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동양화 또는 우리나라 산수화, 한국화가 지닌 아름다움 중에 여백의 미가 있다고 했다.


  지면을 꽉 채우지 않는, 적당히 비워두는. 그 비움으로 인해 채움이 더 잘 드러난다는 그림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통 큰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통이 크다는 말은 비어 있는 공간이 있음을, 즉 여유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고 본다.


  자신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남들을 받아들이기 더 쉽다. 그 여유가 경제, 정치, 교육에서 우위를 점하는 여유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 그들을 통 크다고 이야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꽉 차 있는 글들을 만날 때가 있다. 도무지 내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주장. 그냥 그 주장을 따라가고만 마는 글들. 


하지만 어떤 책들은 내가 끼어들 틈을 준다. 내가 끼어들어서 의미를 덧댈 수 있게도 해준다. 어느 책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적당한 여유는 마음을 열게 해준다.


이번 호에는 이런 여백이 있다. 다이어리를 직접 작성해 보라고, 많은 글들 대신에 여백을 실었다. 그 여백을 우리보고 채우라고. 그렇다.


이번 호는 우리에게도 참여의 기회를 주고 있다. 잡지를 채울 수 있는 권리도 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 두 번째 빅이슈를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여기에 더해 표지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표지고, 작가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서도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우리 모두 마음이 편해지는 한해였으면 좋겠다. 이 빅이슈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듯이, 그렇게... 올해 마음 편해지는 한해가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오'라는 감탄사부터... 무엇에 대한 감탄인가? 이때 감탄이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다. 마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소리. '오'


  '그자'라는 말에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자'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니 '그자'라고 한다. 


  '입을 벌리면'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났다. 앞의 주어인 '그자'와 연결지으면 결코 긍정이 될 수가 없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내게는 해로운 감정,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 그러니 제발 그자의 입을 다물게 하라.


  이렇게 외치고 싶지만 그자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자는 끊임없이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토해낸다. 뱉어낸다. 입은 언어를 제외하고는 안으로, 밑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반대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무척 부정적이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지닌다.


생각해 보라. 입에서 안으로, 또 내려가지 않고 밖으로 위로 나오는 물체들을... 이럴 때 쓰는 말, 내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왜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기나. 그만큼 그자는 입을 벌리고 수많은 것들을 뱉어내지 않았던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어떤 고백


  고백컨대 나는 그를 저버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뼈마디 앙상한 손으로 내 심장을 숙주 삼아 동맥과 정맥의 뒤바뀐 운명을 노래하는 그를 저주해본 적이 있다 듬성듬성 이 빠진 폐허를 과부 가랑이마냥 벌리고 헤벌쭉 웃는 그를 오, 심장 따위를 헐값에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개도 아니고 권태도 아닌 것들이 쥐 썩는 냄새처럼 속절없이 부풀어올라 내 망루 끝을 새나갔다 그때면 세계의 바깥이 암담하여 미래의 애인마저 저주스러웠다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문 저편에서 죽은 자들이 죽지 못해 구더기처럼 기어올라왔다


  썩은 내장을 거슬러 위장을 지나 식도를 타고 사력을 다해 터져 나오는 독거미 독거미들, 기어코 존재의 망루 밖에 게워지는 천 년 전의 어떤 고백, 만 년 전의 어떤 비명이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김지혜,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열림원. 2006년. 41쪽.


해석은 포기다. 이해도 포기다. 그런데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이 시가 마음에서 머리로 올라올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차 여행을 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가는 길. 결코 요금이 싸지 않은데, 그래도 운전하는 내 노동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 가격이 상쇄되었다고 생각하고 떠난다.


  기차를 타니, 광고나 또는 책자에 '잇다'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잇다'

  한 지점에서 한 지점을 연결해 준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을 맺어준다. 이렇게 '잇다'는 관계맺다가 된다. 고립되어 있지 않고, 함께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보게 된 낱말 '잇다'를 [빅이슈]를 읽으면서 떠올리게 된다.


  [빅이슈]를 받아보면서 늘 느끼는 점이 바로 '잇다'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관계맺기, 홀로가 아닌 함께.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잡지가 바로 [빅이슈]다.


판매원인 '빅판'이 전철(지하철)역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연결이 되고, 또 잡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되는 '함께'를 실천하는 잡지.


새해 신년호다. 무엇을 연결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노년'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간다는 것,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바로 시간의 연결이다.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끊어짐. 이건 죽음이다. 죽음 전까지 우리는 연속되는,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 산다.


그런데 가끔 시간을 끊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세대론이 그렇다. 이 세대, 저 세대가 다르다고, 연결되기보다는 단절되어 있다고, 그래서 소통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시간을 끊을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한 세대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까? 지금 젊은 세대라고 해서 영원히 젊은 세대로 남을까? '라떼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될까?


아니다. 우리는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아간다. 그 살아온 시간 속에 수많은 세대들이 연결되어 있다. '요즘 젊은애들'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된 시간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불리는 세대를 통과해 왔다.


죽음으로 시간과 단절될 때까지는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르게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꼭 아이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이렇게 우리는 '잇다'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노년'이라고 특정한 시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노년은 장년, 청년, 소년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연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바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번 호에 있는 옥희살롱 김영옥 대표의 인터뷰 글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잇다'를 대표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에 대한 추상적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돌보고 마음을 쓰는 관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옆에서 만나본 적이 없으면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자기의 돌봄 역량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46쪽)


아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마을은, 공동체는 그렇게 사람들을, 세대들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기 힘든 지금 시대에도 이러한 공동체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동체는 뜻이 맞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여러 세대들이 함께 갈등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이어가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세대를 막론하고 이런 공동체가 필요하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이런 연결, 즉 '잇다'를 기차보다도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새해 받아본 소중한 잡지, 우리와 우리를 이어주는 그런 잡지 [빅이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되는 시를 찾아본다. 어떤 시집은 제목이 된 시가 실려 있고, 어떤 시집은 시구절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다. 


  이 시집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시를 찾아보았는데, 시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삼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이란 시에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나'로 시작했으니 '사랑'이라고 쓰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시집 제목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보다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라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만큼 이 시집에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이 시집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죽은 별'은 과거다. 과거를 건지는 일은 현재에 과거를 가지고 오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 그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는 일. 어쩌면 시인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잊고 묻어버린 과거를 다시 살려내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역할. 그 일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이 시집 1부에는 시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시로 쓴 가족사라고 할만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시인 '지킴이의 노래'가 1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좋다.


시집 2부로 가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속도에 집착해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우리가 뒤에 두고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속도로 인해 다른 존재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2부는 부제를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정하고, 한 편 한 편 속도로 인해 잃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세상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이런 '속도에 대한 명상' 연작을 쓰게 했다고 할 수 있따.


3부에 실린 시들은 풍자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많은데, 역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는 곧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풍자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시인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이 중에 속도에 관한 시... 속도로 인해 생명이 얼마나 속절없이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짤막한 시.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1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화시학사. 2003년 1판 7쇄. 59쪽.


지금까지는 이래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제동이 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그래서 이 시가 더 절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