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의무 기록지에는 흔히 심폐 소생술CPR을 하지 말라는 DNACPR Do Not Attempt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서류가 빠져 있었다. 의료 팀은 환자나 그 가족에게 심정지나 호흡 정지 상황에서 심폐 소생술을 원하는지 미리 문의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절차를 빼먹곤 한다. 이 서류는 쉽게 눈에 띄도록 보라색이나 진홍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그래야 급박한 상황에서 환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서류철을 뒤지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서류가 없을 때는 기본적으로 소생술을 시행해야 한다. CPR 전담 팀이 득달같이 달려와 가슴을 압박하고 심장에 충격을 주고 아드레날린을 주입하는 등 중단된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소생술은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격렬하다. 의사들은 환자의 부활을 소망하며 생명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몸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하지만 애초에 헛된 소망일 경우, 즉 나이가 너무 많거나 상태가 너무 악화돼 심장이 다시 뛰어도 사람답게 살기 어려울 경우, 그들이 초래하는 결말은 예외 없이 추하고 잔인하다. 존엄이라곤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자행되는 심폐 소생술, 즉 CPR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이다. 말기 심부전처럼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는 애초에 시행하면 안 되는 처치였다.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 압박과 전기 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난다.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CPR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 동안 산소 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 손상을 입게 될 위험이 있다. 남은 평생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DNACPR에 관한 논의는 환자에게 CPR을 원하는지 사전에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의 소망을 의무 기록지에 철해 두면,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응급 상황에서 임상의들은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보라색 서류는 죽음의 문턱에서 의사의 예측이 아니라 환자의 소망을 중심에 두는 데 꼭 필요하다. 환자는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한, 사전에 언제든 CPR을 거부할 수 있다.

우드먼 씨는 몹시 쇠약하고 수척했다. 게다가 그와 같은 심장병을 앓는 사람의 통상적인 기대 수명보다 수개월을 더 살았다. 만성 질환에 합병증까지 겹쳤으니, CPR을 시도해 봤자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었다. 혈액 가스 분석이 그 점을 입증해 주었다. 그런데 의료 팀은 왜, 도대체 왜 이 문제를 사전에 그와 논의하지 않았을까? 왜 그가 지옥의 변방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도록 방치했을까? 왜 환자의 머리맡에서 하급 의사가 발을 동동 구르게 했을까? 환자에게 좋은 치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본능을 억누르게 하면서 말이다.

그 답을 찾으려면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 즉 의사들이 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살펴야 한다. 의사들도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하려 든다. 오늘날 사회는 죽음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위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가 반드시 그 일을 기꺼워한다는 뜻은 아니다.

의료진은 흔히 시간과 일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CPR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회피한다. 물론 열악한 근무 여건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속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의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오랜 수련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바로 그 수련 때문에 의사들은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리고 두려워한다. 상황을 개선하려면, 일단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고 노련하게 환자의 가슴을 압박하면 환자가 눈을 번쩍 뜰 거라는 태평스러우면서도 대단히 부정확한 오해를 품고서 의대에 입학했다. 풋내기 의학도로서 병동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CPR을 받은 환자들이 실제로 살아서 병원을 나서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또 의학 드라마가 생존 가능성을 얼마나 터무니없게 과장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CPR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이른바 ‘텔레비전 효과’를 증명한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이런 텔레비전 효과는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나 같은 초보 의사들에게서도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나는 TV 드라마의 어느 장면처럼, CPR 상황에서 환자의 생사가 전적으로 의사인 나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술을 숙달하고자 매진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안중에 없었다. 심정지 환자가 있을 때마다 나는 CPR 팀의 침착하고 듬직한 리더로 거듭나는 데 급급해서, 맞물린 손바닥 아래에서 억눌리는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CPR 상황이 펼쳐지는 순간 온통 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CPR을 제대로 하겠다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한편에선 그게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입원 중에 심정지를 일으킨다면, 나는 딱 한 가지만 바랄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서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CPR 팀. 현장에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살아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필요 없다. 심정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뛸 가능성이 줄어들기에 무자비할 정도로 냉철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병상 옆에 놓인 기계에 가장 가까운 버전의 인간을 원한다. 이따금 마주쳤던 미숙한 CPR 팀처럼 결정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한다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역설적 요구를 하고 있다. 환자에게 공감하고 환자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길 원하면서, 또 한편으론 환자의 상황에 초연하길 바란다. 정지된 심장, 짓이겨진 팔다리, 질식할 것 같은 아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기계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기를, 움츠러드는 본능을 억누르고 끝까지 밀어붙이길 원한다.

내가 졸업한 의과 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의과 대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질병에 관해서만 꾸역꾸역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대상인 내 미래의 환자는 배움의 내용에서 빠져 있었다. 내 뇌는 명칭과 수치, 약물과 진단으로 터져나갈 듯했지만,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일관성 없고 엉뚱하고 잘 까먹고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하는 평범한 인간에 대해서는 배운 게 별로 없었다. 의학 교과서의 명명백백한 세상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는 어중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지식 습득이라는 난제에 짓눌리다 보니, 의학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존재 이유)인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결과, 자격을 갖춘 의사로서 출근한 첫날에 나는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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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8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NRCPR이라고 안 하는데 이거 옛날에 써진 책일까요??^^;;
암튼, 저 최근에 제가 맡은 할아버지 환자 분이 CPR 2번 하시고 (각기 다른 날) 소생하셨는데,,, 암튼 그 이야기 제 페이퍼에 써야겠어요.^^;;

라로 2021-10-28 14:31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 2020년에 나온 책인데... 병원마다 표기하는 것이 다른 건 아닌데 왜 저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오거서 2021-10-28 15:31   좋아요 0 | URL
저자는 영국 사람. 영국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 같아요. 영국과 미국의 의료 시스템 차이 아닐까요?

라로 2021-10-28 15:32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그럴 수 있겠어요!!.^^

오거서 2021-10-28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덕분에 의료 지식이 plus 1 되었어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