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김소진 문학전집 3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번째 읽은 김소진의 소설집이다. 김소진 소설의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단편들이 주를 이루지만 단편 속에 곁가지로 뻗어가는 많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다.

 

이런 중첩은 장편소설에 더 잘 어울리는데 단편소설에 이런 사건들과 인물들이 나와 이야기의 끝맺음이 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생각이 많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짧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

 

여전히 등장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과거로 향해 하고 있다. 제목이 되는 '자전거 도둑'만 해도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과거와 현재로 나뉘고 있다. 많은 과거들과 회상이 중첩되어 있어 짧은 소설에도 여러 사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단편소설에서는 그래도 많은 이야기들이 짧은 분량에 녹아 있기에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는데, 이 전집에 실려 있는 '양파'라는 소설은 단편을 넘어섰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는 느낌믈 강하게 받았다.

 

김소진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일반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민중들의 삶은 과거에나 존재하고, 그것도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 속에만 존재하는데, 어른이 된 자신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상태.

 

민중들의 삶에서 떠난 자리에서 있는 주인공들이 '양파'에 등장한다.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 어느 정도가 아니라 인정받는 자리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정치인이 되어 꽤나 유명해졌고,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했으며, 의사, 기자 등등이 된 인물이 등장하니 말이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스쳐지나가듯 나오지만 주된 서술의 방향은 이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 가는가 하는 점에 있다.

 

변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사회의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단편에서 느꼈던 어두운 분위기, 과거의 그 어두침침한 모습들에서는 과거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수 있었는데, 이 '양파'라는 소설에서는 자신을 잃어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민중들의 삶이 소설에서 사라졌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완성이 되지 않았다. 완성이 되었다면 민중들과의 현재 삶이 더 표현되었을텐데, 그 점은 좀 아쉽다.

 

이 전집을 통해 김소진의 소설 가운데서는 단편들이 더 생각할거리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은 없다. 그러니까 제목은 "바깥은 여름"이지만,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들은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목을 뒷받침하고 있지, 어느 한 편이 대표가 되어 제목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상하다. 한 소설가가 썼으니 공통된 주제가 있겠지만,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소설들이 각자 시간을 두고 다른 문예지에 실렸으니, 이들을 공통된 주제를 상정하고 소설을 썼다고 하기엔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제목이 된 소설이 없으니, 제목과 소설들의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반대로 생각해 본다. "바깥은 여름"이라면 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안은 여름과 상반되는 계절은 겨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바깥은 즉, 겉으로 드러나 있는 생활은 여름이지만, 실제로 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겨울이라는 말이 된다.

 

겨울, 삶의 혹독함.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계절이다. 그 본질에서 이제는 여름을 향해 견뎌내야 하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그렇다.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그만큼 이 소설에 나온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겨울'에 해당한다.

 

모두 힘들다. 첫소설인 '입동'에서는 아이가 죽고, 두번째 소설인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개가 죽고, 세번째 소설인 '건너편'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헤어지게 되고, '침묵의 미래'에서는 사라지는 언어, 그만큼 사라지는 삶이 나오고, '풍경의 쓸모'에서는 교수가 되지 못하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한창인 여름에 접어들지 못하고 있는 강사가 나오고, '가리는 손'에서는 다문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들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한창 때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겨울'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소설인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의 인물인 명지가 앓고 있는 병이지 않나 싶다.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피부병. 피부감기라고도 한다는데, 소설에서만 있는 상상 속의 질병인 줄 알았더니, 검색해 보니 실제로 일어나는 질병이다. 많이들 겪는 질병인가 본데... '주로 몸통에서 사지로 퍼져나가는 반면, 얼굴이나 햇빛 노출 부위, 손발바닥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설명되어 있다.

 

역시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맞다. 이 질병을 통해 소설의 제목을 거꾸로 읽게 됐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들은 이런 질병을 앓고 있어도 잘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소설 속 현석이 명지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게 되듯이, 또한 이 소설집 속의 인물들의 삶 역시 남들에게 그 아픔이, 슬픔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속으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바깥은 여름'인데 '안은 겨울'은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만을 보지 말고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다고.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간결한 문장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무성한 여름을 느낄 수 있는 문체가 아니라 낙엽들이 생기는, 그리고 가지만 남게 되는 가을, 겨울의 문체라고 할 수 있다.

 

빠르게, 간결하게 읽히는 소설이지만,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이런 뼈대들만 보면 안 된다. 그 뼈대들이 추구하는 잎들을 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입동'으로 겨울에 들어섰음으로 시작하지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삶은 겨울이지만 이 겨울이 봄으로, 여름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발표 순으로 소설집을 엮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바깥은 여름'이니 우리 안도 여름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겨울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고.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여름을 꿈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의 의학,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활환경이 나아졌고, 그 나아진 환경으로 인해 평균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예전에는 환갑이라고 하면 오래 산, 경사스러운 일이었는데, 요즘 환갑잔치를 한다고 하면 젊은데 무슨 잔치냐는 핀잔을 듣게 된다.

 

환갑을 넘어 80이 기본이 된 지 오래. 이제는 백세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백세 시대에 예상하지 못한, 어쩌면 예상한 복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치매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상태... 이 소설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상반된 죽음이 나온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머리와 몸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분류를 한다면 머리가 먼저 멈춰버리는 사람이 있고, 몸이 먼저 멈춰버리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

 

할머니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멈춰버린 분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기억은 온전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몸보다 머리가 먼저 멈춰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치매다. 몸은 움직이는데, 머리는 멈춰버린 상태.

 

머리가 점점 기능을 상실해 갈 때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러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별해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 (103쪽)

 

할아버지의 상태는 이것이다. 최후까지 할아버지는 할머니와의 기억을 놓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버릴 때, 그에게는 이제 기억 속의 사람은 없다. 새로운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얼마 전에 본 "장수상회"에서 기억이 없지만 감정은 살아남아 있는 상태.

 

그것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결국 몸과 머리가 모두 멈춰버릴 때 이제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삶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준다. 그 비켜줌에 머리가 먼저일지 몸이 먼저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비켜주는 것은 일치한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이는 모습을 짧막한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짧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결코 짧지 않다. 우리 인생이 시작될 때는 아주 조금밖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멀리 나아간다. 멀리 나아가더라도 자신이 돌아올 길을 잊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너무도 멀리 나간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잊어버리다 지금까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인지를 잊어버리고……" (107쪽)

 

마지막,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버리게 되면 그때는 떠날 때이다. 다른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모험을 물려줄 때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을 한다.

 

이별을 맞이하는 자세... 소설에서 손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이별에 대해서 알아간다. 이별에 대해서 더이상 알 수 없게 될 때 그때는 자신이 떠날 때이다.

 

소설에서 손자는 자신의 자식과 함께 나온다. 다시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렇게 이별을 하지만 우리는 또다른 만남을 통해 이별을 완성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이별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짧은 분량 속에 결코 짧지 않은 삶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 김소진 문학전집 5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짧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꽁트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주로 5쪽을 넘기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들.

 

장편, 중편, 단편이라는 말에 다시 장편(掌篇)이라는 말이 어색해서(장편이라고 한글로 쓰면 아주 짧은 소설과 긴 소설이 같은 글자로 어떤 소설을 이야기 하는지 알기 힘들게 되어 버리니) '엽편소설'이라는 말로도 쓰이는 소설들이다.

 

짧은 소설들은 특징이 있다. 사건은 하나여야 하고, 인물들도 최소화되어야 한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서 극적인 반전이 있어야 한다.

 

결말을 독자가 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면 재미 없다. 이미 익숙한 결말에 독자들이 새로움을 느낄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달라서도 안 된다. 도무지 독자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라면 독자들의 손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꽁트는 힘들다. 너무 익숙해서도, 그렇다고 너무 독창적이어서도 안 된다.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여기에 결말은 주로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 비극이어서는 안 된다. 비극을 느끼기에는 분량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꽁트를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 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 한다.

 

그러니 꽁트는 가볍다. 결말도 행복하다. 예측 못한 반전도 있다. 이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김소진의 다른 소설들, 중편 이상 되는 소설들이 과거로, 과거로 가서 현재를 재구성해내고 있다면,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면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은 경쾌하다.

 

왜 이렇게 경쾌할까 했더니, 본래 이 소설집은 '사보'에 썼던 것들을 모아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사보'가 무엇인가. 회사에서 내는 홍보 책자 아니던다. 이런 책자에는 직장인들의 생활이 담겨야 하지만, 직장인들의 생활이 무겁고, 어둡고, 비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직장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경쾌하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단지 직장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로 밝고 명랑하게 보여줘야 하고.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밝음과 명랑함, 사랑이 넘쳐난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김소진 소설 읽기의 어두운 터널에서, 사회의 중압감에서 빠져나와 밝은 햇살을 즐기며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한편의 소설들이 그렇게, 어디론가 여행을 갈 때 버스나 기차 좌석에 앉아 읽으면 더욱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그런 소설들이다.

 

우울할 때,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느낄 때, 가정생활에서 만족감을 못 느낄 때, 여기 소설들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9-2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풍근배커리 약사 김소진 문학전집 4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소진 전집을 1권부터 순서대로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도서실에서 빌린 책이 그 순서를 무시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선 있는 책부터 읽어야 했기 때문.

 

순서가 바뀌었다고, 또는 건너뛰었다고 소설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소설이란 그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독립적인 소설들이 읽다보면 하나로 꿰어지는 어떤 일관성이 있지만.

 

김소진 소설의 일관성은 바로 '기억'이다. 자신의 경험을 과거로 과거로 되돌리는 기억. 그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는 일. 그래서 어떤 소설을 읽어도 김소진 개인의 경험과 그의 기억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에 있는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는 전집의 1권이 된 "장석조네 사람들"의 제목을 지닌 장석조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목마른 뿌리'라는 소설은 비록 통일이 된 미래를 가정하고 있지만 월남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된 자신이거나 대학생이 된 인물이 등장한다.

 

이토록 김소진 소설에서는 김소진이라는 작가 개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의 가족도. 여기에 80-90년대 사회 분위기 역시 인물들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 되고 있다.

 

그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는 아득하게 먼 과거가 된 듯한 시기가 눈 앞에 떠오른다. 기껏해야 30여년 전인데도 조선시대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우리나라의 과거.

 

결국 그의 소설에서는 현재적 갈등은 그다지 심하지 않다. 소설이 현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과거를 불러낸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재현해 내고만 있다.

 

한때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문학에서도 '후일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일본식의 용어를 따서 '사소설(私小說)'이라는 말도 했었고. 그들은 이제 과거를 들려주고자 했을 뿐이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온몸과 온정신을 바쳤던 사회주의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세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일명 386이라고 하는, 자랑스럽게도 자신들의 과거를 드러내었던, 그러나 컴퓨터로 따지면 386은 구식 중에서도 구식이고, 얼마 쓰이지도 않고 486에, 펜티엄에 자리를 내주고 만 그런 컴퓨터 아니던가.

 

김소진 소설을 읽으면 그런 386컴퓨터의 운명이 생각난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서서 과거를 회상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때는 최신식이었지만 곧 쓰임새를 잃어버린 그런 인물들이 그의 소설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으니.

 

온갖 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 과거가 생산적으로 인물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 인물은 그냥 멈춰있을 뿐이다. 멈춘 상태에서 과거 속으로 무한히 들어간다. 어쩌면 김소진이 더 살았다면 이제는 과거들을 종합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 전집에는 두 편의 미완성 유고가 있다. 한 편은 짧은데 (내 마음의 세렝게티), 또다른 한 편은 좀더 길다. (동물원)

 

'동물원'이나 '내 마음의 세렝게티'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내 마음의 세렝게티'에서는 본격적으로 동물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소설이 끝난다. 완성이 안 되었다. 그러나 연수원에서 훈련받는 사람들 모습이 바로 동물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물원'이란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서 '남생이'이야기가 언급되고 있고, 또 여자의 입을 빌려 동물원에서 만난 수달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지만, 주된 이야기의 인물은 대학생이 된 영기의 경험이다.

 

그의 경험이 과거 회상을 통해 펼쳐지는데, 이런 회상 속 인물들의 모습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더 진행이 되었어야 하는데 미완으로 끝난 점이 아쉽다.

 

주인공이 취재를 해야 하는 나비, 화려하지만 인간에게 잡히면 박제가 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광고 속에 존재해야 하는, 그런 나비... 이것과 인물들이 얽힌 이야기가 잘 맞물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여하튼 두 권째 읽은 김소진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하는 과거 회상을 통해서 그다지 멀지 않지만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과거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떤 소설을 펼쳐도 그렇게 이 과거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때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 우리의 기억을 불러낸다는 점이 김소진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