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씌어지기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를 사로잡아 왔던 문제였다.

일지에서 키르케고를는 "다른 어떤 것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아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는 절망의 시대이다"라고 쓰고 있다. - P14

처음에는 아마도 한 사람이 *연약함으로 인해서 *죄를 범하고,
*연약함에 *굴복할 것이다.
(오호라, 왜냐하면 너희의 약함이 탐욕, 기질, 열정, 그리고 죄의 강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너무나도 *낙담한 나머지 아마도 *또다시 죄를 범할 것인데 **절망 때문에 *범죄할 것이다. - P14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남의 눈에 잘 띌 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보는 사람에게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종교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남의 눈에도 잘 띄지 않고 눈에 띄더라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절망에 빠져 종교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것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지만, 주체적 사고가 증발해버린 헤겔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적 조류에 떠밀려 방치되고 있었다. - P15

키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죽음에 다가가는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죽어가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혐오스러운 일이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 정신적 건강을 되찾아 종교적인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 P15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 인간의 병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정신이고, *정신은 자기이다.

따라서 절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한다. 그럼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키르케고르의 자기의 정의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 P16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이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며
또는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인간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며,
간단히 말해서, 종합이다.

종합은 그 둘 사이의 관계이며, 이렇게 보건대, 인간은 아직도 자기가 아니다. - P17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필연성이란 인간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구체적인 *자연-*사회-*정치-*문화적인 환경, 성, 종족, 개인적인 경험, 정서적인 안정감, 재능, 관심, 능력, 단점들을 포함하는

*환경, *조건, *처지 또는 상황을 말한다. - P18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 너머를 동경하며, 한계를 넘어가려고 하고, 실제로 한계를 넘어가기도 한다.

자기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서 성립되고 *잠재적이므로,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는 *상상을 매개로 자신을 *반성하며 그럼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이 명백해진다.

잠재적으로 자기는 필연적인 것만큼 가능적이다. - P20

자기란 상상을 매개로 자신의 **이상적 자기를 자신의 *현실적 자기와 관계시키는 관계자로, 즉 역동적 활동체로 정의될 수 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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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철학 - 그 주제적 지형도
정대현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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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과 인간

/ 인간론

인간의 정의에 대한 철학사의 여러 논의들은 깊은 통찰을 통해 이루어져왔다.

*플라톤(Plato, 1997)의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1999)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
*아퀴나스(Aquinas,
2007)의 "*죄를 지을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인간",
*흄(Hume, 2000)의
"이성보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인간",

*다윈(Darwin, 1964)의 "*생존 경쟁 속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
*니체 (Nietzsche, 1968)의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
*프로이트(Freud, 1968)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후예" 등이 그것이다. - P44

이러한 인간관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경향은 *모두 인간의 **특정 국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부각하는 의미에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두 경우가 어떤의미에서 국면적인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합리주의의 인간론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흄의 경험주의는 인간을 **지각의 다발로 보았다.

흄은 데카르트와 달리 지식의 확장성이 지식 개념의 구성 조건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지식이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면 경험이란 무엇인가?

**경험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오관을 통하여 얻는 **지각 percep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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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방향을 지시하는 **원천들에 대한 돌이켜 깨달음 없이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묻는 물음은 답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원천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바탕 문서인 *성서와 *전범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다. - P24

역사를 거듭 새삼 그리스도교의 원천에 비판적으로 비추어보고, 그리스도교가 그때그때의 특정 패러다임 아래에서 치러야 했던 희생에 관해 캐물을 것이다.

또한 "**미래를 위한 물음들"도 제기될 것인바, 사실 어떤 교회 *전통이 *경직되어 참된 *보편성을 저버릴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한 *물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제3천년기에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참된 보편성의 *정신과 *형태 안에서만 살아남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P25

나는 각각의 거대한 전체상황들 또는 패러다임들 -
유다계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P 1)이든,
헬레니즘 비잔틴 러시아 (P 2)든,
중세 로마 가톨릭 (P 3)이든,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P 4)든,
또는 끝으로 계몽주의 근대 (P 5) 든 - 을

다룸에 있어, 약술한 *역사 전개 배후의 조*건 / 원인 / 제약들, **상수와 **변수들을 뚜렷이 드래내는 데 노력을 집중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때그때의 *패러다임을 그 *근본 특징들에 터해 통찰하고 정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옛 패러다임들이 새 패러다임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새것과 병행하여 계속 발전하고 또한 더 나아가 흔히는 서로 맞물리기 때문에,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상호 교차 / 연결시키는 일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매우 유용하다. - P26

/ 본질에 대한 물음


종교는 다 비슷하다는 말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든 종교, 특히 예언자적 종교 - 그리스도교든 유다교든 이슬람교든 - 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종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저러한 종교의 *특별한 점, *전형적인 것, 고유한 특성,
"본질적인 것" 아니 "속알"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을, 이미 유다교에 대해 제기했듯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던지고자 한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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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아직도 신뢰할 수 있는가?

3천년기를 코앞에 둔 지금 그리스도교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본고장 유럽에서는 설득력과 신뢰성을 상실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저버리고 동양종교들,
온갖 종류의 정치단체왜 체험 동아리들 또는 아예 아무 귀찮은 책임수행 없는 안락한 사생활에 빠져드는 경향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지 않은가? - P21

얼마나 많은 제도 정당 운동 교조 법규 의례가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가!

그리고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얼마나 자주 소홀히 다루어지고 낭비되고 더 나아가 배반당했던가!

다름아닌 교회들 자신은 또 얼마나 빈번히 그리스도교를 무시/남용/배반했던가 - P22

그래도 어쨌든: 그리스도교는, 유다교 이상으로, 모든 대륙에 현존하는 영적인 힘으로 살아남아 있다.

옛 *동구 공산주의의 탄압과 *세속적 서구 소비지상주의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파시즘과 나치도,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도 없애버리지 못한 명실상부 최대의 세계종교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교회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를 내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 P22

그리스도교는 더 그리스도교다워져야 한다. - P23

그리스도교가 더 그리스도교다워지자면, 전환, 다시 말해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심리주의화나 재신화화 이상의 것이다.

무릇 **개혁이란 **본질적인 것이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도록 만들 때에만, **"근본적"인 - 즉, **"뿌리에까지 이르는" - 것이 될 수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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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실재성 및 인식 가능성


정의의 실재성에 관해서는

정의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입장(객관적 실재설)과
정의란 -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 인간의 주관적 관념 또는 가치적 산물이라고 하는 입장(인위적 관념설)이다.

인위적 관념설의 경우에도

정의는 인간의 *가치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내용은 보편성을 갖는다는 견해(*보편적 가치설)와

보편성도 없다는 견해(*주관적 가치설)로 구분할 수 있다.

객관적 실재설과 보편적 가치설은 서로 유사하고 공통점이 있지만, 그 출발점 및 본질을 달리한다.

객관적 실재설에서 정의는 인간에 의해 발견되어야 할 대상 (예. 사물의 본성, 자연의 법칙)이며, 인간이 이에 따르도록 바깥(예. 신, 자연)에서 요구되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설에서 정의는 인간 스스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인간 스스로의 필요/요구/합의에 의해 - 신에 의해 주어지거나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에 대해 누구나 다 인정/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객관적 실재설은 정의를 *사물의 본성에 부함하는 것으로 보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 및 *자연법적 정의론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인위적 관념설의 대표적 논자는 흄, 벤담 등을 들 수 있으며, 정의의 논거를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 두는 칸트의 정의론, 또는 구성적 정의론을 제시한 롤즈의 이론도 이 범주에 속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칼리클레스의 정의에 관한 인식도 이에 해당한다.

보편적 가치설은 칸트의 정언명령이 이에 해당하며, ‘각자에게 그의 것’이라는 정의의 명제도 일단 이에 해당한다.

정의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설’은 의거하는 인식방법에 따라 다시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경험적 인식설)
둘째는 *합리적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합리적 인식설)
셋째는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직관적 인식설)이다.

경험적 인식설은 인간의 역사적 일반적 경험을 통하여 올바른 것으로 인정/ 확립된 정의가 존재하며, 또한 이를 경험적 방법(관찰 검증)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합리적 인식설은 정의가 무엇인지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능력을 통해서 *선험적으로 인식/파악할 수 있으며, 오히려 경험적 방법만으로는 정의를 제대로 또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직관적 인식설은 모든 정의는 직관적 방법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의한 직관적 통찰이나 성찰을 통해서, 또는 인간의 초합리적/초경험적 인식능력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정의에는 합리적 논리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차원/성격의 정의도 존재하며, 이는 직관적 방법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없다고 본다.

정의가 여러 얼굴 a protean face을 가진 가변적 changeable 유동적 variable 개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인간이 갖는 가치는 대단히 많으며, 여러 차원/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덕적 가치(선하다/악하다), 미적 가치(아름답다/추하다), 의미적 가치(중요하다/사소하다) 등이 있다.

또한 이해적 가치(이롭다/해롭다), 정감적 가치(좋다/싫다), 성취적 가치(잘한다/못한다) 등과 같이 그 가치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좋은 것 good, 좋아하는 것 like, 이로운 것 good/useful을 곧 *옳은 것이라고 하는 데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옳기 때문에 *좋다고 말하는 것은 우선 *순리적/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좋기 때문에 *옳다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것은 모두 옳은 것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나아가 *이롭기 때문에, 또는 *좋아하기 때문에, *옳다고 말할 수는 더욱 *없다. 마찬가지로 옳으면 바로 이롭거나, 옳은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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