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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평점 :
저자는 사소한 부탁이라고 하지만, 살면서 생각해야 할 많은 부분들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있다.
요즘의 에세이들은 재기발랄 유쾌함을 기본으로 하는 것들이 많아서인지, 비교하자면 조금은 엄근진 한 에세이지만, 무게만큼 깊게 남는 이야기들이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 서문
문화를 과시하고 소비하려는 기획은 많지만, 문화의 창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적 이용의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온라인의 실정이다. - 18, 차린 것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정말 와닿은 부분인데,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에 대해 우려와 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정작 문화적 컨텐츠에서의(어쩌면 비주류라고 해야할까) 정보는 턱없이 부족함을 종종 느낀다. 관심이 생긴 저자의 정보를 찾아보려 해도 국내작가라면 약력정도, 외국 작가라면 한국어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지 않을까 싶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 72, 악마의 존재 방식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도 되지 않았다. 다만 김수영의 <봄밤>이 쓰인 이후 이 시가 가장 고양된 마음으로 읽혔던 한순간이 남고, 그 고양됨이 남는다. 이 고양됨을 두고 거짓된 반응이라고 말하지 말라. 거짓된 반응도 참된 반응도 끝내 가라앉는 것은, 그래서 또다시 추켜올려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권여선이 인용하지 않았지만, 김수영의 <봄밤>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요/오오 봄이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자는 것은 그 애태움을 그치자는 뜻이 아니다. 저 애타는 마음을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간직해서 무거운 몸을 조금 떠 있게 하자는 것이다. 무거운 몸에서 그 무거움을 가능한 한 많이 지우자는 것이다. 현실을 조금 덜 현실이게 하자는 것이다. 영경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현실 너머에서 다른 현실을 발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파상처럼 사물에 대한 인식을 전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랭보처럼 현실을 지우는 황금빛과 황금빛을 지우는 현실을 동시에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학적 시도들이 김수영의 <봄밤>을 타고 들어와 그녀에게서 남편의 죽음을 지우고, 남편을 지우고, 그 지우기가 가짜라는 사실을 지웠다. 그녀는 저 자신이 지워져서 현실 너머에 있다. 간절하게 바라보는 현실은 현실 보다 조금 덜 현실이다. - 252, 작은, 더 작은 현실 - 권여선의 <봄밤>을 읽으며
너무 좋아하는 권여선의 <봄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인상 깊어 남겨본다.
2018. j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