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종교 비판의 정당성과 부당성: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근대 유럽의 대표적 무신론자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이 대체로 옳았다는 것은 신자들도 인정해야 한다!

1) 포이어바흐는 전적으로 옳았다: 모든 인간적 믿음·소망·사랑처럼 종교에도 ‘투사’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종교가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는가? 아니다. 종교는 전혀다른 실재와의 관계일 수도 있다.

2) 마르크스도 전적으로 옳았다: 종교는 사회를 진정시키고 위로하고 억제하는 수단인 ‘아편’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종교는 그럴 수 있지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포괄적 계몽과 사회적 해방의 수단일 수’도’ 있다.

3) 프로이트도 전적으로 옳았다: 종교는 심리적 미성숙, 심지어 신경증이나 퇴행의 표현인 ‘망상’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꼭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격적 정체성과 심리적 성숙의 표현일 수 있다. - P80

투사로서의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사회심리학적 논증은 변화무쌍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논증은 방법론적 · 사실적 근거가박약한 한 요청에 기반을 두고 있다

: 포이어바흐의 투사 이론, 마르크스의 아편 이론, 프로이트의 망상 이론은 신이 ‘단지’ 인간적 투사나, 개인의 이해의 제약을 받는 위안이나, 유아적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단지‘ 혹은 ‘~에 지나지 않는다‘가 포함된문장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신학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심리학이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은 잘못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늘 투사의 구조와 내용을 보여 주며, 투사라는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투사 사실이 관련 대상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실재하는 신과 신에 대한 소망은 얼마든지 상응할 수 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면 왜 안 되는가? 내 삶과 인류사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기를, 신이 존재하기를 좀 원하면 왜 안 되는가?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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