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 논쟁 속의 그리스도교

/ 종교 - 인간의 투사(포이어바흐)

공산주의 체제 어디서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포이어바흐가 전개한 종교비판을 전제로 했고, 그래서 그는 *현대 무신론의 *교부가 되었다. - P42

포이어바흐의 근본명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

신이라는 갠며은 인간의 투사 projekti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절대적 존재. wesen 곧 인간의 신은 인간 자신의 본질이다. 인간 위에 있는 대상의 힘은 인간 자신의 본질의 힘이다.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영상을 신성한 존재의 온갖 속성들로 눈부시게 장식하여 *투사 *구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신의 사랑, 지혜, 정의 그것들은 실제로은 인간, 인류의 속성들이다.

*인간이 인간의 신이다. 바로 이것이 종교의 핵심 비밀이다. - P43

그러나 종교가 *단지 투사일 따름이라는 것은 포이어바흐도 결코 입증하지 못했다.

종교는 어떤 전혀 다른 *실재와의 관계이기도 하다. - P44

**종교의소멸에 관한 주장


*미래에는 "*신앙의 자리에 *회의가 들어서고,
*이성이 *성서를,
*정치가 *종교와 교회를,
*땅이 하늘을,
*노동이 기도를,
*물질적 궁핍이 지옥을,
*인간이 그리스도를 대체하리라는 것이다.

참으로? 오늘날 너무나 분명해진 사실: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의한 *종교의 폐기(포이어바흐)나
*무신론적 사회주의에 의한 *종교의 절멸(마르크스)이나
*무신론적 과학에 의한 *종교의 대체(프로이트) 그 어느 것도 올바른 예측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 P44

오히려 완전히 거꾸로, 선한 인간 본성(포이어바흐)에 대한 신앙은 명백한 투사임이 드러났고,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신앙(마르크스)은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자기위안임이 밝혀졌으며,
합리적 과학에 대한 신앙은 위험한 환상임이 입증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허무주의의 문제제기를 매우 진지하게 수용해야 하지만, 어쨌든 신의 죽음에 관한 니체의 예고 역시 그릇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오히려 거꾸로 오늘날 우리는 오랜 세월 무신론 아래 있던 구소련과 아직도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인 중국에서도 종교가 돌아오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 P45

그런데도, 후현대에서의 종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각 종교가 앞에서 언급한 걸출한 종교비판가들의 *정당한 근본 *관심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가 중대한 변수가 될 것이다.

- *종교는 후현대에도 또다시 (현대에 그토록 자주 그러했뜻) 인간의 *지성적 *윤리적 *정서적 *소외와 *빈곤화의 표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여러모로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참된 *인본주의가 될 것인가?

- 종교는 또다시 *아편이나 사회를 달래고 진정시키거나 억압하는 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포괄적 계몽과 *사회적 해방의 수단이 될 것인가?

- 종교는 *환상이나 *정신적 미숙 *노이로제 *억압의 표현으로 드러날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 정체성과 *정신적 성숙의 표현으로 드러날 것인가?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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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개체화

시몽동의 기술철학은 ‘실체로부터 관계로’ 사유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독특한 개체화론과 역동적 관계론을 배후에 두고 있다 - P19

전통적인 *실체중심의 *정적 사유 패러다임을 *관계 중심의 *동적 사유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킨다 - P20

*질료는 아무런 힘도 없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포텐셜 에너지로 가득 찬 *’준안정적인 전前개체적 실재’로 대체된다 - P25

*형상은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주형틀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것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관계가 산출될 때 형성되는 *정보 개념으로 대체된다. - P26

*개체화는 전개체적인 실재에 개체화를 촉발하는 사건으로서의 *정보 씨앗이 들어오면서 시스템 전체가 상전이 하는 것, 즉 이전에 없던 상들이 개체들로 발생하는 것이다. - P26

잠재성이란 개념은 시스템의 준안정성이란 개념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시몽동의 생성은 *잠재성의 현실화라기보다는 *포텐셜 에너지를 지닌 *시스템의 작용이다.
퍼텐셜한 것은 현실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실재의 형태들 중 하나이다. - P30

태양 에너지라는 우주적 크기의 등급과 흙 속에 있는 화학적 성분들의 분자적 크기의 등급 사이에서 소통과 관계 맺음을 실현한 식물의 싹이 중간 크기 등급의 개체로서 출현하는 것과 같다. - P33

결정 씨앗이 이전 개체화의 결과물로서 결정체의 구조와 형상을 실어 나르는 *정보 송신자라면, 과포화 용액은 퍼텐셜 에너지를 지닌 준안정직인 장으로서 새로운 구조를 수용하여 자신의 퍼텐셜 에너지를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방출하려는 *정보 수신자라 할 수 있다 - P48

시몽동의 기술철학은 기술을 폄하하고 배제하는 *문화중심주의와 *테크노라트적 기술만능주의의 양극단을 모두 비판한다.

*편협한 문화중심주의는 *기술적 실재 안에 녹아들어가 있는 *인간의 사유와 몸짓을 보지 못하고 기술적 대상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배척한다.

*과도한 기술만능주의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대체할 수 있다고 자동 로봇을 인간과 *동일시한다. - P64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적 대상 사이의 적합한 관계 방식을 수립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기술적 대상들 *고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술적 대상들은 *단순한 사용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나름의 발생과 진화를 겪어 *개체화된 것들이다. - P65

시몽동은 기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는 기술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하여 기술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면 기술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 협력적 공존과 *공진화의 관계임을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 P68

*인간과 기계가 *동등한 위상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 - P70

기술적 대상들의 *발생과 *진화는 인간의 *필요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에 제기된 양립불가능성과 과포화된 불일치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전개된다. - P72

4장 기술-정치

시몽동의 기술철학은 개체화론에 근거한 존재론적 분석에 치우쳐 기술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특성에 대한 고찰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명시적인 논의나 기술이 야기하는 정치적 효과에 대한 비판적 통찰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 P122

랭던 위너

*기술의 정치성은 *제작자나 *사용자인 인간의 *정치적 의도와 목적에 따라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달렸다. 따라서 기술이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작동하며, 어떤 효과를 산출하고 있는지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 P122

*기술 그 자체가 *본래적으로 *특정한 정치적 속성을 지닌다.
가량 핵무기는 작동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치명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명령 체계에 의해 통제되는 정치 체제가 요구되지만,

태양열 발전소는 개인과 지역 공동체가 효과적을 관리할 수 있는 분산적 방식으로 제작하고 통제하는 민주적 집권체제에 적합하다는 것읻.

*기술개발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상 *활용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정치적 조건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너의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조건과 얽혀 있지 않은 순수 기술이란 불가능하며, 기술은 정치, 즉 권력의 배치와 작동 및 사회 체제와 상호 작용한다.

따라서 기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어떤 기술 시스템이 우리가 원하는 정치 체제와 양립 가능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위너의 생각이다. - P123

장 포스트 휴먼 - 트랜스휴머니즘

깊이 숙고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대담하게 기술공학을 우리 자신들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정확하게 더 이상 휴먼이라고 시술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포스트휴먼이 될 수 있다. - Max More 맥스 모어

*휴머니즘이 *인간 본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개선에 *배타적으로 의존하고자 한다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우리의 *생물학적/유전적 유산에 의해 부과되어 있는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공학을 적용하고자 한다.

*탈-신체화와 신체 변형의 자유에 대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욕망에는 *‘우리’ 중심의 강력한 인간 중심주의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전제되어 있다. - P210

여기에는 안티-휴머니즘이 제기했던 ‘인간’ 자신에 대한 반성, 즉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 어떤 조건에서 구성되고 생산되었는지에 대한 고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구축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배제되었던 ‘비-인간 타자들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고 있지 않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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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언명처럼, 인간뿐 아니라 기술도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반성과 성찰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듯, 기술 또한 그러하다.

기술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기술은 이들을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주조하면서 동시에 공진화한다.

/ 들어가는 글

북유럽 최고의신 오딘은 세상의 *지혜를 너무도 갈망했던 나머지 자신의 *눈을 후벼 파 *현인의 제물로 바쳤다. 아니 이도 모자라 자신의 몸을 던져 저승을 넘나들 정도로 실천적이었다.

그에게 세상의 지혜란 몸뚱이를 바쳐서라도 얻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무엇이었다. - P5

*사회적 반성과 *성찰이 없는 *기술의 향연은 결국 *오늘만도 못한 미래를 만들어 낼 공산이 크다. - P8

시몽동, 매클루언, 라투르 등 기술철학자들에 대한 천착은, 다른 무엇보다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과 연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기술의 자기 생성적 동력을 갖는다는 것을 밝히는 기술 유물론적이고 기술 계보학적 탐구이며 현재까지 줄곧 공백지였던 영역에 대한 관찰을 보장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판적 인문 연구의 전통에 입각해 인간 *주체와 과정에 개입하는 테크노-권력 작동의 문제를 살피는 연구 영역이다. - P11

*무요류와 *완전체의 기술이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고, 기술은 인간 사회와 *관계 맺으며 *진화하는 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P12

*시몽동의 ‘휴머니즘’은 한마디로 *기술과의 *관계 단절로부터 *소외된 인간 *실재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김재희는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을 인간에게서 *적대화하고 단절시키고 주종 관계로 전락시키는 *인문학적 편견과 폄하를 거부했다고 본다.

시몽동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계와 *공존하며 *공진하고 *상호 협력하는 *관계적 ‘인간-기계 앙상블’을 주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P13

김재희는 시몽동에게서 고유의 내적 발생과 진화의 계기를 지닌 기술적 대상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단절의 고리를 *메꾸고 *상생하는 일이,

곧 *기술을 *소유의 대상이 아닌 *호혜의 존재로 존중하며, 사회 변혁을 위하여 인간 개체를 초월해 집단화된 기술의 발명을 이루어 내며, 인간-기계 간에 상호 정보 공유의 네트워크 역략을 최대한 회복하는 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 현대인의 기술에 대한 주인-노예 접근법이나 만연한 *기술만능주의를 무력화하는 데 장차 시몽동의 매력이 커질 것이라 본다. - P13

심혜련은 2장에서 *벤야민이 **기술을 또 다른 차원의 자연, 즉 ‘**제2자연’이라 불렀고,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학습 과정이 중요하며, 그 학습의 중요한 방식으로 예술의 역할론을 제기한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벤야민 스스로 기술을 *제1기술과 *제2기술로 나눠 보고, 전자를 *억압적/도구적 기술로 후자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유지하는 공생의 해방적 기술로 바라봤다. - P14

이 둘의 현격한 차이는 제1기술이 기술에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의 *도구적 기술이라면 제2기술은 인간이 이와 함께 *놀고 어울리는 *해방의 기술이라는 데 있다.

특히 이 놀이의 기술은 위계의 기술과 달리, 인간, 자연, 예술이 *상호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매개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기술 복제로 탄생한 영화는 바로 이 제2기술에 해당하며, 이는 아우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한편 기술적 이미지들의 반복과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산적 지각을 발달시켜서 ‘*놀이적 요소’를 증진시킨다.

심혜련은 벤야민의 당시 진단을 통해서, 아우라의 몰락으로 인한 예술 형식의 급진적 변화와 실험 정신의 출현, 그리고 분산된 지각 구조에 의한 대중의 사물에 대한 거리 두기가 새로운 현대적 수용 주체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고 판단한다. - P14

백욱인은 매클루언이 기본적으로
"*미디어가 *일상 삶의 *환경이 되고 이것이 인간 *감각과 *상호 작용하면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기반 조건이 되는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며, 이는 닐 포스트먼 등 후대 학자들에 의해 *미디어 생태학 연구를 태동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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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종교 비판의 정당성과 부당성: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근대 유럽의 대표적 무신론자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이 대체로 옳았다는 것은 신자들도 인정해야 한다!

1) 포이어바흐는 전적으로 옳았다: 모든 인간적 믿음·소망·사랑처럼 종교에도 ‘투사’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종교가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는가? 아니다. 종교는 전혀다른 실재와의 관계일 수도 있다.

2) 마르크스도 전적으로 옳았다: 종교는 사회를 진정시키고 위로하고 억제하는 수단인 ‘아편’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종교는 그럴 수 있지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포괄적 계몽과 사회적 해방의 수단일 수’도’ 있다.

3) 프로이트도 전적으로 옳았다: 종교는 심리적 미성숙, 심지어 신경증이나 퇴행의 표현인 ‘망상’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꼭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격적 정체성과 심리적 성숙의 표현일 수 있다. - P80

투사로서의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사회심리학적 논증은 변화무쌍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논증은 방법론적 · 사실적 근거가박약한 한 요청에 기반을 두고 있다

: 포이어바흐의 투사 이론, 마르크스의 아편 이론, 프로이트의 망상 이론은 신이 ‘단지’ 인간적 투사나, 개인의 이해의 제약을 받는 위안이나, 유아적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단지‘ 혹은 ‘~에 지나지 않는다‘가 포함된문장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신학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심리학이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은 잘못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늘 투사의 구조와 내용을 보여 주며, 투사라는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투사 사실이 관련 대상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실재하는 신과 신에 대한 소망은 얼마든지 상응할 수 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면 왜 안 되는가? 내 삶과 인류사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기를, 신이 존재하기를 좀 원하면 왜 안 되는가?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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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존 이블린 John Evelyn은 영역본 뒤에 붙인 <건축가와 건축에 관한 이야기>라는 후기에서 이 문제를 다르게 보았다.

이블린은 건축 예술은 네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첫째가 *아르키텍투스 인게니오architectus ingenio : 천부적 재능의 건축가로서, 건축의 아이디어를 내놓고, 건축의 역사에 아주 밝고, 기하학 · 드로잉 ·천문학·법학·의학· 광학 등에 능숙한 사람이다.

두 번째가 *아르키텍투스 숨프투아리우스 architectus sumptuarius: 돈을 대는 건축가로서 주머니에 돈이 넘쳐흐르는 사람, 즉 후원자다.

세 번째가 *아르키텍투스 마누아리우스 architectus manuarius: 손으로 일하는 건축가로서 <여기에 장인과 인부들을 포함시킨다고 말했다.

마지막이 *아르키텍투스 베르보룸 architectus verborum: 말의 건축가인데, 이블린은 자신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했다. 말의 건축가는 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건축 작품을 언급하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이블린의 건축가론은 하나의 중요한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있다. *건축은 이 *네 가지 기능 중 한두 가지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네 가지 모두의 종합이라는 것이다.

어떤 건축 작품의 특징을 탐구하는 비판적 언어도 아르키텍투스 인게니오의 구상이나 아르키텍투스 마누아리우스의 장인 정신 못지않게 건축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언어를 건축의 일부로 보는 사상과 건축하고는 아예무관하다는 사상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거리감의 문제를 탐구한다. - P17

/ 언어와 역사

언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간주할 때, 이 책이 가장 주목하는 점은 언어와 의미 사이의 유동적 상태이다.

*의미는 단어를 쫓아가고, *단어는 의미로부터 달아나 버린다. - P19

칸트는 아름다움을 정의하면서 *아름다움은 *대상보다는 *주체에 달려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예술 작품이 일으키는 체험의 특정 형태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18세기 건축 비평가인 부예는 <인간의 즐거움을 묘사한다는 것은 그 즐거움의 영향 아래 사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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