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응급실에선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황당무계한 일, 소름 끼치는 일, 비통한 일이 시시각각 펼쳐진다.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혹은 우리가 그런 위태로운 삶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여기보다 거리낌 없이 보여 주는 곳은 없다.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약에 취하고 개에 물리고 불에 데고 뼈가 부러진 사람들 속에서, 응급실은 변함없이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바로 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침의 푸른 하늘이 오후의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응급실에 오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지붕의 홈통을 청소하다 발을 헛딛고 떨어져 등골이 부러진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갓돌에 걸려 넘어져 대형 트럭 밑에 깔린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나비를 쫓다 차에 쾅 하고 부딪힌 아이의 부모가 당신일 수 있다. 성분 표시 없는 샌드위치 속에 들어간 땅콩을 먹고는 목구멍에 튜브를 꽂고 폐로 공기를 주입받는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탑승형 잔디 깎는 기계에 치어 한쪽 팔을 비닐봉지에 담아 와서 의사한테 도로 붙여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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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8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밑줄 그어주신 글이 맞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응급실에서 2번 일을 했었는데 정말 나는 결코 응급실에 올 일이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어요. 오늘 남편이 그러는데 남편의 친구인 경찰이 있는데 건강하고 튼튼해 보였는데 내일 심장수술을 한데요. 갑작스럽게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응급실에 갔다가 암은 아니지만 비나인 투머를 발견해서 제거 수술을 한다네요.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 미칠 지경이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것도 사실이에요. 좋은 인용글 감사해요.^^

오거서 2021-10-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로님 반가워요! 댓글도 반갑구요!!
라로님은 의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였을 것 테지요. 갑자기 긴급하게 아프지 않으면야 응급실 가는 일이 없지만 응급 상황이 예고없이 찾아오니까 정말 불안할 수 밖에 없지요.
남편 친구분이라도 놀라셨을 것 같아요. 주위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남 얘기 같지 않더라구요. 휴… ^^;

서니데이 2021-10-28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 인용해주신 내용에 동의합니다.
오거서님, 좋은 밤 되세요.^^

오거서 2021-10-29 23:0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오늘도 편안한 밤을 맞으시길! ^^
 

환자의 의무 기록지에는 흔히 심폐 소생술CPR을 하지 말라는 DNACPR Do Not Attempt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서류가 빠져 있었다. 의료 팀은 환자나 그 가족에게 심정지나 호흡 정지 상황에서 심폐 소생술을 원하는지 미리 문의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절차를 빼먹곤 한다. 이 서류는 쉽게 눈에 띄도록 보라색이나 진홍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그래야 급박한 상황에서 환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서류철을 뒤지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서류가 없을 때는 기본적으로 소생술을 시행해야 한다. CPR 전담 팀이 득달같이 달려와 가슴을 압박하고 심장에 충격을 주고 아드레날린을 주입하는 등 중단된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소생술은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격렬하다. 의사들은 환자의 부활을 소망하며 생명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몸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하지만 애초에 헛된 소망일 경우, 즉 나이가 너무 많거나 상태가 너무 악화돼 심장이 다시 뛰어도 사람답게 살기 어려울 경우, 그들이 초래하는 결말은 예외 없이 추하고 잔인하다. 존엄이라곤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자행되는 심폐 소생술, 즉 CPR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이다. 말기 심부전처럼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는 애초에 시행하면 안 되는 처치였다.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 압박과 전기 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난다.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CPR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 동안 산소 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 손상을 입게 될 위험이 있다. 남은 평생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DNACPR에 관한 논의는 환자에게 CPR을 원하는지 사전에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의 소망을 의무 기록지에 철해 두면,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응급 상황에서 임상의들은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보라색 서류는 죽음의 문턱에서 의사의 예측이 아니라 환자의 소망을 중심에 두는 데 꼭 필요하다. 환자는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한, 사전에 언제든 CPR을 거부할 수 있다.

우드먼 씨는 몹시 쇠약하고 수척했다. 게다가 그와 같은 심장병을 앓는 사람의 통상적인 기대 수명보다 수개월을 더 살았다. 만성 질환에 합병증까지 겹쳤으니, CPR을 시도해 봤자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었다. 혈액 가스 분석이 그 점을 입증해 주었다. 그런데 의료 팀은 왜, 도대체 왜 이 문제를 사전에 그와 논의하지 않았을까? 왜 그가 지옥의 변방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도록 방치했을까? 왜 환자의 머리맡에서 하급 의사가 발을 동동 구르게 했을까? 환자에게 좋은 치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본능을 억누르게 하면서 말이다.

그 답을 찾으려면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 즉 의사들이 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살펴야 한다. 의사들도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하려 든다. 오늘날 사회는 죽음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위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가 반드시 그 일을 기꺼워한다는 뜻은 아니다.

의료진은 흔히 시간과 일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CPR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회피한다. 물론 열악한 근무 여건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속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의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오랜 수련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바로 그 수련 때문에 의사들은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리고 두려워한다. 상황을 개선하려면, 일단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고 노련하게 환자의 가슴을 압박하면 환자가 눈을 번쩍 뜰 거라는 태평스러우면서도 대단히 부정확한 오해를 품고서 의대에 입학했다. 풋내기 의학도로서 병동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CPR을 받은 환자들이 실제로 살아서 병원을 나서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또 의학 드라마가 생존 가능성을 얼마나 터무니없게 과장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CPR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이른바 ‘텔레비전 효과’를 증명한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이런 텔레비전 효과는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나 같은 초보 의사들에게서도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나는 TV 드라마의 어느 장면처럼, CPR 상황에서 환자의 생사가 전적으로 의사인 나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술을 숙달하고자 매진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안중에 없었다. 심정지 환자가 있을 때마다 나는 CPR 팀의 침착하고 듬직한 리더로 거듭나는 데 급급해서, 맞물린 손바닥 아래에서 억눌리는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CPR 상황이 펼쳐지는 순간 온통 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CPR을 제대로 하겠다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한편에선 그게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입원 중에 심정지를 일으킨다면, 나는 딱 한 가지만 바랄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서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CPR 팀. 현장에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살아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필요 없다. 심정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뛸 가능성이 줄어들기에 무자비할 정도로 냉철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병상 옆에 놓인 기계에 가장 가까운 버전의 인간을 원한다. 이따금 마주쳤던 미숙한 CPR 팀처럼 결정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한다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역설적 요구를 하고 있다. 환자에게 공감하고 환자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길 원하면서, 또 한편으론 환자의 상황에 초연하길 바란다. 정지된 심장, 짓이겨진 팔다리, 질식할 것 같은 아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기계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기를, 움츠러드는 본능을 억누르고 끝까지 밀어붙이길 원한다.

내가 졸업한 의과 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의과 대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질병에 관해서만 꾸역꾸역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대상인 내 미래의 환자는 배움의 내용에서 빠져 있었다. 내 뇌는 명칭과 수치, 약물과 진단으로 터져나갈 듯했지만,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일관성 없고 엉뚱하고 잘 까먹고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하는 평범한 인간에 대해서는 배운 게 별로 없었다. 의학 교과서의 명명백백한 세상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는 어중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지식 습득이라는 난제에 짓눌리다 보니, 의학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존재 이유)인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결과, 자격을 갖춘 의사로서 출근한 첫날에 나는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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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8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NRCPR이라고 안 하는데 이거 옛날에 써진 책일까요??^^;;
암튼, 저 최근에 제가 맡은 할아버지 환자 분이 CPR 2번 하시고 (각기 다른 날) 소생하셨는데,,, 암튼 그 이야기 제 페이퍼에 써야겠어요.^^;;

라로 2021-10-28 14:31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 2020년에 나온 책인데... 병원마다 표기하는 것이 다른 건 아닌데 왜 저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오거서 2021-10-28 15:31   좋아요 0 | URL
저자는 영국 사람. 영국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 같아요. 영국과 미국의 의료 시스템 차이 아닐까요?

라로 2021-10-28 15:32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그럴 수 있겠어요!!.^^

오거서 2021-10-28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덕분에 의료 지식이 plus 1 되었어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10월 3주 신간 역사 적바림.

8월부터 추천이 이어져서 <세계는 어떻게 번영하고 풍요로워졌는가>의 누적 점수가 높았고, 10월 2주에 추천이 포착된 <도둑이야!>와 <소재, 인류와 만나다> 역시 누적 점수가 많았다. 나머지는 뉴페이스.

박노자의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은 10월 3주 신간 톱 10에 들었다.

피터 라인보우가 쓴 <도둑이야!>의 부제는 ‘공통장,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인데 부제의 용어들이 나한테는 낯설어서 10월 2주에 초면에서 모른 척 하였다.
10월 3주에 추천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그만 잊힐 수도 있었는데 …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는 1976년부터 2013년에 걸쳐 작성한 글 15편을 모은 책을 2016년에 발간했다. 원서의 제목은 Stop, Thief! The Commons, Enclosures, and Resistance. 원서와 다른 제목으로 번역서는 <도둑이야!>. 번역서 제목이 원제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도둑이야!>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적 허위들과 이데올로기적 우화들을 종식하는 것이다. (…)

법은 사람들을 가두어 놓지,
공통장(공유지)에서 거위를 훔치는 사람들을.
하지만 더 나쁜 놈들은 풀어주지
거위에게서 공통장(공유지)를 훔치는 놈들을.
“ (10)


책 구경만 해도 충분하지만 최소한 이 정도의 기초 지식이 필요한 것 같아서 표제에 있는 용어를 검색하였다.

공통장(commons)은 ‘공유지’로도 번역된다.

커먼즈는 공동체에 귀속된 혹은 공동체가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공동의 것’을 칭한다. (전환담론으로서 커먼즈)

커먼즈란 우리사회 곳곳에 있는 문화, 토지, 사회적 관계의 형태로 공동자원을 뜻한다. (공동자원 ‘커먼즈’ 발굴과 활용방안 모색의 장 - Landscape Times 2018-04-30)

인클로저는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소규모 토지를 대규모 농장에 합병하는 법률적 절차를 의미한다. 이는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로 요약할 수 있다. (위키백과)

Enclosure.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 현상.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혹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게 위해서 울타리를 쳐서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 자산으로 만들었다. (나무위키)



역사 (11)


1. 세계는 어떻게 번영하고 풍요로워졌는가 [17.9]

#네가지열쇳말로읽은세계근대사
#신간안내 #세계는어떻게번영하고풍요로워졌는가
#물질문명키운세가지생산력과학기술소비
#이주의새책8월28일자
#책마을 #모두가왕처럼사는삶산업혁명덕분에가능했다
#신간 #세계는어떻게번영하고풍요로워졌는가
#책꽂이 #자본주의체제의문제점그리고미래는

2. 도둑이야! [9.1]

#신간 #도둑이야
#우리모두의땅과숲을훔친자는누구인가진짜도둑을묻다
#새책 #도시의보이지않는99외
#자본주의가낳은위기공통장과탈성장이해법일까도둑이야지속불가능자본주의출간

3. 소재, 인류와 만나다 [8.9]

#책의향기 #다음중깨끗한물그릇의주인을고르시오
#BOOKS #신간다이제스트10월23일자
#신간 #소재인류와만나다
#새로나온책 #유튜브의이해와활용외
#신간 #가스라이팅홍콩의토지와지배계급소재인류와만나다

4.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8.8]

#신간 #만주독립전쟁조선사회주의자열전울로프팔메
#시베리아도쿄경성에서새조선을꿈꾸다조선사회주의자열전
#최초의근대인들이고민한조선의진보적미래
#책꽂이 #책꽂이

5. 직업, 보람과 즐거움의 이중주 [5.9]

#새로나온책 #서진흥망사강의외
#주목이책 #직업보람과즐거움의이중주
#새책 #울로프팔메외
#신간 #사사건건경복궁직업보람과즐거움의이중주서진흥망사강의

6. 술, 질병, 전쟁 [5.7]

#새로나왔어요 #야생초마음外
#한줄읽기 #일어날일은일어난다외
#BOOKS #신간다이제스트10월23일자
#이책 #모두를위한의료윤리등
#새책 #울로프팔메외

7. 서진 흥망사 강의 [4.0]

#새로나온책 #서진흥망사강의외
#BOOKS #신간다이제스트10월23일자
#신간 #사사건건경복궁직업보람과즐거움의이중주서진흥망사강의

8. 대변혁 (전 3 권) [3.0]

#역사를있는그대로쓴다는함정새롭게쓴세계사

9. 역사 속의 독도와 울릉도 [2.0]

#독도와동해연구성과새로운접근법이궁금하다면신간역사속의독도와울릉도분쟁지명동해현실과기대

10. 분쟁지명 동해, 현실과 기대 [2.0]

#독도와동해연구성과새로운접근법이궁금하다면신간역사속의독도와울릉도분쟁지명동해현실과기대

11. 사사건건 경복궁 [1.7]

#신간 #사사건건경복궁직업보람과즐거움의이중주서진흥망사강의



주1. [] 안의 숫자는 주간 기준 추천+빈도 누적 점수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름)
주2. 읽고 있거나 읽은 책의 리스트가 아님 (향후에 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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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29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ommon field가 아니라 commons였네요^^;;
이번 주 올려주신 신간 중에는 ˝술˝에 한표 하고 싶습니다!
매주 안내해주셔서, 매주 감사드립니다.

오거서 2021-10-29 00:18   좋아요 0 | URL
북사랑님 감사 드립니다! ^^
 

하지만 내 아버지 시대 이래로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게 있었다. 비록 인체 해부에 숙달돼야 한다는 목적하에 공손한 태도로 실습이 이뤄지긴 하나, 해부 자체는 여러모로 보나 평범한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해부는 시신 훼손이자 모독으로서 우리 종種의 가장 어두운 금기를 깨는 행위인데도, 아직까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 10대인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메스를 들고 부패해 가는 시신 주위에 모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는 으레 인간의 살을 도려내며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해부학 교실에서 자행되는 비인도적 행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지도 교수들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심오한 가르침을 주었다. 죽은 자들 주변엔 말 못 할 비밀이 소용돌이친다는 것. 의사는 목소리가 아니라 감정과 본능을 감춰야 한다는 것. 어떤 감정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 감정은 곧 미숙함을 상징하기에 무시하고 부정해야 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했을 때 취약성을 드러내면 의학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한다는 것.

수시로 치르는 객관식 테스트에서 우리는 정답을 고르는 동시에 그 답이 옳다고 확신하는 정도를 1, 2, 3으로 표기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정답으로 믿고 고른 건지, 아니면 그냥 찍은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지나친 자신감에는 벌칙이 따랐지만, 3을 선택해서 맞으면 보너스 점수가 나왔다. 시험마다 최대 150퍼센트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기를 쓰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채점 방식이 지식뿐만 아니라 태도까지 가르치려는 의도임을 간파했다. 대학은 학생들을 박식하면서도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려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의술을 펼칠 때는 우물쭈물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랬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그런데 지나친 자신감에는 단점이 있다. 오만함과 성찰적 실천이 함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즈 교수에게 찍힌 날 오전, 우리는 신경과 전문의들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한 사람씩 환자를 진찰했다. 나는 역시나 멜로즈 교수에게 할당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단히 어려운 케이스가 떨어졌다. 내 환자의 특이한 안구 운동 패턴은 극히 드물어서 웬만한 교과서엔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멜로즈 교수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움츠러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신경 해부학적 징후를 어떻게든 설명하려 애썼다. 벨이 울리고 다음 환자에게 옮겨 가려는데, 뜻밖에 멜로즈 교수의 굳은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전에 그 MND 환자 말이야, 레이첼." 멜로즈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내버려 둬야 한다고 했던 자네 주장이 옳았어. 그 일은 내가 고맙게 생각하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일화를 들려줬다. 그게 시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아버지는 의사로서 살아온 수십 년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생각엔 너도 결국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무뎌질 때가 올 게다. 차갑게 변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단다. 안 그러면 버틸 수가 없거든."

나는 멜로즈 교수의 일상이 어떠할지 곰곰 생각해 봤다. 운동 장애 전문가로서,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온갖 끔찍한 진단을 내려야 했다. 파킨슨병, 진행성 핵상 마비, 피질 기저 핵변성, 다계통 위축증.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만큼 두렵고 암담하고 잔인한 질병들이다. 환자들의 삶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폭탄선언을 수십 년간 쏟아내면서도 다정함과 인간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 나라면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부인과 전문의는 은퇴를 코앞에 둔 교수였다. 나보다 앞서서 수많은 여성들이 애써 태연한 얼굴로 그와 마주했을 것이다. 나는 전투라도 치를 듯한 기세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자상한 미소가 내 방어적 태도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괜찮다면, 레이첼. 당신을 의학도가 아니라 그냥 환자로 대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병증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는지 혹은 모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론이 실제 경험과 똑같진 않거든요. 그렇게 진행해도 괜찮겠어요?"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가 환자의 기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속옷까지 벗은 채 무방비한 상태로 누워 있긴 했지만, 지역 보건의의 전화를 받은 뒤 처음으로 다시 안심할 수 있었다.

조직에 열을 가하는 투열 요법은 참으로 매력적인 치료법이다. 고주파 전류로 가열시킨 금속으로 환부를 절개하면, 환부가 떨어져 나가는 동시에 지져져서 혈액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 때문에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나는 목숨이 간호사의 손에 달린 양 꽉 잡았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간호사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용감하게 잘 버틴다고 말해 주었다. 고마워서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토록 작은 친절이, 이토록 간단한 접촉이 두려움을 이겨 내는 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동안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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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0-27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신간소개에서 본 것 같은데, 나중에 조금 더 찾아봐야겠네요.
잘읽었습니다.
오거서님, 일교차 큰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오거서 2021-10-27 22:1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무탈하심 것 같아서 여느 때보다 댓글이 반가움이 큽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
 

10월 3주 신간 인문학 적바림.

종류는 18가지이나 권수는 27.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그리스 로마 신화 인물 사전>(전 10권)이 있어서다.

10월 3주 신간 뉴페이스 중에 <신발, 스타일의 역사>는 주간 톱 10에 들 정도로 추천이 몰렸다.

9월과 10월에 꾸준히 추천되고 있는 인문 에세이로 터키 언론인인 아흐메트 알탄의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의 누적 점수가 높았다. 원서 표지는 감옥의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담은 하늘색 바탕이지만 번역서는 전혀 다른 색상으로 암울한 느낌을 준다.

“보르헤스가 그랬듯이 강도가 ”돈을 내놓을래 아니면 목숨을 내놓을래?” 하는 순간 “목숨”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가 얻게 되는 권력은 무한대다.” (26)

또한, 10월 2주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와, 허욱 등이 지은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케이프코드>에 추천이 이어져서 누적 점수가 상향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는 과학 저술가인 스티븐 존슨의 Extra Life: A Short History of Living Longer의 번역서. 저자는 책에서 인간이 기아, 질병, 바이러스, 의심스런 약물, 자동차 사고 등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수명을 늘려왔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의 심리치료사인 앤 토머스의 <여자로 나이든다는 것>은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와 민담 등에서 나이듦의 교훈을 찾아서 들려준다고 하는데 유선경의 <나를 위한 신화력>을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인문학 (18)


1.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12.0]

#허연의책과지성 #폭3미터감방에서세계를울린작가
#칼럼세편쓴죄로가석방없는종신형
#터키의언론탄압한국은얼마나다른가
#책과삶 #사실보도뒤반역자가된언론인

2. 우리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10.9]

#200자읽기 #인류생명연장의숨은이야기들
#책마을 #인류수명늘린발명들그짜릿한뒷이야기
#책꽂이 #데이비드보위의삶을바꾼100권의책外
#천연두굶주림까지인류가이기는법
#새책 #도시의보이지않는99외
#신간 #천하제일명산금강산유람기우리는어떻게지금까지살아남았을까온통미생물세상입니다

3. 신발, 스타일의 문화사 [10.5]

#책의향기 #정장에샌들신은남성은왜상상이안될까
#하이힐과부츠는원래남자의자부심이었다
#자유로운샌들성적인힐시대따라변한신발의상징
#신간 #신발스타일의문화사나는괜찮지않아도괜찮아가난해지지않는마음

4. 리추얼의 종말 [8.8]

#새로나온책 #서진흥망사강의외
#SNS로만소통하는사회공동체연결고리의소멸
#신간 #포스트518리추얼의종말마음의문법
#삶단단히잡아줄리추얼이사라진다

5.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에 관하여 [8.6]

#BOOKS #동물은언제부터인간의식재료가된걸까
#이책 #모두를위한의료윤리등
#도축장에서보낸85일간의기록
#신간 #신발스타일의문화사나는괜찮지않아도괜찮아가난해지지않는마음

6. 어른의 조건 [6.4]

#새로나왔어요 #야생초마음外
#책꽂이 #상처가될줄몰랐다는말外
#BOOKS #생각하지않는자어른이될수없다
#이책 #모두를위한의료윤리등

7. 두 번째 글쓰기 [4.5]

#신간 #두번째글쓰기요즘언니들의갱년기트리스탄과이졸데
#당신의노동으로빚어낸나의기록노동이야기

8. 여자로 나이든다는 것 [4.2]

#책꽂이 #책꽂이
#동화전설신화에서배우는나이듦의행복한여정

9.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 대상, 관계, 논리 [4.1]

#디지털세계의공통성회복을위해
#책꽂이 #초속도등

10.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 [4.1]

#책꽂이 #상처가될줄몰랐다는말外
#책과삶 #약자니까도와주겠다는그런시선도폭력입니다

11. 지역출판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4.1]

#한줄읽기 #일어날일은일어난다외
#어렵지만행복한지역출판

12. 케이프코드 [4.0]

#BOOKS #이주의새책10월23일자
#새로나온책 #유튜브의이해와활용외
#신간 #근원의시간속으로케이프코드뉴욕타임스편집장의글을잘쓰는법

13. 제발 이런 원고는 투고하지 말아주세요 [3.0]

#이호재의띠지풀고책수다 #반짝반짝빛나는원고를쓰는방법

14.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3.0]

#신간안내 #내향인의은밀한자기돌봄책어떻게쓰지

15. 마음의 문법 [2.8]

#새로나온책 #서진흥망사강의외
#신간 #포스트518리추얼의종말마음의문법

16. 갈등해결 수업 [1.7]

#신간 #신간

17. 그리스 로마 신화 인물사전 (전 10권) [1.2]

#10월22일학술지성새책

18. 내가 나인 게 싫을 때 읽는 책 [1.1]

#한줄읽기 #일어날일은일어난다외



주1. [] 안의 숫자는 주간 기준 추천+빈도 누적 점수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름)
주2. 읽고 있거나 읽은 책의 리스트가 아님 (향후에 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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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27 0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발책 ㅎㅎ 신발이름 종류도 정말 많더라고요.~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꿀잠 주무세요 *^^*

오거서 2021-10-27 00:12   좋아요 3 | URL
미니님께 감사 드립니다.
편안한 밤을 맞으시길! ^^

붕붕툐툐 2021-10-27 08: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발 이런 원고는 투고하지 말아주세요~ㅎㅎㅎㅎㅎ 왠지 저에게 하는 말 같아 뜨끔하면서 호기심이 생기네요~~
곧 직장에서 책 한권을 사줄 거 같은데, 뭘 선택해야할지 고민입니다~ㅎㅎㅎㅎㅎ

오거서 2021-10-27 09:34   좋아요 3 | URL
붕붕툐툐님 유머~ 이제 적응함 ^^; 호기심 앞의 말은 흘려들어요 ㅎㅎㅎㅎㅎ
며칠을 책 고르는 즐거움 속에서 지내시겠어요. 어떤 책을 선택하실지 궁금해요 ^^

stella.K 2021-10-27 20: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자로 나이든다는 건... 음.. 참 쓸쓸한 일이라고, 양희은 씨가 노래할 것 같습니다.ㅋㅋ

오거서 2021-10-27 19:14   좋아요 2 | URL
스텔라님 디제이도 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