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29114459

 

서평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겠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도 아닌 서평 따위를 생각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파국처럼 도래한 마감이 임박한 새벽이면, 어떤 종류의 불안과 함께 나도 몰래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아니, 차라리 바라본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그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가련한 서평자의 모습을, 마치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거실에서 좀먹은 가운을 걸친 채 영양실조와 숙취, 좌절된 야망, 무엇보다 임박한 마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 신랄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약속으로 나를 격려한다. 오웰은 이렇게 썼다.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든 항상 정시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또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다."


▲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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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서평에 관한 모종진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관한 진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가 된 좌절한 인간들에 대한 진실이다. 그들은 오웰의 글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신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라는 구절에서 위안을 얻는 자들이다. 그들 서평의 최대 미덕은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그러니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이 글에서 미덕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실제로는 서로를 의식하고 종종 시기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감과, 마감과 마감 사이를 채우는 숙취에 시달리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책 말고 다른 것을 할 시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나만의 이야기일 뿐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오웰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The Four Just Men>(1905). 영국 작가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의 탐정 소설)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결국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돈이 연관된 모든 것이 그렇듯, 직업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쓰고 출판사는 책을 내며 서점은 책을 판다.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서평자의 몫이다. 요즘에는 통 볼 책이 없다고 불평하며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독자의 사치를 직업적인 서평자는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마음에 차지 않는 책들을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판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의 직업은 그가 평하는 책을 팔아 수익을 올리는 출판사와 그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서평란을 운영하는 매체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 사이의 부스러기와도 같은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

서평은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작가의 안녕과 출판사의 이익과 서평자의 가계를 위한 글인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매문(賣文)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직업인들이 그런 것처럼 그들 또한 글이라는 형태의 노동을 파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는 일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이라는 글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이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따라서 서평자들에 관한 진정 놀랄 만한 사실은 결코 충분한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평을 써서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들 대부분은 언젠가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당장의 생계를 위해 서평 쓰기를 택했지만 어느덧 생계가 된 서평에 목을 졸리는 생활인이다. 비싼 책으로 서재를 채우고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 고급속물조차 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애초에 다른 무엇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책에 '대한' 글을 써야만 하는 이중의 거리감. 그리하여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던 많은 이들은 다른 직업을 찾거나 진정한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단호하게 서평 쓰기를 그만둔다. 그만둘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다른 생계 수단을 찾으려 노력하겠지. 오직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는 소수만이 고상한 포부를 버린 채 타성에 젖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같은 문장들과 씨름하며 담배 연기 가득한 비좁은 방에서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영리하게 전법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일찍이 미국의 비평가들이 "아주 간략하고도 단정적으로 열광하는 문장, 가령 '선풍적인'(<뉴욕 타임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멋진 책'(<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진짜 즐거움이었다'(<버라이어티>) 같은 문장"을 자신의 서평에 집어넣으면 광고에 언급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움베르토 에코의 짧은 에세이 '혹평이 줄어든 이유'), 달콤한 주례사 비평이 신랑 신부는 물론 출판사와 저자, 독자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가짜 희망을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더욱 진취적인 오늘날의 이들은 한 발 나아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출판사의 격려 속에 서평과 자기 계발서를 결합한 일종의 독서 가이드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판해야 할까? 나는 그저 그들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사실 이 자리는 "좋은 서평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자리다. 그런데 나는 직업적인 서평자의 고뇌며 비루함을 토로하고 있다. 좋은 서평을 찾기 힘든 현실에 대한, 업계 종사자로서의 변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쓰는 모든 서평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가끔씩은 읽는 순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책을 담게 만드는 글이 있고, 드물지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글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 자체의 힘이고 서평자 개인의 능력이며 둘의 우연적인 만남에 불과하다.

자연 혹은 시장 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그들의 서평에서는 이제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단순한 정보로서의 서평은 가치를 잃었다. 참고했음에 분명한 보도 자료 원문을 인터넷 서점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관심사를 자랑하는 '파워북로거'들의 등장도 한 몫 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 말고도 책에 대해 쓰는 사람이, 그것도 무척이나 잘 쓰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광고와 다름없는 텅 빈 글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출판사와 저자와 저자의 동료와 저자의 적과 서점 관계자들을 제외한다면.

영리한 서평자라면 호평을 하는 동시에 몇 마디 아쉬운 말을 넣어 출판사와 독자 사이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도 있다. 실은 수박에 소금을 뿌리듯, 몇 마디 아쉬운 말로 호평을 더욱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려한 글 솜씨는 언제나 유리하다. 책의 내용과 관계없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나열함으로써, 자신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책을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모두가 원하지 않는(너무 티 나게 상업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독자의 신뢰를 얻기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들이 열광적으로 제시하는 '2011년 당신의 마음을 흔들 책'들의 리스트는 오늘도 길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찾아 읽을 생각을 하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출판 관계자들이나 (책장을 만드는) 가구업 종사자들은 부자가 되었겠지. 나도 몇 번 쯤은 공짜 술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파워북로거'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다. 사실 그 둘의 경계는 희미하다.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북로거'에게 물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순간이 찾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로그 마케팅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출판사들에서 먼저 책을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출판사에 책을 요구하기도 하며 종종 책 이상의 대가를 받기도 한다는 기사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사실 그 액수가 무척이나 궁금하며 여차하면 '파워북로거' 양성 학원에 등록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직업적인 서평자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낫다. 건조한 저널리즘의 형식을 벗어난 블로그 글쓰기는 그들 이웃에게 훨씬 친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부수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한은 계속해서 출판사와 저자를 찬양하며 직업적인 서평자의 안 그래도 곤란한 생계를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경쟁 도서에 혹평을 쓰는 식의 역-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나의 숨겨진 재능은 그런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생각 있는 출판사에서는 연락주기 바란다. 내 메일은 blur1…….)

어쩌면 우리는 서평이라는 글의 형식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의무적으로 써야 했던 독후감과 현란한 이론들이 난무하는 교수님들의 평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인, 고작해야 출판사의 마케팅 도구로 한 번 제대로 읽히지도 못한 채 버려지는 전단지 신세가 된 이 가련한 글의 형식을. 나는 일단 묻고 싶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 서평을 읽는가(심지어 이런 글까지)? 도대체 서평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앞서 말했듯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은 무엇인지, 읽을 만한 책은 없는지 찾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터넷 서점의 신간 소식을 RSS로 받아볼 것을 추천한다. 훨씬 빠르고 다양하며 가끔씩은 매력적인 이벤트 소식을 접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마음에 드는 신간을 발견했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신이 찾을 수 있는 서평은 대부분 찬양일색이거나 적어도 호의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신의 마음은 이미 구매 쪽으로 기울어 있게 마련이다. 당신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설령 한 두 편의 혹평을 본다 해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할 테니까. 나는 당신의 선택을 지지한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일 뿐이다. 읽지 않는 것보다는 언제나 읽는 것이 더 낫다.

마지막은 책을 읽는 대신 서평을 읽는 것으로 문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 부류다. 저자의 이름과 제목, 대략의 줄거리를 섭취함으로써 소개팅 자리나 SNS에 몇 줄 인용함으로써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들. 책을 그렇게나 교양 있는 매체로 평가해주다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터넷 시대의 서평의 진정한 효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와 도서 취향이 닮은 이웃 블로거의 지나간 책에 대한 서평,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책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매체들이 속보 경쟁을 하며 알맹이 없는 서평 기사를 내보내고 아직 몇 권 팔리지 않은 신간 도서에 '파워북로거'의 매끈한 서평이 수십 개씩 달릴 때, 그들의 호들갑 떨지 않는 담담한 서평은 공허한 단어들의 잔치에 지친 우리들에게 다시금 읽고 쓰는 행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오그라들기까지 하는 문장들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원고는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고, 나는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겼다.)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누군가는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사랑하고(이를테면 신형철), 누군가는 싫어한다(대개는 조영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떤 환상과 오해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의 대화를 듣고 싶다(단순히 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아니다.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인터넷 시대의 소통의 대표적인 사례일 '빠가 까를 부르고' 다시 '까가 빠를 부르는' 소모적인 논쟁의 무한 반복을 바라는 게 아니다. 나름의 이유와 논리와 충만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이 진검 승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온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역사적인 발명 이후 그 어느 시대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자유로워진 오늘이다. 더 이상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혀 비슷비슷한 책들을 비슷비슷한 시각으로만 읽어 내려갈 필요는 없단 말이다. 뭐, 그게 더 좋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결국 내가 좋은 서평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직함이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정직할 것.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것(누구도 서평자에게 공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출판사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특히 내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은 그의 혹평이다. 원래 이 글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따라 이렇게 시작하려고 했다.

서평에 관한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혹평이다.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서평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작가의 남성/여성 편력이 어떤가, 띠지의 디자인이 표지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가 반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조지 오웰이 주장했듯이, 어떤 서평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책을 존중하고, 출판사가 손해를 입기를 바라지 않으며, 저자의 안녕을 바란다. 그래서 대부분, 굳이 위에서 열거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쁜 말을 하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책의 뒤에 화려한 추천사를 써준 명사를 의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길을 택한다.

혹자는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만 말하기에도 시간이 짧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는 일은 조금 비겁하다. 무엇보다 달콤한 케이크처럼 쉽게 질린다. 반대로 누군가 혹평만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골라보는 그의 식견을 의심할 것이다. (단, 테리 이글턴은 예외다. 그의 서평 모음인 <반대자의 초상>은 혹평의 완벽한 예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의 요청에 따라 그간 내가 이곳에 썼던 서평들을 예로 들자면 차례대로 <좀비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베아트리스와 버질> 그리고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와 <옷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해 굳이 찾아보지는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스승의 책에 부친 카뮈의 글이,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같은 문장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물을 차례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약 그 대답을 알았다면 이런 글로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도 마감을 넘긴 것에 감사할 뿐이다. 미안하다.

 



/금정연 활자유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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