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 길 위의 사진가 김진석의 걷는 여행
김진석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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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보기는 각기 다른 행동이지만 이 두 개가 합쳐지게 되면 특별한 하나가 된다.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걷기와 보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쩌면 덤인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보고, 보는 것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는 뭐랄까 일종의 구도와도 같은 것. 나도 한때 일 년에 900km 넘는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매 주말마다 산길을 그렇게 걸었고 사진을 찍었다. 평지 길이 아니고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르는 길은 일종의 무념에게로의 집착과도 같은 것이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우게 되는 놀라운 효과에는 온몸이 문드러질 만큼 악전고투의 통증을 후유증으로 남긴다. 다리는 지치고 무릎은 시큰거리고 가슴은 숨쉬기도 벅차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가끔 가다가 발바닥에 물집이라도 생기면 쓰린 고통은 걷는 내내 괴롭다. 그렇게 걸었던 길을 기억하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가 주는 위압감은 오랜 시간 동안 걷기를 해본 적이 없다면 실감도 나지 않는 거리일 테다. 


산다는 것은 시간 길의 걷기와도 같다. 시간 길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연명하듯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그렇게 욕망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는 늘 부산물처럼 따라 나오는 지저분한 분비물처럼 찔끔찔끔 세어 나오는 갈등과 탐욕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부대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걷는다는 것은 두발로 비움에 대한 구도의 과정이다. 육신의 피로와 통증. 그리고 당장에 피하고 싶지만 스스로 포기가 안되는, 그래서 끝가지 고집스럽게 나가며 고집을 어느 순간 걷다 보면 이것마저도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것이 바로 걷기라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당장에 하루 열 시간 동안 걷고 나면 가장 큰 행복의 순서가 깨끗이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보는 피로감이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되는 것은 육신의 무리가 따르는 행동의 벗어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발을 기계적으로 내딛고 눈동자를 반쯤 풀리고 고개는 적당히 숙이게 되며 무슨 말이라도 전혀 생각나지 않고 이미 머릿속은 무중력 상태로 앞으로 나가게 된다. 다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인생의 무게처럼 지긋하게 눌러 오는 통증에 날선 감각만이 나의 전부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 이것이 걷기의 인내가 주는 선물이다.


이런 무중력의 상태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진솔하고 경건하고 비움의 철학을 철저히 몸으로 채화된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주제로써 가 아니라 그저 눈으로 보고 손가락이 눌러지는 본능적인 그런 사진은 걷기에서만 가능한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몇 해전, 크리스마스 날 새벽부터 산길 25킬로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겨울철이라 산바람이 몰아지고 눈발이 자오선을 그리듯 휘날리며 산길은 미끄럽고 산이 우는 소리를 걷는 내내 들으면서 카메라를 들고 그렇게 걸었다. 산길이라 경사가 심할 때는 한 여름 비지땀처럼 땀을 흘렸고 내리막 길에는 다리가 풀리며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버티기도 했다. 그저 아득한 삶의 길이 그렇게 순간순간 눈물겹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까지 이 고생하며 걸어야 하는 것인지, 왜 이렇게까지 고행 같은 길을 숨 막히도록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저 태어난 자의 인생의 지독한 모순 같은 걷기가 아니었을까. 누군들 편한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 편한 것을 굳이 마다하고 스스로 길을 걸어야 할 만큼 몸을 혹사시키는 자학적인 개념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이란 삶은 다 그런 거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이루고자 함이 자신의 생의 전부라 할지라도 오늘 이 순간에는 빨리 고통을 벗어나는 길. 결국 해탈하고 싶은 강한 욕망 마져도 다 버리고 아무런 생각까지도 나지 않는 진공의 상태를 비로소 만나려 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루에 20km 정도 걷다 보면 카메라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전락한다. 이미 사진을 찍어야 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내동댕이 치고 싶은 카메라. 그런데 던저 버리고 싶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는 사진은 가장 순수한 결정체로 남는다. 그 어떤 사심도 생길 여지가 없이 그저 본능적인 시선의 스케치 같은 사진이 될 수밖에 없다. 쉽게 오고 가며 뽀로로 달려가서 찍어대는 사진은 욕심이 가득할 테다. 잘 찍어야지. 공명심 내보여야지.라는 등등의 미련 같은 부스러기가 부대적으로 달라붙기 마련이지만 정말 카메라의 무게 때문에 팔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카메라 때문에 목덜미가 끊길 것처럼 고통스럽게 다가올 때 찍는 사진이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사진에 달라붙어 있는 온갖 사심들이 사라지는 놀라운 효과가 기포 방울이 터지듯 비워냄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앙금같이 휙 저어 낼 수가 있게 된다.


 

이 책에는 그렇게 사진의 갖은 양념 같은 스킬이나 은유 따위는 없다. 직관적이고 선이 굵은 사진들이다. 순수하고 사진이 느낌이 확 뺏지만 선이 굵은 감각으로 찍힌 사진이 수평선이 되어 나열되어 있다. 모름지기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 제대로 진국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사진은 느린 호흡으로 길게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말해 주고 있었던 까닭이다. 특히나 40일 동안 매일 20km를 걸었던 긴 흐름의 사진은 사진 자체에 대한 욕심을 모조리 내려놔야만이 가능하고 결국 사진을 버리고 나니 다시 사진으로 채워지는 역설적인 사진의 진미를 맛볼 수가 있다. 한 달간 매일 20km를 걷다 보면 사진은 이미 벗어나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사진을 버린 풍경에서 다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는 것은 사진의 진공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진을 내려놓고 나서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진은 시간과의 평행선처럼 함께 가야만이 비로소 사진이 세속적인 욕망과 탐심이 가슴에 쌓인 때가 빡빡 문질러서 없애는 작업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카메라는 무수하게 팔려도 사진에 조루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 긴 심호흡으로 느리고 느리게 걷듯이 가야 사진은 근사하게 조립된다. 길고 끈질기게 가야 하는 사진은 그래서 걷기와 보기가 합쳐져야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오래 걸어서 찍은 사진에는 가식이 없다. 온몸의 통증과 피로가 기반이 된 사진에서 솔직함이 묻어나는 것은 오래 걸어 본 사람만이 느끼는 사진의 진리와도 같다. 어쭙잖은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채화되고 발바닥의 감각으로 찍은 사진에서 급격한 감동이 아니라 지긋한 여운의 울렁거림이 사진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질이 어쩌고 구도가 어떻고 사진적인 의미가 어떠해야 하고라는 이런저런 사진 공식이 깡그리 무시하고 땀이 뚝뚝 덜어져 카메라에 땀이 말라 남아 있는 소금의 앙금을 본 적이 있는 카메라는 그래서 더 삶의 경건함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을 펼쳤다 닫았다. 사진을 한번 보고 다시 글을 읽고 또 사진을 읽고 글을 보고 또다시 사진과 글을 여러 번 읽고 봤다. 무슨 삶의 상념을 처절하게 비워 내고서 만나는 순례자들의 엷은 미소가 해맑은 것은 걷기로 인하여 찍은 사진의 백미다. 육체적인 피로감이 극도에 다다라 허허로운 웃음기에 미소 한자락으로 카메라와 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2000년 전의 이 길을 걸었던 야고보의 미소와 닮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길을 가면 성현의 미소를 찍는 것처럼 찍게 되는 미묘한 원리가 바로 걷기와 찍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S : 책을 통하여 지긋한 사진을 만나게 해주었고, 이런 책을 보게 되어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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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사들 - 그곳에 히포크라테스는 없었다
미셸 시메스 지음, 최고나 옮김 / 책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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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사람들이 양심과 공감대를 비켜 나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잃어버리면 사람에게 어떤 패악을 입히게 되는지, 인간을 실험재료로 사용하는 것에서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 책은 독일 나치 시대에 의사들이 만행을 고발하고 다시는 비인간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교훈을 준다. 의사는 의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의 판단과 사유를 기반으로 해서 의료적 기술을 통하여 치유라는 위대하고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숭고한 가치가 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오염이 되었다면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낳게 된다. 나치 시절의 의사들이 행한 각종 인간 실험을 통하여 전쟁에서 도구로 사용되고 권력의 수족 역할을 하게 되니 인류사적으로 극적으로 악랄하고 비열한 사건이었다. 뭔가 대단한 착각이었고 단지 실수라 하기에는 치명적인 인간사에 있어서 이성의 치명적인 오류였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또 누군가는 실험의 재료로 고통스럽게 죽여야 했던 인간 본연적인 모순의 벽에 부닥치게 된 사건이었다.


전쟁은 인간적인 보편적인 존엄과 가치를 철저한 집요하게 파괴한다. 그 어떤  이념이나 가치가 아무리 우수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인 본위적인 권리가 도외시될 때, 인간은 그야말로 하나의 물질적인 재료로 급진 추락하고 말 것이며 따라서 전쟁은 바로 이런 극한의 모든 인간의 불완전성의 총체이다. 여기에서 동조한 의사는 직접 전쟁을 수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전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의사의 가치를 인간의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사실이다. 의사가 사람을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의 행렬에 줄을 세웠던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은 14명의 나치의 대표적인 의사를 사례를 열거하였고 본문에서는 차마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조차 심리적인 부담스러울 만큼 악행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은 과연 어느 지옥인들 이보다 더 악랄하고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지는 새삼 나열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최대 오점 중에 하나이다. 이런 극단적 사례는 과연 지구 상에서 인간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왜 여기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광기의 시대에 모조리 미쳐서 자멸적 스펙트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나치 시절에 인간을 실험의 도구로 여긴 사건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선연히 드러낸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 재판 법정에 나와 자기들의 오류를 갖은 핑계로 댄다는 이유가 바로 또 하나의 비양심적이었음을 여실히 스스로가 증명한다. 그렇게 똑똑한 의사들이 모를 리가 없다. 의사 이전에 군인이었다던 핑계, 상부의 지시였다는 핑계,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까지 공감을 잃어버린 이유를 붙인다. 그렇게 떳떳했더라면, 그렇게 무죄였더라면 왜 평생을 남미로 도망을 다니는 코스프레를 연출하였던가 하는 점이다. 다 알았던 거다. 의사들 일부가 철학을 배운 자도 있었다는 점은 그래서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가. 과연 그들에게 철학이 무엇을 가르쳤던가 말이다. 그게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던 것인지 자신이 인류 전체에게 끼친 인간적인 환멸의 대상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아니라면 평생을 도망 다닐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떳떳하지 못함을 스스로가 다 증명한 셈이니까. 차라리 자신이 정당함을 주장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가 광기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결론이 난다.


의사는 치료 자체가 목적이 될 때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러나 치료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 무조건 타락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나치 시절은 광기의 권력과 사상이 타락을 시켰지만 오늘날은 자본이 의사를 타락시킨다. 돈벌이 수단으로 의학 기술이 발전된다면 진정한 치료는 사라진다. 치료가 사 사라지면 남아 있어야 할 의사는 존재의 근거와 이유는 없다. 특히 반자본적인 의학의 헌신과 희생은 의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숭고함으로 나타나지만 이와 반대 될 때는 치명적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 2014년 9월 2일 기사) 중에 "의사들이 자기 직업에 넌더리 나는 이유"라는 기사가 검색되었다. 이 기사의 요지는 의사라는 본래의 고유한 영역으로써 가 아니라 이제는 의사라는 직업 중 하나로서의 회의감을 이야기한다. 이는 의사가 권력의 수족 역할로 전락하거나 또는 자본의 하수인으로 수직 직하하게 되면 의사는 공동체에서 중심 기둥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회적인 병리 현상의 힐링이라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업역이 의사의 고유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의사는 양심의 나침반이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때의 의사나 지금의 의사가 다를 바 없다면 암울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사들이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여전히 다수의 의사는 자기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를 통하여 인류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는 첨병 역할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교훈을 통하여 여전히 의사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내야 한다. 소수의 의사가 가지는 자존감이 결국은 인류에게 병과 상처를 아물게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에게 거는 기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 본 서평은 책담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책을 지원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제는 서평신청도 하지 않았음에도 책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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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0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는 돈 많이 버는 극한직업인 것 같습니다.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이라서 의사를 장래희망으로 정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생각보다 업무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잘 모를 겁니다.

yureka01 2015-10-01 14: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요즘은 자본력이 큰 대형병원의 직원이 되어가는 의사를 보면 씁쓸합니다.그렇게 빡시게 공부하고 전문의 따도 개업 못하고 직장이 병원이 되니,,,,, 설사 개업하더라도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니 환자 수에 목매다는 치료기계화가 되어가는 현실이죠...

커피소년 2015-12-0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요새 스타 요리사라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지니 요리사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저임금에 극한직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이 요리사를 장래희망으로 많이 생각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단지 요리하는 모습이 멋있어서라면.. 그 이면을 알고 나면 바로 그만두고 싶어 하겠지요.
 

출판사 책담의 서평단 자동 참여로 받은 책이다.

나치 시절에 부역하거나 적극 동참한 독일의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

머리는 똑똑한데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인간에게 얼마나 심각하고도 극악한 짓을
벌이는 것인지 이 책은 낱낱이 기록으로
보여 준다.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치료가 아니라 죽게 한다면 의사는 그냥 악마의 수족으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날....자본으로 타락이 의사에게도 적용 되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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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9-27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르 소설 느낌?!^^
미세레레 ㅡ장크리스토프 그랑제..읽은 느낌?
나치의 시대엔 참 인간적이지 못한, 신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까지 뵈는 일들이 자행되지 않았나..
생각들어요. 의사들이 돕고 ..(그 들은 거의 다분야에서 골고루 활약 ?을 하는 탓에...

yureka01 2015-09-30 17:03   좋아요 2 | URL
의사의 본연에 의무와 권리가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휘둘리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이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일 겁니다....

요즘은 권력이 다만 돈으로 바꼈어요..

[그장소] 2015-10-01 10:19   좋아요 1 | URL
신기하죠?!그깟 종이...
쇠. 생각하면.의식이란 정말 놀라워요..^^ 그것을 위해 만든 권력..이기도하단 생각요..
화폐가치를 만들며..

yureka01 2015-10-02 12:13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일전에 인텨뷰에서 칼의 노래라는 작품을 쓸 때,

단어 하나 가지고 밤을 새웠다고 했다. 그만큼 치열하게 글 쓰시는 분이다.


그런 작가가 이번에 '라면을 끓이며'라는 생경스러운 제목의 책을 냈다.


물론 나도 예약할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블로그 이웃이자, 알라디너 이웃인 연꽃플라리스님에게 미리 기프티북을 받았다.

(책 좋아하는 거 너무 꿰뚫어 줌 ^^)


우하하.... 책 좋아하는 분이라서 책을 하늘로 날리듯 책 선물로 날려 주었다.


게다가 알라딘 굿즈 사은품이 양은 냄비와 라면???

라면 끓여 먹으면서 책을 읽어도 좋다는 뜻이다.


이 책의 PR 문장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悲哀]”

이 문장 하나가 아주 후벼 판다.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이라니.

이 안쪽은 내면을 말하는 것일 테고

내면을 들여다보니 비애라는 문구.


먹고살기 퍽퍽하다는 의미가

이 문장 하나로 삶의 이야기 쌓는 탑의 기단석이 된다.


먹고사는 일.

어떻게 가면 갈수록 더더욱 퍽퍽해지고 살벌해졌을까?


조선시대의 1인당 GNP는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지금보다는 몇 십 배나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미래의 먹거리 불안, 취업, 결혼, 육아 등등이 그때보다야 풍요롭지만

풍요 속에서 곤궁함은 각종 통계의 수치와 사회적 피부 상태로 나타나고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다.


짐작건대 작가는 여기에서 라면이라는 가장 단순한 인스턴트 음식으로

우리의 삶이 피폐화되어 가는 모종의 상념을 글로 풀어 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기와 눈물 떨군 라면 먹어 보기는

삶이 고단한 현실에서 터져 나오는 잠시간의 허기를 면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안쪽의 비애와 바깥쪽의 무덤덤한 표정 없는 모습에서

심각한 괴리를 안고 골방에서 머리를 싸매야 하는 일탈을 꿈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 먹고사는 일이 여의치도 않으니 급기야 자살과 범죄와 정신병과 

현대의 암울한 현실이 버겁게 다가오는 작태를 우린 늘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어떤 추측을 도모하게 하는 책 제목.

'라면을 끓이며'는 결국 가슴에 맺힌 마음을 끓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예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된다.


책이 기다려지고 책을 선물해주신 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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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9-17 2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좋으시겠어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저는 어제 예약주문 했어염.ㅎㅎ

yureka01 2015-09-18 11:34   좋아요 1 | URL
하여간 양은냄비..이거 좀 대박....정말 머리 잘쓴 케이스더라구요~~~

정말 고맙더라구요..^^..

해피북 2015-09-18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속마음까지 꿰뚫어주는 좋은 이웃님을 두셨어요ㅎ 축하드려요 재밌게 읽으시구 소문내주세요^~^ 그런데 사은품 정말 대박인거 같아요 양은 냄비와 라면이라니요 ㅋㅂㅋ

yureka01 2015-09-18 13:11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이 책은 진짜 라면 끓이면서 책 읽을 생각입니다.

양은냄비까지 ..ㅎㅎㅎ대박~

후애(厚愛) 2015-09-18 14: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저도 라면 끓이면서 책을 읽어야겠어요. ㅎㅎ

yureka01 2015-09-18 14:42   좋아요 1 | URL
한끼의 라면이라는 멧세지가 주는 작가의 날선 의도가 궁금해져요...

후애(厚愛) 2015-09-25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추석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yureka01 2015-09-27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도 즐거운 명절 되시구요...
 

 

권기만 시인의 첫 시집이라고 한다. 그것도 나이가 무려 쉰일곱에 첫 시집이다. 나이 57에 처음 시집을 낸 것에 대한 알게 모르게 어떤 추측을 하게 된다. (약간은 통속적이긴 하지만,)


학창시절, 문학을 꿈꾸는 청년. 소위 문청이라고 하지.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하고 부양할 가족이 있어서 문학의 꿈보다는 당장에 먹거리를 해결해야 하니 그렇게 문학의 꿈은 증발되었고, 살다 보니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때의 문청의 염원은 먼 추억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나이 들어 갈수록 꿈틀거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울음을, 자꾸 튀어나오는 문학의 울림을 도저히 외면하기 어렵다. 자꾸 울게 된다.

자꾸 토해내지 않으면 정신병이라도 걸린 양, 사람의 기력이 쇠잔해짐으로 본능은 피할 수가 없다. 그동안 꾸역 꾸역 낙서처럼 흘려 쓴 노트의 언어들이 다듬어지고 고쳐지고 새롭게 덧대니 환갑을 얼마 두지 않은 나이에 드디어 용기를 얻는다.

무얼 주저하는가? 시집을 내자. 그동안 속으로만 울었던 이야기를 세상에 고백하자. 우리가 살면 얼마 살 거며 좋아봐야 얼마나 좋을 건가, 이대로 못하고 가버리면 난 속이 뒤틀려 도저히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늙어가는 나이의 잠재된, 그 꿈의 문학은 이렇게 잉태되고 울음처럼 시어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의 문학은 그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첫 시집이라 얼마나 감격했을까? 안 봐도 비디오 시나리오가 한가득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찌 그의 시집 한 권을 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살아 오면서 시에 대한 갈망. 꿈의 지극함. 자신의 모든 언어를 한 권으로 압축시켰을 감동은 늦을수록 빨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란색이라는 꿈과 기억됨을 상징 하는 것처럼, 겉 표지가 빨강보다도 수만 배나 더 강렬하게 다가온 이유이다.


꿈이 있는 자는 늙어도 늙지 않는다. 그것도 문학의 꿈이었으니까.

 

 

 

 

그래, 사는 게 뭐길래 우리는 사는 게 뭐라고 자꾸 묻는다.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삶이 무엇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 무엇은 도통 알 수가 없다. 각자의 그 무엇은 도저히 살아 보지 않으면 논리로도 설명도 부족하기 마련이고 오히려 와 닿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무엇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른 삶일 수밖에 없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내 삶의 무엇을 이야기하고 겹쳐지는 교집합과 어우리지는 합집합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가 있다. 비슷하거나 혹은 전혀 다르거나 단 한 번의 사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지구 상에서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계속되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짝 엿보는 것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사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저 돈이나 벌려고 일이나 하고 밥이나 먹고살았던 게 별반 다르지 않는다면 참 사는 게 뭐기는,,,, 조까튼 거지.

 

 

 

 

눈빛에서 나온 15번째 시리즈 사진집. 이제 이 책으로 눈빛에서 나온 시리즈 사진집을 전권! 구매했다. 앞으로는 새로 나올 때마다 그때그때 즉각 사진집을 보도록 하겠다.

살면 살수록 미궁에 빠지는 질문이 늘어나듯이, 사진도 이와 비슷하더라. 사진을 보면 볼수록 사진은 점점 더 모르겠고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의 일반적인 편견의 관념을 벗어나면 사진은 특별함으로 둔갑되니 더더욱 모를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진 작품을 보고 그 속에서 내가 찾고 싶은 사진의 이야기를 만날 가능성은 보지 않는 것 보다는 더 농후하다. 애써 찍은 사진들이 사장되지 않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와 내 앞에 다가올 때,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진의 반은 이룬다고 믿는다. 그 나머지의 반은 내가 만들어가야 할 과제이고 앞으로도 사진집이 꾸준히 나온다면 여측 없이 보게 될 것이다.

요즘 드론이 뜬다. 사진으로도!

 

 

 

 

대학 입학해서 제일 많이 갔었던 곳이 도서관이었다. 그동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책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밥만 먹고 책만 읽고 살았으면 천상 백면서생으로 살아도 무슨 불만이 없을 것만 같았던 어린 나이. 하기야 학교 도서관에 엄청난 서고의 장서를 보고 약간은 흥분되고 감격으로 눈꺼풀이 붉어졌던 이유. 그만큼 목이 말랐던 것이었을 테다. 갈증. 끝도 없이 밀려드는 타는 목을 적실 것이 책이었으니, 한 세상 무지렁이로 살아도 누가 탓할 것도 없고 일자 무식으로 오로지 일만 하고 밥 먹고살아도 뭐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놈의 갈증은 도무지 해갈할 수없는 내 몸의 수분과도 같았으니 늘 말라가는 마음의 한구석은 책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나이 들어가고 야금 야금 적금한 것 가지고 시골 산자락 아래 작은 작업실 하나 만들어 책이라도 가득 채워 넣고 사진이라도 걸어 놓고 커피라도 타 마시려던 꿈을 유보시켰을 때는 무척이나 상실감이 컸다. (이사한다고 부족한 주택 마련을 위해 주택자금을 은행에서 대출받기 싫어서 몽땅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쏠쏠하게 이런 책을 보고 그나마 다소 위로를 받고 읽은 책에서 영감을 얻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꿈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책은 내 꿈의 대리만족의 한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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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5-09-16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만 읽고 살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편안한 오후되세요.^^

yureka01 2015-09-17 09:47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잘할 자신 있는데 ㅋㅋ

cyrus 2015-09-1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에 ‘벌’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표지색이 꿀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이군요.

yureka01 2015-09-17 09:46   좋아요 1 | URL
언어가 꿀처럼 떨어지나 봐요 ^^..달콤쌉사름하게 ^^

수이 2015-09-1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노 요코 여사님 책 얼른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

yureka01 2015-09-17 09:46   좋아요 1 | URL
사놓고 아직 읽지 못했어요..저도 얼른 봐야겟어요..

지키미 2015-09-1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노 요코 책 재미있습니다

yureka01 2015-09-17 09:46   좋아요 1 | URL
오.기대 됩니다^^..

페크pek0501 2015-09-1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저처럼 책광인 분들이 많다는 것...

yureka01 2015-09-18 11:34   좋아요 1 | URL
오..그러게요.반가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