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식 중 다섯째 자식이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맏형이 양자로 떠났고, 맏형 노릇을 해야 했던 둘째형은 농사고 뭐고 다 싫다고 도시로 떠났다. 셋째형마저 도시로 떠나면 꼼짝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셋째형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네가 도시로 가서 대학에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덕분에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쭉 도시에서 살았다. 그랬던 셋째형이 얼마 전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 아흔네 해를 산 부친이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부친에 이어 가장 가까운 형마저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여겨질까. 과묵한 아버지와 변변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정 없는 딸인 나는 그저 멀찍이서 아버지의 심정을 혼자서 상상해보고 추측해볼 뿐이다.


201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손홍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읽는 내내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저자와 나의 아버지는 이십 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데도 두 사람의 삶은 상당히 비슷하다. 일단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라는 것이 그렇고, 식구처럼 데리고 살았던 소를 팔아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렇고,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한국 사회를 바꿔보려 노력했으나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더 많이했다는 것이 비슷하게 보였다. 덕분에 나는 요즘 부쩍 궁금해진 아버지의 마음속을 이 책을 통해 대신 살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향에서 함께 자란 형제자매(외동인 저자에게는 친형제자매만큼 가깝게 지낸 사촌 형제자매가 있다)에 대해서는, 친척 어른들에 대해서는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대학에선, 대학 밖으로 나와선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범하게 취업을 한 아버지와 달리, 저자는 어려서부터 간직했던 소설가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시선 또한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절망이 사무쳐 절망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나뿐인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기꺼이 소를 팔았던 아버지는 자식이 등단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짜고짜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힘들게 일하고 가진 것 다 팔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낸 아들이, 자신이 높은 곳에서 쓰러지고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리고 의식을 잃고 혼수 상태에 놓이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무력하게 떨기만 하는 존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하며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살뜰히 뒷바라지를 한 나의 아버지 역시, 이 나이 먹도로 제 앞길 못하고 꿈을 쫓아 다니는 나를 보며 비슷한 심정을 느낄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저자가 대학 시절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았을 때 겪은 일화다. 자취방 벽 너머에는 주인 노부부가 살았는데, 노부부는 세입자의 집에 얹혀 살러 온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고, 저자 역시 자격지심 때문에 노부부의 눈초리가 쌀쌀맞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가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다가 자기도 모르게 절로 끙 소리를 냈는데 벽 너머에서 똑, 똑, 똑 하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아파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줄 알고 투덜댔으나, 그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그제야 노부부가 자신의 안부를 걱정해 괜찮냐고 묻는 뜻인 줄 알았다. 얼마 후 쾌차한 저자는 벽 너머에서 신음이 들리는 듯해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어서 가봤더니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저자 덕분에 노인은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고, 저자 또한 노부부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 기뻤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벽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용기를 내 벽을 두드리면 누군가가 응답의 뜻으로 벽을 두드려 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내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구를 돕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아버지도 그렇게 벽을 두드리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 나일 것이고, 나는 언제든 아버지가 벽을 두드리면 똑, 똑, 똑 하고 응답하거나, 벽을 두드리지 않더라도 먼저 똑, 똑, 똑 하고 두드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길 바랄 텐데, 정작 나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마음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으로 아버지의 삶을 대신 알았다고 자위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아버지가 있는 기억 속으로 집요하게 침잠해 들어간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도 과연 이렇게 솔직하고 의미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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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3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덕분에 항상 좋은 책 많이 배워 갑니다. 특히, 무민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2019년에도 좋은 책 알려 주시고 새해 복 맣이 받으세요!^^:)

키치 2019-01-01 14:2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저도 무민을 무척 좋아해서, 저로 인해 무민을 알게 되셨다니 넘 기쁘네요 ^^ 2019년에도 좋은 책 많이 만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니데이 2018-12-3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책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내일부터 2019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가정과 하시는 일에 건강과 행복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연말, 그리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키치 2019-01-01 14:2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