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달'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도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 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향의 '그믐달'이다. 그믐달을 보는 심회心懷가 나와 다르지 않다. 그리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요사이 이 달을 보는 맛에 서둘러 토방을 내려선다. 아직은 쌓인 눈 사이로 열어둔 길을 따라 마당 한가운데 서서 나지막이 떠 있는 달을 바라본다. 겨울 아침의 알싸한 공기가 엄습하는 시간 달과의 눈맞춤은 그 무엇보다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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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
늘푸른 잎으로 시간을 살며 특별히 주목받지 않고서도 잘 자란다. 가지에서 공기뿌리가 나와 암석이나 다른 나무에 붙어 의지하며 살아야하지만 그로인해 버티는 힘으로 작용되기도 하여 돌담장에 심기도 한다.


가을에 핀다는 꽃을 볼 기회가 없다. 잎에 묻히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분명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다. 남해바다 섬마을의 돌담길에서 눈맞춤한 이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것으로는 고창 선운사 인근 선운천 건너편에 천연기념물 367호로 지정된 송악 한 그루가 절벽에 붙어 자라고 있다. 이 송악은 굵기는 물론 나무 길이와 나이까지 모두 우리나라 최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소가 뜯어먹어 소밥이라고도 한다. '신뢰', '우정'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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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본다. 등돌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대 생각 않으려도 생각이 절로 나네 不欲憶君自憶君
그대는 무슨 일로 언제나 멀리 있나. 問君何事每相分
까치가 기쁜 소식 전한다 말을 마오 莫言靈鵲能傳喜
공연히 저녁까지 놀래기를 몇 번인고. 幾度虛驚到夕曛


*여류 시인 박죽서朴竹西의 '술회述懷'란 작품이다. 없는 소식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아마도 이럴 것이다. 답답하고 울쩍한 마음이 가슴가득 차오를 동안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까치의 울음 소리가 괜히 야속키만 하다.


김홍도는 '작도鵲圖'라는 그림에 까치 한 마리를 그려놓고 그 설명에는 "마른 나무 등걸에 앉아서 깍깍대니, 우는 것은 삼가 기쁜 소식 알리기 위함일세"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제는 까치가 전해줄거라는 기쁜 소식에 대한 희망도 더는 믿을 수가 없다.


하여, 한그루 나무에 때를 달리하여 날아와 울어대던 까치를 억지로 마주보게 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까치소리에 기댄 마음 위안 삼는다. 산을 넘어 남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도 차가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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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하다. 산을 넘기에 더딘 아침해를 대신해 눈을 털어낸 하늘이 스스로 붉어지며 개운함을 전한다. 알싸한 공기가 가슴 깊숙히 파고들어 허트러진 몸에 긴장감을 일깨우기에 옷깃 마음깃 다독인다.

은은하게 품으로 파고드는 들판의 시원함으로 고운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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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구슬나무'
연보랏빛의 조그만 꽃들이 무더기로 피는 때면 잊지 않고 찾아보는 나무다. 꽃 하나하나도 이쁘지만 모여 핀 모습도 장관이다. 어디 꽃 뿐이랴. 향기 또한 그윽하니 더없이 좋다.


남도 국도변을 따라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다. 공원에 몇그루씩 심어져 있기도 하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도 아니다. 박물관 뜰에서 보고 매년 꽃필때면 찾았는데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올봄에 내 뜰에도 한그루 심어볼 요량이다.


천연기념물 제503호로 지정 보호되는 나무도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에 있는 멀구슬나무가 그것이다.


"비 개인 방죽에 서늘한 기운 몰려오고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
보리이삭 밤사이 부쩍 자라서
들 언덕엔 초록빛이 무색해졌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3년에 쓴 '농가의 늦봄田家晩春'이란 시의 일부다. 남도 땅 강진이니 그때도 사람사는 근처에서 함께 살아왔나 보다.


멀구슬나무라는 이름은 열매로 염주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목구슬나무'로 불리다가 이후에 '멀구슬나무'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겨울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는나무라 쉽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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