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가는 길'
오랜 기억을 되짚어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다산이 혜장선사와 유불儒佛의 틀에서 벗어난 마음을 나누었던 길이고, 바다를 건너온 제주도 봄볕이 붉디붉은 그 마음을 동백으로 피었던 길이다.


"한 세월 앞서
초당 선비가 갔던 길
뒷숲을 질러 백련사 법당까지 그 소롯길 걸어 보셨나요
생꽃으로 뚝뚝 모가지 째 지천으로 깔린 꽃송아리들
함부로 밟을 수 없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송수권의 시 '백련사 동백꽃' 중 일부다. 모가지째 떨구는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다. 게으른 탐방객에게 한꺼번에 다 보여줄 때가 아닌 것이리라.


뱩련사 아름드리 동백나무숲 푸른 그늘은 시린 정신으로 열반의 문을 열었던 선사들의 넋도, 남도땅 끝자락까지 봄마중 온 이들의 상처투성이로 붉어진 마음도 품었을 것이다.


하여, 백련사 동백숲에 들 요량이라면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갑옷으로 무장했던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고 동백의 그 핏빛 붉음으로 물들일 준비를 마쳐야 하리라.


봄이 깊어질 무렵 그 동백꽃 "생꽃으로 뚝뚝 모가지 째 지천으로 깔린 꽃송아리들" 보러 다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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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쌓였고 여전히 내리는 눈이 아까워 길을 나섰다. 눈이 오는 맞바람을 안고 걷는게 고역이긴 하지만 때를 놓치면 눈에게 미안한 일이다. 기분은 어느 때보다 상쾌하니 좋다.


사계절 내게 들꽃의 향연을 펼쳐주는 보물같은 뒷산 깊숙히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더딘 걸음으로 내딛는다. 마을길을 벗어나면 만나는 저수지도 꽁꽁 얼었고, 밤나무 잘려나간 산등성이에 쌓인 눈이 햇살에 눈부시다. 계곡을 건너 산길로 접어들자 사람 발자국 드문드문 이미 다녀간 사람 흔적이 반갑다. 제법 많은 눈이 왔지만 햇볕 좋은 날이 이어져 나무가지에 쌓인 눈은 이미 거의 녹고 없다. 하여, 다시 내리는 눈도 그 눈을 맞이하는 숲도 부담이 없다는듯 가벼워 보인다.


겨울 속엔 이미 봄이 자라고 있다. 부지런히 때를 준비하는 숲의 생명들에게 포근하게 내리는 눈은 잠시 쉬어가라는 하늘의 선물은 아닐까. 그 틈에 기대어 나도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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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나들이'
죽녹원, 하늘로 향한 푸른꿈을 키워가는 대나무를 따라 눈도 제 스스로 온 곳을 향한 그리움을 함께 쌓았다. 반복하여 미끄러지더라도 대나무에 기대어 쌓은자리 다시 쌓아 비로소 대나무를 닮은 형체를 갖췄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 비로소 일어났다.


예상을 빗나간 다소 미흡한 눈풍경이지만 사람들의 무리도 드물어 한적한 대나무 숲길이다. 간혹 눈 폭포도 만들고 눈사람도 만들면서 오붓한 나들이는 졸린 눈 비비고 차가운 길에 동행해준 딸아이가 있어 가능한 시간이다.


귀한 눈 아까워 눈에도 담고 가슴에도 담는다. 눈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의식이면서도 독락獨樂의 여유를 한껏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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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大寒'

그래, 눈은 이렇게 내리야 제 맛이다. 목화 솜 타서 솜 이불 누비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 때 펼쳐놓은 그 포근함을 품으라고 눈은 이렇게 온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예년과는 다른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대한을 맞이하는 오늘은 제대로 겨울의 맛과 멋을 전해준다. 대한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네 번째 절기로 ‘큰 추위’라는 뜻이다. 하늘에서 무엇이든 내리면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지난 밤부터 많은 눈이 오고 있지만 날은 포근하여 눈과 놀기 적당하다.


이 순간을 어찌 놓치랴~.
눈이 땅위에 그려놓은 그림에 눈맞춤하며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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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호의 기회다. 납매를 선두로 복수초에 노루귀까지 여기저기 꽃소식 들리고 마침 눈까지 내려 설중에 꽃을 만날 수 있을거란 생각에 슬그머니 번지는 미소를 애써 감추고 잔설이 제법 남아있는 계곡으로 들어선다.


나만의 계곡 문지기인 길마가지나무가 향기로 눈인사 건네고, 죽은 오동나무를 쪼는 새소리도 반갑다. 개운함을 전하는 차가운 기운이 몸으로 파고들지만 산을 넘어오는 햇살이 있어 춥지만은 않다.


몸을 낮추고 나뭇잎과 눈쌓인 계곡에 눈이 익숙하도록 기다리며 고개를 내밀고 있을 노루귀를 찾는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곳저곳 살피는데 시간이 꽤 지났어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아닌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너무도 익숙한 숲, 그 자리가 맞는데도 안보인다. 그렇게 한시간을 두리번거리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복수초 군락지를 가서도 만나지 못하고 온 후라서 그 아쉬움은 더 크다. 지난해는 이곳에서 설중 노루귀와 눈맞춤한 행운을 누렸는데 올해는 때가 아닌 모양이다.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꽃이 이끌어주거나 허락해야만 눈맞춤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숲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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