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란 ‘인간이 자신을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느끼지못하고 자신의 행위의 산물에 불과한 것을 오히려 주체로 보면서 그것에 복종하고 숭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 P39

프롬은 소외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것이의미하는 사태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보면서, 그 대표적인 예를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황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신으로 숭상할 때, 그것은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 그것에 복종하고 의존하게 된다. 사람들은 황금송아지가 전능한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은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우상상배의 예에서 보듯이 소외란 결코 자본주의사회에서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는 거의 전면적인 것이 되었다. 소외는 사회와노동, 소비하는 물건, 국가,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민족, 계급, 인종, 돈, 명예, 특정한 경전, 정치적인 교의, 특정한 정치가 둥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프롬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보이는 소외의 다양한 형태들을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은 단순히 연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구현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고양시키고 성숙시키는 활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고 노동자들은 생산을 주체적으로 주도할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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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교회오빠‘는 경건하다. *‘이상적‘인 교회오빠는 바른 생각, 바른 행동으로 무장한 *‘도덕적‘ 인간이다. 무엇보다 육적 쾌락이나 방탕한 생활습관을 멀리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절제한다. 늘 규범과 규칙에 맞추어 살고 모든 일에 *수도자의 자세로 임하는 인간형이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던 *중세의 수도자들과는 다르게, ‘교회오빠‘는 *세상일에 능하다. 경건 실천으로부터 오는 절제된 태도로 인해 ‘쾌락을 좇아 노는 일‘에는 영 답답한 족속일지 몰라도, *세속 직업이나 학업에는 적극적이고 심지어 *‘경쟁적‘이기까지 하다. - P4

대한민국에서 ‘교회오빠‘ *첫 세대는 *현대 교육을 많이 받은 *신식오빠였다. 직업이면 직업, 학업이면 학업, 아는 것도 많고 하는 것도멋져 뭐든 폼 나고 감동마저 주는 오빠!

*‘발전된 문명‘ 서구의 것을 가장 빨리, 그리고 최상으로 습득 전달하며 이를 자신의 생활에 현명하게 활용하는 *능력자!

*개인도 나라 전체도 **근대화의 *‘욕망‘으로 가득 찼던 시절, 그래서 *근현대적 성공신화였던 *교회오빠‘는 소녀들의 로망이요 젊은이들의 이상이요 부모들의 자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출세한 정치인, 기업인, 교육자 가운데는 경건한 능력자인 교회오빠 출신이 적지 않다. - P5

*세속으로부터 구별되려는 경건과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욕망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경건과 욕망, 전자가 후자의 신앙적 동력이 되어 한 신자 안에서 경건한 능력자를 완성시켰던 것이 근대화와 발맞춰 전개된 한국 개신교의 역사였다. - P5

역사적 우연성으로 인해 근대화의 욕망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다양한 갈래 중에서도 특히 *청교도 정신을 계승한 집단의 것이었다. - P5

**‘청교도Puritan 정신‘은 *16~17세기 영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등장하여 *17~18세기 *미국적 토양에서 무럭무럭 자라 *19세기 *세계복음화의 바람을 타고 **한국 땅까지 흘러들어 온 특정한 종교적 신념이다. - P6

청교도 연구가인 앨런 카드Allen Carden에 따르면 이 정신은 "영국 국교회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로마 가톨릭의 관행들을 버리고 회중의자치권과 권위를 행사하고 궁극적 권위로서의 성경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바랐던 사람들로 구성된 개혁주의 신앙운동"에서 기원하였다(카드, 『청교도 정신』, 8쪽).

역사적으로 청교도는 하나의 동질 집단으로 축소할 수 없는 신학적·교파적 다양성을지닌다. 그러나 세세한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라는 언어가 전달하는 의미 그대로 이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수 있는 *공통점을 말한다면 *‘깨끗하게 하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 P6

*먼저는 자기 자신의 *영혼과 생활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이들이요, 나아가 *교회와 사회,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욕망‘을 품었던 사람들이다.

물론 인종적으로야 앵글로색슨이라 몽골족인 우리와는 아무런혈연관계가 없으되, 그 정신으로 치자면 *대한민국 개신교도들만큼이 *‘청교도 정신‘을 철저히 계승한 *‘영적 후손‘이 세계적으로 드물지싶다. - P6

급진적인 평등 공동체였던 처음의 교회는 점차로 성직자들의 위계와 교리적 통제로 무장한 거대 조직인 *보편 교회(가톨릭 교회)를 탄생시켰다.

13세기 초 교황 이노센트3세는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왕들의 왕이라고 불렀다.

*교회는 태양이요, *제국은 달이라고 존재론적 서열을 주장했던 그는 교황이 국왕을 심판할 수 있는 영적 정치적 권한을 가진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였다.

어느 직업이든지 이를 선택하려 욕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 직업이 가지는 현세적 권력과 영향력을 말해 주는 법이다. - P8

*중세 말기 *교회가 소유한 토지가 유럽 전체 땅의 3분의 1에 육박했다. - P8

*13세기 말에 이르면 유럽의 대중들에게 *성직자라는 단어는 *경건이나 거룩함과는 연결고리가 없는, 오히려 상반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14~15세기 유럽 민중들은 성직자가 청력하고 결백하며 영적/물질적 가난을 추구하는 경건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직자라는 이름은 자신의 배를 채우는 *욕망의 대명사였다. - P9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적 욕망은 마침 부상하던 제3계급, 소위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경제적 욕망과 적절히 맞물렸고, 결국 *경건한 청교도이면서 *부상하는 부르주아였던 다수의 개신교 신자들로 하여금 개인의 내면적 개혁, 교회 개혁을 넘어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욕망하게 만들었다. - P11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제도, *법치 민주주의적 정치제도, 근대 *핵가족 제도의 많은 *정신적/실제적 기초가 *개신교도들의 *신앙고백과 유사하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같았던 유럽발 근대화와 개신교 발전사 ‘사이’에서 발생했던 모종의 결탁을 시사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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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치의 요점은 이제는 전통적인 의미의 ‘휴식이나 이해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부조리란 세계를 경험하는 일에 연결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제는 옛 전통에서처럼 확실한 보편적 진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와 난센스, 갑작스러움, 놀라움이 예술의 명령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예술에서 우리안에 깊이 뿌리내린 지식이나 가치가 입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놀라거나 실망하게 될 것이다."

갑작스러운 도약을 통해 잠재의식의 작용들을 찾아내려는 것은 창조 과정이 지닌 돌연성을 관객 앞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끌어다 놓는 일이다. 마치 관객이 객석이 아니라 무대의양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현대 예술에는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의식에 대한 이러한 갈망에서 생겨난 어떤 가까움이 말하자면 형식의 내밀함이 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정신의 ‘변덕스러운‘ 성격, 즉 우리 안에 있는 깊은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자신이 지닌 것에 만족하며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균형에 도달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 P176

병치는 종합 없는 동화, 전통적 질서를 떨쳐낸 직접성, 정신적 과정의 압축과 농축, 논리적 금기로부터의 자유, 시간 속 한 순간에서의 잠재적 통일성, 고정성을 요구한다.

"휴지(休止), 곧 정지시킴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지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등장한 인물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 대담함에서는 하나로 묶을 수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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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예(techne)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고 규정해 왔다 - P13

모든 종류의 앎과 선택이 어떤 좋음을 욕구하고 있으므로, 정치학이 추구한다고 지적했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 eudaimonia’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eu zen)과 ‘잘 행위하는 것’(eu prattein)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일원리들로부터 *출발하는 논의와 *제일원리들을 *향해 나아가는 논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탐구의 길이 제일원리들로부터 난 것인지, 아니면 제일원리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지를 물으며 올바르게 이 점을 문제로 지적했던 것이다.

마치 *달리기 경기장에서 *심판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반대편 끝까지 달리는 것과 그 역으로 달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물론 알려져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알려져 있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러하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다른 어떤 것들은 *단적으로 알려져 있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 P18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감각될 수 있는 좋은 것들로부터 *독립해서,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 P18

*제일원리(arche)는 사실이며, 이것이 *충분히 분명하다면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통해 훌륭하게 자란 사람은 제일원리들을 이미 가지고 있거나 쉽게 취할 것이다. 가지고 있지도 않고 쉽게 취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면 헤시오도스의 다음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고귀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니라" - P19

인간의 기능을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 P30

그래서 *각각의 기능은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 *수행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일 것이다.

또 만약 탁월성이 여럿이라면 그중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 P30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살펴볼 차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 탐구의 길은 "우리에게 더 알려지고, 더 명석한 것에서 출발하여, 자연에 있어(physei) 더 명석하고 더 알려진 것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가장 *존귀한 학문은 *신적인 것(to theion)을 다루는 학문이다. 즉 독립적이고,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실재를 다루는 *제일철학이 가장 존귀하다(<형이상학> 6권 1장)

그러나 *학적 탐구의 *출발은 제일철학이 아니다. 학적 탐구는 *자연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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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여러 사상에는 한 가지 공통된 성립 계기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기준으로 충분히 20세기 철학의 변천을 개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성립 계기는 다름 아닌 *과학이다. 과학을 직접 흡수하지 않은 경우라도 *20세기 철학은 *과학과의 관련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과학과의 관계 속에서 20세기 철학은 여러 가지의 ‘생각되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 P12

그것은 과학이 보여준 *새로운 ‘정당성’이었다.

과학은 *외부세계의 여러 *현상을 간결한 *수학적 이론에 근거해서 *설명하고 **실증한다.

일단 확정된 이론은 몇 번이라고 *관측이 가능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과학에는 과학의 정당성 유무를 거론할 수 없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 P13

*내부(관념)와 *외부(연장)의 일치라는, 철학이 지속시켜온 *사고형식의 *정당성은 과학이 보여준 위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손을 들었다.

철학은 이런 새로운 정당성에 대해 무엇인가 대응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이런 요구야말로 20세기 철학이 새로운 ‘생각되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 변모를 모색했을까?
크게 나누면 *세 가지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첫번째는 **철학의 과학화다. 철학은 과학이 되는 편이 좋다고 하는 입장이다.

두번째는 **과학의 철학화다. 즉 과학을 철학 속에 위치지우는 것이 좋다는 발상이다.

마지막은 *반(反) 과학이다. - P13

먼저 철학의 과학화에 대해 살펴보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그 하나가 *유물론(혹은 마르크스주의)이다. 실제로 측정 가능한 것만을 대상으로 하는 유물론적 태도는 과학의 태도와 같은 기반 위에 서 있다.

다른 하나는, *마하와 프레게로부터 러셀, *전기 비트겐슈타인, *논리실증주의, 콰인에 이르는 영미계통의 *언어론적 전회를 중시하는 흐름이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움직임을 기술하는 ‘명제’였다.

우리의 지식은 전부 명제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과학, 특히 수학 같은 엄밀한 명제에 의거해 우리의 지식을 구성한다면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명제와 결별하고 명확하게 논증 가능한 명제만을 다룰 수 있다. 외관만 그럴듯한 사상을 버리고 철학의 아웃풋을 철저하게 개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14

과학의 철학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비윸ㄹ리드 기하학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 등에 기반해 ‘과학=수학’ 자체가 증명 불가능한 어떤 전제를 근거로 해서 성립한다는 점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특히 쿤의 패러다임론은 ‘과학=수학’이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시대적 제약을 받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함을 명확히 밝혔다.

그 결과 과학=수학은 모든 앎의 기초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여러 세계관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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