보다 좀 더 많이 벌어서 자식 학교 보내고, 뭐가 잘못됐어? 차갑게 대한다거나 해주지 않아서 토라진 거잖아."

 겐지는 말했다.

 "아사미는 당신 욕구의 배출구였을 뿐이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속이는 거 아니지. 당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그 욕구불만을 아사미의 가랑이에 쏟아부었을 뿐이잖아. 폼 잡지 말라고. 진심이고 어쩌고 그런 소리 그렇게 쉽게 할 거면 뒤따라 자살이라도 하지? 못 죽잖아? 솔직히, 죽은 사람은 말도 할 수 없으니까 바람이 들통 날 일도 없어서 잘됐다고 생각했지? 안 그래?"

 

p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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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1-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세상이란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아니, 어렵지. 여러 가지가 얽혀 있으니까. 정론이라면 무조건 통용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이상과 다른 현실~ 현실속에서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해결되지 않는 희안한 모순들~~ 정말 사무치게 느낍니다-_-; 반면교사로 삼고 저부터 조심해야겠습니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 '침 뱉은 우물 다시 찾는다'

2011-11-07 20:34   좋아요 0 | URL
정론이 다 통하지 않는 세상.
처음부터 정론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정론도 사실 다수에 의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다수가 다 옳은 것은 아니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죠. 장님들 세상에서는 애꾸눈이 왕이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다들 멍청한 인간들이라오. 온 마음이 벽 두개 사이, 돈과정략 사이에 갇혀버린 인간들이죠." 

p153

 
 벨아미는 프랑스 어로 '잘생긴 친구, 미남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본 책 <벨아미>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 만큼 미남으로 나옵니다. 잘생기고 멋지고. 특히 콧수염이 아주 멋져서 여성분들이 넘어간다고.. :)

 이건 벨아미와 노시인의 대화 중에 노시인이 말한 부분입니다. 

 노시인은 상류사회로의 야망이 가득한 벨아미에게 위와 같이 새로운 하원의 인물에 대해, 정권에 대해, 무비판적인 시민들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일만은 아니겠죠. 현대사회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벨아미는 자신이 지향하는 상류층 사회의 부패를 잘 알고 있으면서, 속으로 비난하면서도 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여성들을 농락하고 이용하고 가차없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벨아미의 모습을 통해 더 여실히 드러나는 사회상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노시인은 젊고 야망 가득하고 상류층의 여자들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미남계와 입솜씨를 갖춘 영악한 남자 벨아미에게(수식어 한번 길다!) '죽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사실 뭐가 중요하겠소? 재주가 좀 많든 적든 어차피 끝나긴 마찬가지인데."

 " - 인생이란 비탈길과 같다오. 올라가는 동안은 정상이 보이니까 행복하지. 하지만 다 오르고 나면 갑자기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종말이, 죽음이라는 종말이 보이기 시작한다오. 또 올라갈 때는 천천히 가지만 내려갈 때는 빠르답니다. 당신 나이 때야 즐겁지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해도 희망도 많고 말이오. 그런데 내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오. 그저... 죽음이 있을 뿐."
 

p154

 

 당연하겠지만 벨아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젊고 앞으로 올라갈 길만이 있을 뿐인데 내리막길이니, 끝이니 그런 소릴 다 죽어가는 노시인한테 들어봤자 아무런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하죠. 결국 노시인은 노시인이고 벨아미는 벨아미 자기 자신일 뿐인, 각기 다른 개체일 뿐이니까요. 노시인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언젠가 벨아미의 그 젊음도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을 때가 오면 그도 노시인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책에선 벨아미의 성공기 절정에서 끝을 맞이하며 끝이 나버리죠. 저는 이 결말을 통해서 기득권층은 여전히 기득권층으로 남는다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 이후에 벨아미가 어떻게 되었든, 이렇게 끝이 나버린 이상 사회구조상 상류계층은 언제나 지배층으로 남는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나 합니다.

 

 개인적으로 벨아미가 상류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일대기는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가는 것이니까요. 그것도 자신이 타고난 외모와 재능으로 말이죠. 물론 여기서 재능이란 여성들을 유혹하는 말솜씨부터 여성들을 이용해 자신이 상류사회로 올라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기발함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그렇게 상류사회로 한발짝씩 다가가는 벨아미는 처음엔 냉소적입니다. 상류사회 사람들을 비난하며 사회구조에도 불만을 품죠. 하지만 어느 이상의 정점에 오르자 물욕과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이미 벨아미도 자신이 욕하던 그 상류사회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벨아미의 모습은 꽤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도 평등사회에 민주사회를 외치지만 분명하게 명시되지 않은 계층으로 분화되어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사회나 지금 사회나 모두들 상류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버둥은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특히 신데렐라표 드라마들의 유행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로망이라고도 하는데, 어디까지가 로망이고 어디까지가 상류사회를 향한 욕망인지에 대해서는 전 잘 구분이 안 갑니다. 겉으론 로망이라 하지만 내적으로는 욕망을 품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데 재밌는 점은, 저는 이 노시인의 말에 굉장히 공감했다는 점입니다. 벨아미가 이해 못하는 것도 이해하면서도 노시인의 말도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부에 노화가 오고 소화기능도 떨어지고 뇌세포들도 죽어버리고.. 모든 것이 꽃이 시들해져가듯 그렇게 스러져갑니다. 꿈을 꾸기엔 기력이 부족하고, 희망을 품기엔 죽음이 너무 가깝습니다.

 

 하지만 전 죽음이 곧 외양적인, 세포의 노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꿈을 꾸고 희망을 품으면 그게 곧 젊음이고 삶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꿈을 꾸고 희망을 품어도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는 때가. 노시인은 그런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어볼 순 없다, 즉 경험을 해 볼 수 없는 유일한 것 중의 하나라 시험해볼 수도 없고. 유체이탈에 대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 믿는 것도 아니니, 정말 죽으면 끝일까요.

 

 


" (-) 더 이상 웃지 못하는 날이 올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그 뒤에 죽음이 보이는 날이 말이오. 그 날이 일찍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오.

 (-) 그래.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될 거요.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삶의 모든 모습이 바뀔 거요. 그래 십오 년 전부터 몸속에 세균이라도 들어 앉은 것처럼 죽음이 나를 먹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고. 매달, 매시간, 마치 집이 무너져 내리듯 그렇게 날 무너뜨리고 있지.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하고 말았다오. 이전의 내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지. 서른 살 시절의 그 눈부시고 싱그럽고 기운 넘치던 나는 이제 아무데도 없소. 죽음이란 놈이 내 검은 머리를 허옇게 물들였지. 그런데 그놈은 어찌나 사악한지 아주 교묘하게 천천히 찾아온다오. 이제 나는 팽팽하던 피부, 근육, 치아, 이전의 육체 전부를 빼앗겼고,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에 빠진 영혼뿐이오. 그나마도 곧 빼앗기고 말테지만.

 그렇소. 그놈이, 죽음이라는 그 비열한 놈이 날 부스러뜨렸소. 천천히, 무참하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매 순간 내 존재를 파괴하지. 무슨 일을 하든 난 늘 나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소.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죽음에 다가가고,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숨 쉴 때 마다 그 끔찍한 죽음이 걸음을 재촉하지. 숨을 쉬고, 자고, 마시고, 먹고, 일하고, 꿈꾸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죽는 일이오. 결국 산다는 것은 죽는 일이한 말이오!

 오, 당신도 알게 될 거요. 일이십 분만 생각해 보면 죽음이 보일테니까!

 당신은 무얼 기대하고 있소? 사랑? 몇 번 더 사랑을 나누고 나면 머지않아 그것도 끝이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돈? 무엇 때문에? 여자를 사려고? 그게 무슨 행복이란 말이오! 실컷 먹고 피둥피둥 살이 쪄서 밤이면 관절염에 신음하려고?

 또 뭐지? 명예? 그것도 사랑이라는 형태로 거둬들일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니오? 그 다음엔? 마지막엔 언제나 죽음이 있소. 난 지금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걸 볼 수 있소. 팔을 뻗어서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지. (-) 내가 하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 달빛, 일출,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아름다운 강, 상쾌한 여름 저녁의 공기,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을 죽음이 망치고 있단 말이오."

 

p154-156


 

 

 벨아미는 죽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젊음과 투기, 야망의 상징이죠. 그런데 이런 벨아미에게 노시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뒤이어서 벨아미가 상류사회의 발을 떼도록 도와준 친구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아마 그러한 죽음을 예견한 복선은 아닐까.

 

 프랑스 사회의 뒷면을 자세하게 다룰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과 죽음 그리고 젊음과 노쇠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벨아미. 생각해볼 것도 많게 만들어주지만 우선 재밌다는 점에서 별 다섯개입니다! 기 드 모파상이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감정교육>도 같이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감정교육>을 숨은 명작이라고 어느 책에서 봤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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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고 먹는다고 과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즐겁기만 할까요? 대책없이 놀고 먹는 것만큼 고역도 없어요.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몸과 마음은 피폐해지는 법입니다. 노숙자들이 노숙 생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이란 크든 작든 생산적인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는 동물입니다. 사람도 기계와 같아서 끊임없이 기름 치고 움직여 줘야 원활히 작동되는 존재거든요."

 

p43



 



"아까 범우 씨께서 신이 존재한다면 억울한 일도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죠? 이는 신이 우리와 비슷한 인격과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범우씨도 신이라는 존재가 범우 씨 아니 우리와 비슷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흔히 신을 말하지만 그러한 신은 인간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p74




 

 그러고 보면 사람은 항상 신도 인격화 시켜서 보는 경향이 많다.

 아는 분과 이야기하던 중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나 역시 신을 인격화하여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꽤나 놀란 적이 있다. 하지만 인격화 하지 않고 절대적인 선의 존재로 보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말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사람다운 마음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요? 도덕 교화서의 내용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아무런 불편이 없는 세상 말입니다. "

 

 p227

 


 

 정론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 우수한 제도라도 시행해보면 단점과 폐해가 드러나듯이 말이다.

 

 

 

 

 


 

"체념은 살피다, 진리, 이치의 뜻을 담은 체(諦)와 마음을 뜻하는 념(念)으로 구성된 단어입니다. 글자 그대로 본래의 의미는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 입니다. 즉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 마음을 비어 집착을 없애고 평안을 찾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지금은 그런 의미 대신에 주로 희망을 버리고 단념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p252

 


 

 

 언제부터 체념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본래 의미를 망각하고 부정적으로 쓰이게 된 것일까.

 나는 진정한 체념을 해 본적이 있던가. 부정적인 의미로써의 체념은 수 없이 하는지도 모르겠다.

 

 

 

 

 

 


 

"범우씨, 자신이 꿈꾼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는데 실패를 하게 된 경우와 노력을 할 수 있었음에도 다 쏟아 붓지 못해 실패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후회가 남겠습니까?"

 

 p253

 


 

 당연한 소리지만, 전자 쪽이 더 후회가 남을 것이다.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건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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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29114459

 

서평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겠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도 아닌 서평 따위를 생각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파국처럼 도래한 마감이 임박한 새벽이면, 어떤 종류의 불안과 함께 나도 몰래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아니, 차라리 바라본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그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가련한 서평자의 모습을, 마치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거실에서 좀먹은 가운을 걸친 채 영양실조와 숙취, 좌절된 야망, 무엇보다 임박한 마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 신랄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약속으로 나를 격려한다. 오웰은 이렇게 썼다.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든 항상 정시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또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다."


▲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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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서평에 관한 모종진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관한 진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가 된 좌절한 인간들에 대한 진실이다. 그들은 오웰의 글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신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라는 구절에서 위안을 얻는 자들이다. 그들 서평의 최대 미덕은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그러니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이 글에서 미덕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실제로는 서로를 의식하고 종종 시기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감과, 마감과 마감 사이를 채우는 숙취에 시달리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책 말고 다른 것을 할 시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나만의 이야기일 뿐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오웰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The Four Just Men>(1905). 영국 작가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의 탐정 소설)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결국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돈이 연관된 모든 것이 그렇듯, 직업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쓰고 출판사는 책을 내며 서점은 책을 판다.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서평자의 몫이다. 요즘에는 통 볼 책이 없다고 불평하며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독자의 사치를 직업적인 서평자는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마음에 차지 않는 책들을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판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의 직업은 그가 평하는 책을 팔아 수익을 올리는 출판사와 그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서평란을 운영하는 매체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 사이의 부스러기와도 같은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

서평은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작가의 안녕과 출판사의 이익과 서평자의 가계를 위한 글인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매문(賣文)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직업인들이 그런 것처럼 그들 또한 글이라는 형태의 노동을 파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는 일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이라는 글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이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따라서 서평자들에 관한 진정 놀랄 만한 사실은 결코 충분한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평을 써서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들 대부분은 언젠가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당장의 생계를 위해 서평 쓰기를 택했지만 어느덧 생계가 된 서평에 목을 졸리는 생활인이다. 비싼 책으로 서재를 채우고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 고급속물조차 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애초에 다른 무엇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책에 '대한' 글을 써야만 하는 이중의 거리감. 그리하여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던 많은 이들은 다른 직업을 찾거나 진정한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단호하게 서평 쓰기를 그만둔다. 그만둘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다른 생계 수단을 찾으려 노력하겠지. 오직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는 소수만이 고상한 포부를 버린 채 타성에 젖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같은 문장들과 씨름하며 담배 연기 가득한 비좁은 방에서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영리하게 전법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일찍이 미국의 비평가들이 "아주 간략하고도 단정적으로 열광하는 문장, 가령 '선풍적인'(<뉴욕 타임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멋진 책'(<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진짜 즐거움이었다'(<버라이어티>) 같은 문장"을 자신의 서평에 집어넣으면 광고에 언급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움베르토 에코의 짧은 에세이 '혹평이 줄어든 이유'), 달콤한 주례사 비평이 신랑 신부는 물론 출판사와 저자, 독자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가짜 희망을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더욱 진취적인 오늘날의 이들은 한 발 나아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출판사의 격려 속에 서평과 자기 계발서를 결합한 일종의 독서 가이드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판해야 할까? 나는 그저 그들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사실 이 자리는 "좋은 서평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자리다. 그런데 나는 직업적인 서평자의 고뇌며 비루함을 토로하고 있다. 좋은 서평을 찾기 힘든 현실에 대한, 업계 종사자로서의 변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쓰는 모든 서평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가끔씩은 읽는 순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책을 담게 만드는 글이 있고, 드물지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글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 자체의 힘이고 서평자 개인의 능력이며 둘의 우연적인 만남에 불과하다.

자연 혹은 시장 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그들의 서평에서는 이제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단순한 정보로서의 서평은 가치를 잃었다. 참고했음에 분명한 보도 자료 원문을 인터넷 서점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관심사를 자랑하는 '파워북로거'들의 등장도 한 몫 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 말고도 책에 대해 쓰는 사람이, 그것도 무척이나 잘 쓰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광고와 다름없는 텅 빈 글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출판사와 저자와 저자의 동료와 저자의 적과 서점 관계자들을 제외한다면.

영리한 서평자라면 호평을 하는 동시에 몇 마디 아쉬운 말을 넣어 출판사와 독자 사이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도 있다. 실은 수박에 소금을 뿌리듯, 몇 마디 아쉬운 말로 호평을 더욱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려한 글 솜씨는 언제나 유리하다. 책의 내용과 관계없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나열함으로써, 자신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책을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모두가 원하지 않는(너무 티 나게 상업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독자의 신뢰를 얻기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들이 열광적으로 제시하는 '2011년 당신의 마음을 흔들 책'들의 리스트는 오늘도 길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찾아 읽을 생각을 하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출판 관계자들이나 (책장을 만드는) 가구업 종사자들은 부자가 되었겠지. 나도 몇 번 쯤은 공짜 술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파워북로거'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다. 사실 그 둘의 경계는 희미하다.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북로거'에게 물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순간이 찾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로그 마케팅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출판사들에서 먼저 책을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출판사에 책을 요구하기도 하며 종종 책 이상의 대가를 받기도 한다는 기사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사실 그 액수가 무척이나 궁금하며 여차하면 '파워북로거' 양성 학원에 등록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직업적인 서평자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낫다. 건조한 저널리즘의 형식을 벗어난 블로그 글쓰기는 그들 이웃에게 훨씬 친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부수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한은 계속해서 출판사와 저자를 찬양하며 직업적인 서평자의 안 그래도 곤란한 생계를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경쟁 도서에 혹평을 쓰는 식의 역-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나의 숨겨진 재능은 그런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생각 있는 출판사에서는 연락주기 바란다. 내 메일은 blur1…….)

어쩌면 우리는 서평이라는 글의 형식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의무적으로 써야 했던 독후감과 현란한 이론들이 난무하는 교수님들의 평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인, 고작해야 출판사의 마케팅 도구로 한 번 제대로 읽히지도 못한 채 버려지는 전단지 신세가 된 이 가련한 글의 형식을. 나는 일단 묻고 싶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 서평을 읽는가(심지어 이런 글까지)? 도대체 서평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앞서 말했듯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은 무엇인지, 읽을 만한 책은 없는지 찾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터넷 서점의 신간 소식을 RSS로 받아볼 것을 추천한다. 훨씬 빠르고 다양하며 가끔씩은 매력적인 이벤트 소식을 접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마음에 드는 신간을 발견했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신이 찾을 수 있는 서평은 대부분 찬양일색이거나 적어도 호의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신의 마음은 이미 구매 쪽으로 기울어 있게 마련이다. 당신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설령 한 두 편의 혹평을 본다 해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할 테니까. 나는 당신의 선택을 지지한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일 뿐이다. 읽지 않는 것보다는 언제나 읽는 것이 더 낫다.

마지막은 책을 읽는 대신 서평을 읽는 것으로 문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 부류다. 저자의 이름과 제목, 대략의 줄거리를 섭취함으로써 소개팅 자리나 SNS에 몇 줄 인용함으로써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들. 책을 그렇게나 교양 있는 매체로 평가해주다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터넷 시대의 서평의 진정한 효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와 도서 취향이 닮은 이웃 블로거의 지나간 책에 대한 서평,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책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매체들이 속보 경쟁을 하며 알맹이 없는 서평 기사를 내보내고 아직 몇 권 팔리지 않은 신간 도서에 '파워북로거'의 매끈한 서평이 수십 개씩 달릴 때, 그들의 호들갑 떨지 않는 담담한 서평은 공허한 단어들의 잔치에 지친 우리들에게 다시금 읽고 쓰는 행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오그라들기까지 하는 문장들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원고는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고, 나는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겼다.)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누군가는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사랑하고(이를테면 신형철), 누군가는 싫어한다(대개는 조영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떤 환상과 오해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의 대화를 듣고 싶다(단순히 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아니다.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인터넷 시대의 소통의 대표적인 사례일 '빠가 까를 부르고' 다시 '까가 빠를 부르는' 소모적인 논쟁의 무한 반복을 바라는 게 아니다. 나름의 이유와 논리와 충만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이 진검 승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온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역사적인 발명 이후 그 어느 시대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자유로워진 오늘이다. 더 이상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혀 비슷비슷한 책들을 비슷비슷한 시각으로만 읽어 내려갈 필요는 없단 말이다. 뭐, 그게 더 좋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결국 내가 좋은 서평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직함이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정직할 것.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것(누구도 서평자에게 공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출판사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특히 내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은 그의 혹평이다. 원래 이 글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따라 이렇게 시작하려고 했다.

서평에 관한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혹평이다.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서평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작가의 남성/여성 편력이 어떤가, 띠지의 디자인이 표지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가 반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조지 오웰이 주장했듯이, 어떤 서평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책을 존중하고, 출판사가 손해를 입기를 바라지 않으며, 저자의 안녕을 바란다. 그래서 대부분, 굳이 위에서 열거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쁜 말을 하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책의 뒤에 화려한 추천사를 써준 명사를 의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길을 택한다.

혹자는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만 말하기에도 시간이 짧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는 일은 조금 비겁하다. 무엇보다 달콤한 케이크처럼 쉽게 질린다. 반대로 누군가 혹평만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골라보는 그의 식견을 의심할 것이다. (단, 테리 이글턴은 예외다. 그의 서평 모음인 <반대자의 초상>은 혹평의 완벽한 예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의 요청에 따라 그간 내가 이곳에 썼던 서평들을 예로 들자면 차례대로 <좀비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베아트리스와 버질> 그리고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와 <옷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해 굳이 찾아보지는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스승의 책에 부친 카뮈의 글이,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같은 문장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물을 차례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약 그 대답을 알았다면 이런 글로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도 마감을 넘긴 것에 감사할 뿐이다. 미안하다.

 



/금정연 활자유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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